소설리스트

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84)화 (84/156)

#083

요한은 사탕을 도로 가져왔다.

“아무래도 여길 나가는 게 쉽지는 않겠네요.”

“그렇다고 계속 말했는데….”

바닥에 벌렁 드러누운 해리가 움찔거리며 따졌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미 기력이랄 것이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아 전혀 무섭지 않았다. 요한은 해리의 귓가에 손뼉을 쳤다.

“적어도 여기서 못 나간다는 건 증명했잖아요. 축하해요.”

짝짝짝, 박수 소리가 사거리에 허무하게 울려 퍼졌다.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양손을 거둔 요한이 검지로 턱을 두드렸다.

“그럼 이제 빨리 고르고 사거리에서 나가자고요.”

그의 발언에 개리와 해리 모두 당황했다. 몸을 용수철처럼 일으킨 해리가 재빠르게 튀어 왔다. 긴장을 떨치려는 듯 주먹을 가볍게 쥔 그가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내가 진짜 사람이지만, 이건 당연한 주지의 사실이지만 아직 증명이 충분치 않을 텐데? 너무 섣부르게 고른 것 아닌가?”

“맞아. 나도 내가 진짜지만, 아직 이렇다 할 이야기를 안 했던 것 같은데.”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거 있나요? 그러니까 이 사거리의 요지는 악마의 부탁을 들어주면 소원을 이루어 준다, 이거잖아요.”

요한의 확인에 해리와 개리가 긍정했다. 선선한 동의를 얻어 낸 요한이 그들에게 질문했다.

“악마의 부탁이 매번 같나요?”

그러자 개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앞머리를 몰래 옮겨 심은 듯한 풍성한 뒷머리를 매만지며 사거리를 바라보았다.

“조금씩 다르다고 들었네. 예를 들면 우리 이전에는 산 사람을 고르는 부탁이었고 그보다 더 전에는 진짜 사람을 고르라는 거였지.”

“그걸 어떻게 알지?”

비수처럼 날카로운 목소리가 개리의 말을 막았다. 해리였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콧바람을 크게 뿜었다.

“네가, 네가 악마니까 전부 아는 걸 테지.”

“그건 악마가 아니면 모를 정보였어요, 해리?”

해리의 단정적인 어조에 요한이 눈을 반짝였다. 요한의 물음에 그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끄덕거렸다. 해리는 자신이 인간임을 증명할 마지막 기회가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요한이 묻지도 않은 내용까지 샅샅이 알려 주었다.

“그래, 그래! 내가 들은 건 철물점 둘째가 쌍둥이의 부탁을 들어줬다는 두루뭉술한 이야기뿐이었어. 애초에 유타피아에서도 사거리의 악마에 관해 아는 사람은 무척 소수야. 그, 그러니 저렇게 자세하게 안다는 건 다시 말해 저 자칭 개리가 악마라는 뜻이나 다름없어!”

“그렇군요. 고마워요, 해리. 개리, 악마가 이루어 준다는 소원의 범위는 어떻게 됩니까?”

해리는 자신의 결사적인 충고에도 불구하고 요한이 대수롭지 않게 넘기자 눈을 부릅떴다. 그의 숨소리는 불규칙적으로 변해 갔다. 반면 개리는 턱을 세우고 뻔뻔스레 호응했다.

“곤달걀을 병아리로 부화시키는 걸 제외한 대부분?”

“의외로 소박하네요.”

“소박하긴, 뱀은 부화 가능해. 물론 난 악마가 아니지만 이 정도는 상식이지.”

“좋아요. 그만하면 가능하겠는걸요.”

잠깐 실망했던 요한이 기운차게 말대답했다. 그는 씨익 웃으며 개리를 가리켰다.

“난 개리를 사람이라고 인정할게요. 그런 부탁이잖아요?”

한없이 쾌활한 어조였다. 이산화 탄소도 이보다는 무거울 터였다. 해리의 입술이 벌벌 떨렸다. 떨림은 점차 온몸으로 번졌다.

“아니, 그건 아니지. 방금 들었잖아. 어떻게 들어도 내가 진짜 사람이잖나?”

“뭐, 그렇죠.”

키가 크고 흉곽이 두꺼운 청년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말을 수긍했다. 해리는 제 귓구멍을 믿을 수 없었다.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이 정녕 저게 전부일까. 한 사람의 목숨을, 인생을 시궁창에 내던지고 하는 게 사과가 아니라 단조롭기까지 한 응답이라니?

“그런데 왜 그런 실수를 하지? 무효야. 이건 무효야!”

방약무인한 태도에 마침내 해리가 소리쳤다. 발을 구르며 단단한 아스팔트 바닥을 내리찧었다. 발꿈치가 뭉개지고 목구멍이 찢어져도 절규는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요한은 그의 마지막 용기까지 짓밟았다.

“실수가 아니에요, 해리.”

핼쑥해진 얼굴이 요한을 올려다보았다. 해리는 작금의 상황을 믿기 싫다는 듯 머리를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실수가 아니면 대체 왜?”

“소원을 들어준다잖아요. 그러잖아도 마침 필요했거든요.”

요한이 등 뒤의 자동차를 가리키자 개리가 느긋하게 미소 지으며 걸어왔다. 그는 해리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요한에게 물어보았다.

“내 부탁을 들어줘서 고마워. 그래, 소원이 뭔가?”

“차 퍼진 것 좀 빨리 고쳐 주면 좋겠는데.”

소박하기 짝이 없는 소원에 개리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그건 사거리에 있어서 멈춘 거야. 자네가 내 부탁을 들어줬으니 사거리는 곧 평범해질 테고, 그러면 차도 금방 멀쩡해지겠지. 다른 소원을 빌도록 하게. 난 그렇게 쩨쩨하지 않거든.”

청년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곧장 대답했다.

“아, 그러면 친구를 만나러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싶어요. 지도에 표시해 줄래요?”

요한이 차 안쪽에서 지도책을 꺼내 오자 개리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그의 기준으로 따지자면 요한의 소원은 하나같이 소박하다 못해 빈약했다.

“고작 그런 거? 꼭 내가 알려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을 텐데.”

“그렇긴 한데, 밤늦게 전화하기가 좀 그래서. 예의도 없고.”

그때 해리가 삶은 문어처럼 시뻘게진 얼굴로 괴성을 터뜨렸다. 그는 개리가 아닌 요한을 향해 분노를 쏟아 냈다.

“악마와 거래하다니, 죽은 후 지옥에 떨어져도 좋으냐. 네 영혼이 영원히 지옥 불에 타오를 게 두렵지도 않아!”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이 볼을 긁었다. 요한은 작게 목을 울렸다. 속으로 말을 고른 후 그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사실 부모님께는 비밀인데. 난 그다지 독실한 편이 아니에요. 천국이나 지옥…. 연옥 같은 사후 세계는 그렇게 가슴에 와닿지 않는달까.”

그는 오히려 해리의 거센 반응이 이해되지 않는 듯했다.

“해리가 왜 저러는 거죠?”

“그야 악마한테 잡혔으니까? 이건 부탁하고 다른 문제거든.”

잠시 고민하던 개리가 요한에게 제안했다.

“만약 자네가 소원으로 이 남자를 해방해 달라고 하면 그도 가능하네. 마침 그런 소원을 빈 사람도 있었고.”

개리의 목소리는 특별히 작거나 크지 않은 평범한 성량이었다. 그렇기에 함께 사거리에 있는 해리가 들은 건 당연했다. 그는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개리를 보고, 다시 요한을 보았다. 해리의 눈에 순식간에 물이 차올랐다.

“제발, 제발 나를 좀 살려 줘. 나에게는 가족이 있어. 집에서 내가 돌아오기만 기다리는 어린 딸과 아내가 있어. 내가 없으면 굶어 죽을지도 몰라. 아니, 틀림없이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죽어 버릴 거야.”

“가족이 있다고요.”

요한이 되묻자 애걸하던 해리가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희망을 놓지 못한 사람은 더없이 필사적으로 변하기 마련이었다. 뭇 보통 사람이라면 마음이 쓰일 법한 태도였다. 그러나 하필 해리의 앞에 있는 건 요한이었다.

“하지만 내 가족도 아니고…. 그렇죠?”

극치에 다다른 이기주의적 발언에 해리는 목이 졸린 것처럼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악마만이 귀밑까지 입을 찢으며 즐거워했다. 해리는 마지막으로 발악하듯 악을 썼다.

“사후 세계를 믿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저 악마는! 저 악마가 벌인 이 끔찍한 일들은 다 뭐야? 악마가 존재한다면 사후 세계 역시 마땅히 존재하리란 것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다고.”

온몸에서 긁어모은 기력은 쉽게 사라졌다. 해리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매섭게 치솟은 눈꼬리도 슬슬 가라앉았다. 요한은 비참한 몰골의 중년 남자에게 여전히 다정한 말씨로 말을 걸었다.

“해리, 그러면 나도 묻겠는데 여기가 지옥이에요?”

“뭐?”

“악마가, 뭐. 있다고 칩시다. 여기 이분이 성경에 나오는 사악한 뱀이나 그런 거라고 치자고요. 하지만 보세요. 악마가 여기에 있지만 이곳이 지옥은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악마도 지구에 발붙이고 사는 생물이지 않겠어요.”

그는 동굴처럼 깊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타인을 설득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요한은 그렇게까지 타자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무정하고 또 무정한 청년은 그저 제 생각을 전했다.

“나는 죽은 후의 일은 잘 모르겠어요. 애초에 내 뇌와 심장이 기능을 멈추면 나라는 자아가 남아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영혼에 뇌가 있어요? 뇌도 심장도 근육도 없는 그걸 나라고 여길 수 있을까요? 나는 잘 모르겠어요. 정확하게는 못 믿겠다는 게 더 낫겠군요. 생각해 봐요, 해리. 내가 사고를 당해 팔이 잘린다면 그걸 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무도 없을걸요. 그건 그냥 떨어져 나간 내 부속품에 불과해요. 흘린 머리카락, 떨어진 살점이나 배설한 대변을 나라고 부르지는 않잖아요.”

요한이 해리와 눈을 맞췄다. 그의 눈에는 지성과 이지가 엿보였다. 섬뜩하게도.

“그러니까 나는 살아 있을 때 최선을 다해서 좋아하는 애와 행복해질 거예요. 내 피가 심장을 도는 동안에.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삶이란 얼마나 귀중하고 아름다운지 깨달았거든요. 현재에 충실해야지 않겠어요.”

번지르르한 말을 늘어놓았지만 요한이 하는 말은 무척 단순했다. 그는 자신의 이기적이고 사소한 소원을 위해 해리의 생명을 경시했다. 사후 세계는 믿지 않지만 그에 진배없는 힘을 가진 악마에게 거리낌도 없이 해리를 내던졌다.

“아….”

해리는 이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도 요한을 이해해 버린 것이다. 지독한 모리배, 사악하기까지 한 에고이스트를 변화시킬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손과 발끝에서 천천히 올라오는 체념은 달콤했다. 주저앉은 중년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요한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지갑을 빼 갔다.

“그리고 이건 당신 것이 아니니까 도로 가져갈게요.”

이 모든 꼴을 지켜보던 개리가 지도책을 내밀었다.

“좋은 구경 시켜 줘서 고맙네. 그리고 펜으로 체크해 놨으니까 확인하도록 해. 혹시 몰라 전화번호도 적어 놨으니 엉뚱한 곳 가지 말고.”

내심 악마적인 능력을 이용하리라 짐작했던 요한이 시치미를 뚝 떼고 지도책을 받았다. 요한을 따스하게 바라보던 개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도 슬슬 여길 떠날까 해. 하도 부탁했더니 이제 레퍼토리가 다 비슷비슷해졌어. 신선함이 부족하던 차에 자네 같은 사람을 만난 건 재밌었지만 아무래도 장소가 바뀌어야 사람도 바뀌는 법이지.”

“그렇군요.”

용건을 마친 요한은 개리에게 이미 흥미를 잃었지만 추임새 정도야 못 넣어 줄 것도 없었다. 하지만 개리는 눈치챘는지 삐죽 웃었다.

“흥, 매정하긴. 친구가 홈쇼핑에 열을 올리던데 나도 구경이나 가야겠어. 마침 일손도 생겼으니 데려가면 반겨 주겠지.”

“번창하세요.”

지도책을 펼치느라 고개도 들지 않고 있던 요한이 진심이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응원을 건넸다. 서늘한 바람이 한 줄기 불어왔다.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엇!”

바람은 돌풍으로 변해 불어닥쳤다. 세찬 압력에 책장이 나부껴 얇은 종이가 미친 듯이 넘어갔다. 팔락팔락 흔들리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다음 장, 다음 장, 그리고 또 다음 장이 되었을 때 바람이 돌연 멈췄다. 들이닥쳤던 것처럼 그치는 것도 갑작스러웠다. 요한은 가만히 열린 책장을 조심히 내려다보았다. 단정한 글씨가 적당한 크기로 적혀 있었다.

디코이 모텔.

그가 가야 할 목적지가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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