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
코를 찌르는 술 냄새에 순간 취객의 싸움에 휘말린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똑 닮은 얼굴의 두 남자는 요한에게 주먹질이나 욕설하는 대신 간절히 애원했다. 그들은 각각 자신을 해리와 개리라고 소개했다. 요한은 안쓰러워하며 물어보았다.
“혹시 부모님이 이름 짓는 걸 귀찮아하셨나요? 아무리 쌍둥이라지만….”
“아, 아니야. 글쎄, 내가 진짜고 이쪽이 가짜, 악마란 말일세.”
해리가 펄쩍 뛰었다. 개리도 지지 않았다. 그는 비좁은 경작지에서 풍작을 거둔 듯한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누가 할 소리? 이 녀석이 가짜고, 내가 진짜야. 부탁이야, 나를 사람으로 인정해 줘.”
“아, 아니야. 인정할 거라면 나를 사람으로 인정해야지. 왜냐하면 내가 사람이니까!”
“음….”
개리의 말꼬리를 잡고 똑같은 소리를 하는 해리를 바라보며 요한이 턱을 쓰다듬었다. 한시라도 빨리 차를 고치고 떠나고 싶은데 귀찮은 사람들에게 걸렸다는 생각을 도무지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살피니 이들의 집 앞이나 어슬렁거릴 법한 옷차림과 지독하게 풍기는 알코올의 향에 또 이런 생각도 들었다. 해리와 개리의 쓰잘머리 없는 부탁을 들어준 뒤 근방의 정비소를 소개받을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은 야심한 시각이었다. 완전한 타지인인 요한은 불가능해도 같은 마을 사람의 요청이라면 한결 수월하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막무가내로 들이닥치는 것보다 훨씬 나은 계획이었다.
요한이 처음보다는 제법 호의적인 미소를 띠고 해리와 개리를 바라보았다. 주변에 이렇다 할 빛도 없건만 그의 눈동자가 과도하게 반짝거렸다. 그러나 아무리 빛이 환하게 비쳐도 없는 믿음이 자라나지는 않았다. 해리는 그것을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그는 예민한 어조로 빠르게 말했다.
“자네는 내가 헛소리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아니야, 절대 그런 게 아니야.”
헛기침을 한 해리가 머리를 엉클어뜨리며 요한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공포에 떨며 개리를 힐끔거렸다.
“이 사거리는 악마의 사거리네. 악마의 부탁을 들어주면 소원을 들어주지만,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곳이야.”
“끔찍한 일이요? 무슨 끔찍한 일이요? 연쇄 살인마가 쫓아오거나 멍청이가 석궁을 쏘거나 건물에서 떨어지거나 촉수가 내장을 훑거나 눈에 화살이 박히나요?”
“무,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끔찍하다면서요.”
요한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는 진실로 두려웠던 일만 나열했지만 해리는 요한이 자신을 놀린다고 여겼는지 심통 어린 눈빛으로 코를 찡긋거렸다.
“그야 나도 모르지. 나는 악마가 아니니까.”
친하지도 않은 중년 남자가 토라지는 꼴은 가관이었다. 요한은 그가 몹시 성가셨지만 구태여 드러낼 필요성을 느끼지도 않았다. 개리가 다가와 간결하게 정리했다.
“흠, 흠. 그러니까 악마의 부탁을 들어주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이네.”
“그렇군요.”
눈앞에 정신병자가 두 명이나 있다는 사실에 감탄이 나왔다. 요한은 조심스러운 어조로 운을 떼었다.
“혹시 유전병이 있으신가요?”
무례했다. 해리는 울화를 이기지 못하고 가슴을 주먹으로 마구 내리쳤다. 그의 갈색 눈동자가 눈물에 젖어 축축해졌다. 연신 답답하다며 분통을 터뜨리던 해리의 몸짓이 멈춘 것은 멀뚱한 표정의 개리와 눈이 마주쳤을 때였다. 해리는 개리의 붉은 눈동자를 빤히 쏘아보더니 돌연 환하게 웃었다. 그는 달도 뜨지 않은 하늘을 향해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아 흔들었다.
“그래, 방법이 있어. 이봐, 자네. 들어 보게. 내가 악마를 구분하는 방법을 알아. 악마는 말이지, 뱀의 눈을 지녔다네!”
“뱀의 눈이요?”
요한은 동공이 길쭉하게 갈라진 눈을 떠올렸다. 그는 해리와 개리의 눈을 번갈아 살폈지만 그들의 눈동자는 색만 다를 뿐 평범한 사람의 것과 똑같았다. 요한이 모호한 표정으로 해리를 바라보았다.
“그게 아니야, 아니라고. 설명해 주지.”
중년 남자는 제 펑퍼짐한 점퍼의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하지만 손이 가늘게 떨리는 탓에 몇 번이나 헛손질했다. 해리는 이를 악물고 아예 주머니를 뒤집었다. 온갖 잡다한 물건이 많이도 쏟아졌다. 트럼프 카드와 동전, 땅콩, 지갑, 주사위 등이었다. 해리의 목적은 주사위였는지 그는 입을 헤벌리고 나머지 물건을 다시 주머니에 쑤셔 박았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심해보다 깊은 색으로 비치는 눈동자가 해리의 손을 진득하게 좇았다. 요한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후줄근한 점퍼의 주머니를 보았다. 해리가 꺼냈던 지갑은 요한도 아는 물건이었다. 서준이 열일곱 살이 되던 해 생일 선물로 받은 무난하고, 평범하고, 특색이라고는 없는 손바닥만 한 지갑이 저곳으로 들어갔다.
심장이 불쾌하게 뛰었다. 요한은 이 감정을 이해했다. 모욕과 멸시가 적절한 농도로 뒤섞이면 이런 기분이 들었다. 기실 요한은 제법 단순한 사람인지라 그로서는 드물게 느끼는 감정이었다.
저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눈빛을 이해하지 못한 해리만이 전에 비하면 한층 더 가뿐해진 태도로 주사위를 손바닥 위에 올렸다.
“자, 이걸 보게나. 뱀의 눈은 두 개의 주사위를 던졌을 때 눈이 모두 1이 나오는 것을 뜻하지. 지금 나한테 있는 건 하나밖에 없지만, 아무튼 이걸 봐.”
해리가 내민 주사위는 눈이 하나인 쪽이 하늘을 향했다. 빨간 눈이었다. 웃음을 참지 못하고 일그러뜨린 입술 사이에서 환희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빨간색. 빨간색이야말로 저놈이 악마라는 증거지.”
그는 요한이 당장이라도 자신을 사람이라 선언해 주길 기다렸다. 그러나 요한은 떨떠름한 눈빛으로 주사위와 해리를 번갈아 보았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믿어요?”
“뭐?”
“뱀의 눈인 사람이 악마라는 건 당신의 주장일 뿐이잖아요. 무작정 믿기에는 근거가 부족하죠.”
해리의 목이 끝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곧 얼굴은 새파랗게 변했으며 마지막에는 핏기가 사라져 창백해졌다. 개리가 옳다구나 끼어들었다.
“맞아, 맞아. 자네 아주 똘똘하군.”
그는 요한의 손을 붙잡고 붕붕 흔들며 맞장구쳤다. 워낙 자세가 바른 탓에 요한은 팔꿈치 위로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지만 개리는 충분히 만족한 기세였다.
물론 요한에게는 해리나 개리나 마찬가지였다. 기본적으로 상식인인 그에게 갑자기 악마 운운하는 이들은 그저 비이성적인 사람에 불과했다. 다사다난한 일을 겪으며 요한의 인식에 우주 괴물과 살인마가 추가되기야 했다. 그러나 악마는 너무나 추상적인 이야기였다. 그는 이런 곳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요한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차라리 두 분이 더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때요? 전 자동차가 고장이 나서 수리 기사를 부르든가, 아니면 하다못해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거든요. 길가에 덩그러니 놔둘 수는 없으니까요. 아침에 다른 차가 다니기 시작하면 통행에 방해도 될 거고.”
언뜻 배려하는 듯한 말투였으나 개리와 해리는 그제야 요한이 자신들을 하나도 믿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지금 자네 차가 중요한 게 아니야. 어차피 자네가 악마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우리는 이 사거리에서 빠져나가지도 못해. 어쩌면 영원히.”
해리가 펄펄 날뛰었다. 취기가 전부 날아간 듯 그의 벌겋게 달아오른 눈은 명확한 의지를 담고 있었는데, 그 이름이 각각 울화와 분통이었다.
“왜요?”
“왜긴 왜야, 어딜 가도 결국 이곳으로 돌아오니까.”
개리가 슬쩍 끼어들었다. 인제 보니 그는 해리보다는 침착했다. 사실 해리가 과도하게 흥분한 탓이 컸다. 요한은 여전히 미덥지 않은 시선으로 사거리를 둘러보았다.
“그런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난다고요?”
인상을 찌푸린 요한이 다소 굳은 어깨를 스트레칭했다. 그로서는 자연스러운 동작에 불과했지만 해리는 괜스레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사거리의 끝없는 어둠에서 자신감을 얻은 듯 중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백번 말로 해 봐야 한 번이라도 직접 경험하는 게 낫겠지. 어디 한번 뛰어 보게나. 결국 이곳으로 돌아올 테니.”
해리의 말을 들은 요한은 때 묻지 않고 깨끗한 눈을 깜빡거렸다. 그는 이해하지 못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가락질했다.
“부탁하는 자세가 좀…. 아니지 않아요? 그렇게 따지면 해리, 당신이 뛰는 게 맞겠죠.”
“뭐?”
“그렇잖아요? 당신의 말이 진실이라고 주장하려면 스스로 노력해야지 왜 나를 시켜요?”
당연하고 뻔뻔한 대꾸에 해리가 입을 붕어처럼 뻐끔거렸다. 그러고는 무언가 결의했는지 이를 억세게 악물었다. 살짝 누런 기가 있는 이가 빠득빠득 갈렸다.
“좋아, 내가 직접 몸으로 증명하지.”
몸을 돌린 중년 남자가 헉헉거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사거리의 네 갈래로 난 길 중 오른쪽으로 달음박질쳤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뛰어가는 해리는 몹시 고단해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요한은 드디어 조용해진 사거리가 마음에 들었다. 그는 차를 요리조리 살폈다. 타이어는 멀쩡했고, 엔진도 흠이 없었다. 대체 무엇이 문제일지 고민하는데 멀리서 힘겹게 숨을 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난 방향으로 머리를 돌리자 왼쪽 길 멀리서부터 해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온몸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으며, 폐활량의 미비함을 나타내듯 굉장한 얼굴이었다. 해리는 용케 구르지 않고 비틀거리며 사거리의 중심까지 걸어왔다.
“봐, 헉, 봤지? 흐어, 억. 난 정말, 최선을 다했어. 이곳, 에서 벗어나려고 젖 먹던 힘까지 짜냈다고. 하지만 결국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지. 제발, 오직 자네만이 구세주야.”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된 해리가 애걸하듯 요한에게 다가갔다. 요한은 불쌍한 중년 남자의 손을 꼭 붙잡았다. 해리가 미약한 기대를 품고 요한을 바라보았다. 정확히 어떠한 바람인지 본인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희망이었다.
“응?”
가슬가슬한 촉감이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해리는 손을 돌려 요한이 건네준 것을 확인했다. 그것은 레몬 캔디였다. 노란색 포장지로 감싸인 사탕은 새콤한 냄새를 풍겼다.
“갑자기 사탕은 왜 주는 건가?”
요한은 그린 듯한 미소를 지으며 친절하게 대답했다.
“자, 이제 이걸 들고 다른 길도 확인해 보세요. 앞쪽 길은 어때요? 그쪽으로 갔는데 다른 방향으로 돌아오면 믿어 줄게요.”
“뭐, 뭣? 도대체 왜.”
“그야 당신이 세쌍둥이일 수도 있으니까?”
해리의 질문에 요한이 천연덕스럽게 굴며 등을 떠밀었다. 강제로 밀린 해리는 흐느끼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이 꼴을 전부 보게 된 개리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자넨 정말 지독한 사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