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
‘원하는 거?’
합계 열두 권의 전화번호부 분량의 소박한 바람이 앞니를 건드렸다. 그중 엄선한 소원은 첫째, 복권 당첨이요, 그다음으로는 둘째, 사랑스러운 유리체와 재회하는 것이요, 마지막으로 셋째, 주둥이를 뜯어 버리고 싶은 발언을 했던 과거를 온 우주에서 지워 버리는 것이다.
“…….”
하지만 서준은 안타깝고, 아쉽고, 미련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꿀꺽 삼켰다. 대신 그는 악마의 붉은 눈동자를 곁눈질하며 입을 열었다.
“도우드, 그러니까 너…. 댁 말고 진짜 도우드는 너한테 좋아서 협력하는 거야?”
질문에 악마가 까르륵 웃음을 터뜨리고 도우드는 벌레 씹은 표정을 지었다. 서준이 재깍 고개를 끄덕였다.
“응. 대답 안 해 줘도 괜찮아. 알 만하다.”
악마는 심술궂게 웃으며 도우드의 뺨을 만졌다. 희디흰 볼이 악마의 손길에 따라 부드럽게 눌렸다.
“부귀영화, 온갖 미남과 미녀…. 뭐, 요즘은 이런 소원을 비는 사람이 적지만. 그래, 아무튼 말해 봐. 나는 관대하고 자비로와요. 그렇지, 싫어하는 사람을 지옥 같은 고통에 빠트려 줄 수도 있어.”
“아, 정말? 그럼 보, 아, 아니야. 이건 못 들은 걸로 해 줘.”
척수 반사적으로 대답하는 주둥이를 양손으로 황급히 막았다. 수백 킬로미터 너머 안온한 톰팃톳에 있는 보비는 방금 자신이 지옥에 발을 들일 뻔했던 사실을 모를 것이다. 서준은 자신의 아랫입술을 손으로 가볍게 건드렸다.
“내 소원은 도우드를 풀어 주는 거야. 물리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악마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도우드가 숙였던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새까만 하늘 아래에서도 그녀가 미심쩍은 눈빛으로 서준을 주시하는 게 똑똑히 보였다. 붉은 눈의 악마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상하네요. 욕심이 없는 건 아닌데….”
물론 서준도 금은보화, 다시 말해 당첨 복권 따위를 강렬히 원하기야 했다. 그러나 악마가 주는 당첨 복권은 보나 마나 본래 당첨자의 신상에 불행한 일이 생겨 건너 건너 우연히 서준의 손에 들어올 게 뻔했다. 핏자국이 말라붙은 복권은 도저히 찝찝해서 못 써먹을 게 분명했다. 다른 소원도 그렇다. 악마의 수상쩍은 선물을 눈구멍에 끼우고 다니느니 그는 현대 의학의 정수를 믿기로 결심했다. 악마가 다시금 유혹하듯 속삭였다.
“내가 말한 내용이 너무 추상적이었나요? 더 작고 만족스러운 소원을 빈 사람도 많아요. 고액 연봉을 장담하는 직장에 취업하는 건 어때요? 아니면 유산이 넉넉한 신부나 신랑이 좋을까? 그도 아니면 이 세상에 아직 없는 지식이 담긴 책도 인기가 많아요. 요즘은 전자기기를 선호하는 편이지만.”
서준은 악마가 말하지 않은 행간에서 수많은 사람이 악마의 손아귀에 떨어졌음을 짐작했다. 그는 별빛 하나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은 뜨거운 태양 아래 끝없이 펼쳐진 너른 옥수수밭이 아니다. 피부에 닿는 공기는 건조한 열기 대신 서늘한 한기를 품었다.
“내가 아는 애가 있는데, 무척 작은 어린애였어.”
그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서준이 가늠하듯 무릎 언저리에 손바닥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키는 이만했나? 아무튼 굉장히 어린애였는데 고여서 썩어 들어가는 게 너무 무섭다고 하더군.”
기억 속의 아이와 도우드가 같은 점이라고는 기껏해야 성별과 죽었다는 게 전부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서준이 소원을 사용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이제 아이의 얼굴은 흐릿하다. 하지만 떨리던 손과 끝없는 도망에 지친 작은 등은 아직도 머릿속에서 선명했다. 서준은 제가 편해지자고 그런 고통으로 도우드를 밀어 넣을 수 없었다.
안다는 것은 그렇다. 꼭 직접적인 경험이 필요하지는 않다. 그가 둔한 사람일 뿐이다. 그리고 서준은 이미 피어를 경험했다. 연민을 배웠다.
“도우드를 해방해 줘. 그게 내 소원이야.”
악마의 입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언뜻 보면 야유 같기도 하고, 또 다르게 보면 흡족해 보이는 기묘한 미소였다. 그녀는 도우드를 옥죄던 팔을 풀었다. 자유로워진 도우드만이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래, 그게 네 소원이라면 내기의 승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대가를 내놓을게.”
그리고 서준이 눈을 한 번 깜빡였을 때, 사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그의 앞에는 악마도 도우드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조용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멀리서 흥성거리는 인기척이 들리고 새까만 어둠에 감싸였던 정경에 사물의 윤곽이 드러났다. 뒤를 돌아보자 식당의 불빛이 작게 반짝거렸다.
“아.”
재킷의 주머니에서 유일하게 잡히는 휴대 전화를 꺼내자 화면에서 인공적인 빛이 번졌다. 하얀 턱과 코끝을 푸르게 비추는 화면을 잠시 바라보던 서준은 말없이 트럭에 올라탔다. 언제 멈췄냐는 듯이 시치미를 뚝 떼고 시동이 걸려 덜덜거리는 트럭의 운전석에 앉은 그는 운전대를 꽉 잡았다. 잠은 달아난 지 오래였다.
그는 초췌한 얼굴로 후사경을 곁눈질했다. 손바닥만 한 거울 속에 사거리가 비쳤다. 서준은 다시 정면을 보았다. 이제는 끝이 보이는 지평선을 향해 파란 트럭이 달려 나갔다. 유타피아를 벗어날 때까지 계속해서.
***
노란색 장수풍뎅이가 유타피아에 들어온 것은 공교롭게도 한밤중의 일이었다. 마을 바깥 길목에 있던 요란한 간판과 달리 유타피아는 몹시 한산했다. 하기야 시각이 그럴 만도 했다. 진한 금갈색 눈썹이 찌푸려졌다.
토사로 막힌 도로 때문에 일정이 지체됐다.
아무리 여행에는 다양한 사고가 생긴다지만 토사 붕괴로 도로가 단절되는 일은 톰팃톳에서는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역시 집을 나오면 별별 일이 다 생기는구나.”
덕분에 식사와 수면 시각이 어긋났다. 규칙적인 식생활은 중요하지만 아무래도 집을 나오면 꼬박꼬박 지키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다. 요한의 눈매가 서글프게 젖어 들었다.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고 싶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뛰쳐나왔다. 여행길은 대부분 순조로웠다. 특히 지루한 여로에 보상이라는 듯이 우연히 들른 주유소의 편의점에서 서준의 영상을 얻게 되었을 때는 어찌나 기뻤던가?
그러나 좋은 일이 생기면 나쁜 일도 생기듯, 망가진 도로 때문에 그는 짧은 길을 에둘러 돌아가야 했다. 어차피 서준의 최종 목적지야 요한도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아무런 인과 관계도 없는 척 뜻밖의 만남을 연출하고 싶었다. 함께 다닐 수 있다면 요한은 지금 타고 있는 차를 곧장 폐차장에 보내 버려도 상관없었다. 모호한 웃음이 섞인 숨이 흘러나왔다. 상상만으로도 언짢았던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준이도 내 생각을 해 주면 좋을 텐데.”
아직 사귀지는 않지만 가능성은 제법 크지 않은가? 요한의 시선이 룸 미러를 향했다. 본래 그곳에 달랑거리며 달려 있던 작은 곰 인형이 온데간데없었다. 기운을 얻은 요한은 우울한 기분을 속으로 갈무리했다. 역시 12시를 넘어서까지 잠을 자지 않는 건 정신과 건강 양쪽 모두에 치명적이었다.
자가 분석을 마친 그의 시선을 끄는 간판이 있었다. 보색 관계에 있는 색깔의 전구가 요란하게 번쩍거려 무시하려야 무시할 수도 없도록 이목을 끌었다. 자동차가 미끄러지듯 간판 앞에 섰다.
“유타피아?”
요한은 천천히 간판을 읽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간판만 보아서는 마을의 크기가 영 짐작 가지 않으나 못해도 모텔 정도야 있겠거니 짐작했다.
무엇보다 서준이라면 꼭 거쳤을 듯한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요한이 좋아하는 남자는 유머 포인트가 상당히 독특해 이런 유형에 이끌리고는 했다. 그는 부정하겠지만 서준이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을 때는 상황이 무척 해괴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노란 자동차가 사시나무 사이로 진입했다. 예상한 대로 시간이 많이 늦어서인지 인적이 뜸하다 못해 전혀 없었다. 일반 가게는 물론이고 한밤중까지 영업하는 술집 또한 문을 걸어 잠갔다. 애초에 가로등을 많이 세우지 않았는지 무척 어두웠다. 달조차 구름에 가려 유타피아의 찻길은 노란 자동차가 발하는 전조등 외에는 이렇다 할 광원이 존재하지 않았다.
다소 평안한 마음으로 운전할 때였다. 마을에 들어온 후 죽 직진밖에 없던 길에 돌연 사거리가 등장했다. 어느 쪽으로 움직여야 할까 잠시 머리를 굴리는데 갑자기 차가 우뚝 멈췄다.
“어어?”
요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당황스러워하며 우선 차의 열쇠가 제대로 꽂혔는지 확인한 후 혹여 신시아의 기니피그가 몰래 동승하지 않았는지도 점검했다. 신시아가 키우는 기니피그는 종종 탈출을 감행할 때가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꼭 차가 멈춰 톰팃톳을 벗어나지 못했다. 요한이야 이미 진작에 톰팃톳을 나왔지만 고정 관념이란 이토록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그의 좌석 아래에는 기니피그 대신 크리스티나가 선물한 공구 상자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상하네….”
비상등도 켜지지 않고 자동차가 멈추며 전조등도 뚝 끊겼다. 차라리 견인시켜야 하나 고심하는 찰나였다. 누군가 그의 자동차 창문을 거세게 두드렸다.
“이봐, 나와! 나오라고!”
예의 없는 부름이었다. 요한은 제 자동차의 강화 유리를 믿으며 느긋하게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시끄러운 난동자 덕분에 진중한 명상은 수포로 돌아갔다. 꽝, 꽝 숫제 주먹을 내리치는 난폭한 행인을 바라보며 요한이 중얼거렸다.
“아, 강화 유리는 앞면만이라고 했나?”
평소라면 무시하고 지나갔을 요청이었다. 하지만 차가 길 한가운데서 멈춰 버리니 선택의 폭이 제법 협소해졌다. 요한은 곤란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자동차의 문을 열었다. 그보고 나오라고 소동을 부린 주제에 막상 요한이 거구를 차곡차곡 펴자 난동자가 주춤 뒷걸음질 쳤다.
그곳에는 똑같이 생긴 두 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이마 선이 제법 후퇴했는데도 뒤에 자란 머리카락은 몹시 풍성해 불균형적인 조화를 이루는 머리통이었다. 그들은 똑같이 한심한 얼굴, 똑같이 후줄근한 차림새였다.
“도와줘! 제발 도와줘!”
“도와줘! 제발 도와줘!”
두 사람은 거울의 상처럼 행동했다. 비슷한 수준을 넘어선 동일함. 한 사람이 화를 내면, 다른 사람이 화를 냈다. 한 사람이 울면, 다른 사람이 울었다.
그것은 참으로 기묘한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