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9
내심 사이코메트리가 있으니 돌파구가 있으리라 믿어 왔다. 그러나 만약 이 사거리가 악마의 힘으로 이루어진 공간이라면, 거기에 더해 이런 기이한 일을 저지르는 악마가 실존한다면.
서준의 몸이 벌벌 떨렸다. 식당에서 들었던 어처구니없는 악마의 소문과 그가 직접 겪고 있는 작금의 일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실로 가벼웠다. 어린아이가 장난을 치듯 농지거리 같은 부탁을 하고 소원을 들어준다. 무게감이라고는 털끝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영혼 운운하는 말도 만약 서준이 아니었다면 농담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혼을 확신하는 그에게 악마는 그 자체로 너무나 두려웠다.
바야흐로 21세기였다. 악마라는 존재에 관해 너무나 많은 정보가 도래한 세상이었다. 뇌 주름에서 스며 나온 지식과 기억이 생각을 붙잡아 최악으로 가는 길만을 남겼다. 그는 죽음을 경험했다. 알기에 무서워하고 피하려 애썼다. 반면 악마는 미지의 대상이었다. 서준은 악마를 모른다. 사거리를 감싼 어둠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저 깜깜한 그늘 너머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지 몰라 마음이 불안했다.
유혈이 난무하던 하몽 캠프장에 비교하면 몸이야 편했다. 그곳은 삶과 죽음이 종잇장 같은 아주 얇은 경계선으로 나누어진 장소였다. 인체의 온갖 구성 요소를 두 눈으로 선명히 볼 수 있는 희귀한 체험지였다. 심장에서 갓 펌프질한 피가 분수처럼 뿜어지고 도륙된 살점이 조각조각 흩날렸다. 갓 죽은 시체가 발하는 후끈한 열기가 뺨을 무덥게 데웠다. 그런 끔찍한 곳에서 발바닥이 닳도록 뛰어다닌 끝에 겨우 목숨 하나만 건진 채 빠져나왔다.
그러나 이곳, 사거리는 모든 일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다급했던 그때와는 달랐다. 꼼짝달싹도 못 하게 온몸이 꽁꽁 묶여 늪지에 서서히 빠져 들면 이런 기분일까? 절망이 천천히 다가오고, 기묘한 여유가 목을 옥죄었다. 초록 눈의 도우드와 붉은 눈의 도우드의 몸짓은 일견 느긋함이 감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사거리에서 내장이 빨아 먹히거나 전신이 도륙 날 걱정은 없었다. 그저 끝나지 않을 뿐이다.
소름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뻣뻣한 목을 주무르는 손도 굳어 잘 구부러지지 않았다.
그런 존재를 함부로 읽으려 해도 괜찮을까? 괜히 분노만 일으키는 게 아닐까? 장갑 안쪽의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죽음이라는 근원적인 공포에서 기껏 한 발짝 벗어났건만 이런 일이 생기다니…. 서준은 고집스러운 눈매와 퉁명스러운 입매를 지닌 소녀를 눈에 담았다. 차이점이라고는 눈동자 색밖에 없는 이들 중 악마를 가려내야 했다.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핥자 쇠 비린내가 났다.
“그래. 알았어. 너희의 부탁을 들어줄게.”
“잘 생각했어요.”
“결심이 너무 늦었잖아요.”
불퉁한 대답도 서준의 굳은 결심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그의 얼굴이 자못 비장해졌다. 이제 믿을 것이라고는 악마가 규칙을 지킨다는 영화의 법칙이라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서준은 울며 겨자 먹기로 귓구멍을 탈탈 털었다. 한 귀로 흘려들은 주정뱅이의 말을 한 글자라도 되살려야 했다.
‘뭐라고 했더라? 악마가 사특한 기운을 뿜었다고 했나.’
기대하는 눈빛이 초록 눈의 도우드와 붉은 눈의 도우드를 향했다. 아무라도 상관없으니 누구 한 명이라도 사악한 오라를 풍기길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은 뚱한 눈빛으로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리거나 슬리퍼를 신은 발로 아스팔트 바닥을 긁을 뿐, 그 어떠한 유형의 기운도 발하지 않았다…. 허무한 기대가 사그라질 즈음 기억 하나가 불쑥 귓구멍을 간지럽혔다.
‘악마는 사특한 뱀의 눈으로….’
뱀의 눈. 분명 중년 남자가 그렇게 말했었다. 힘없이 기울었던 고개가 천천히 올라갔다. 뱀의 종류는 다양하나, 으레 산에 사는 뱀은 보호색을 강하게 띠기 마련이다. 마른 낙엽 색의 뱀이나 푸릇한 산천초목에 자연스레 동화되는 뱀은 흔했다. 게다가 뱀은 질투를 상징하기도 했다. 그리고 녹색은 질투의 색이라는 말이 있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치맛단을 매만지는 소녀에게 향했다. 그 끝에는 약간 신경질적이면서 불만에 찬 표정을 지닌 초록 눈의 도우드가 있었다.
바람이 들어가 부푼 볼, 새의 부리처럼 뾰족하게 내민 입술, 찡긋거리는 코….
‘아, 아닌가?’
단단하던 확신이 다시금 물렁물렁해졌다. 초록 눈의 도우드가 짓는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사람 같았다. 무턱대고 정답이랍시고 말하면 무르지도 못할 분위기였다. 애초에 뱀의 눈이 무엇을 뜻하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판이니 신중해야 할 때였다.
서준은 예언이라면 둘째 치고, 본인의 두뇌와 썩 신뢰를 쌓은 편이 아니었다. 특히 동양인이라고 수학에 재능이 있으리란 편견과 싸우느라 얼마나 고된 시간을 보냈던가…. 마침내 결심을 마친 그는 모호한 눈빛을 거두고 소녀들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도우드, 그리고 도우드. 너희가 진짜 너희인 걸 아무리 증명해도 나는 알 길이 없어. 차라리 너희의 눈 색이 왜 다른지 이유를 설명해 봐.”
질문을 마치자 초록 눈의 도우드가 다급하게 말했다.
“눈 색은 아버지 쪽 가계예요. 아버지, 할아버지, 그리고 증조할아버지도 모두 고귀하고 푸르른 청록색 계열의 색깔이셨죠.”
붉은 눈의 도우드가 끼어들며 입을 열었다.
“눈 색은 어머니 쪽 가계예요. 어머니, 할머니, 그리고 증조할머니 모두 홍옥처럼 아름다운 적색 계열의 색깔이셨죠!”
초록 눈의 도우드가 한 말을 단어 몇 개만 바꿔 말한 것과 다름없었다. 당연히 초록 눈의 도우드가 매섭게 눈을 치떴다. 그러나 그녀는 화를 내는 대신 환하게 웃으며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렇지, 나 사진이 있어요. 가족이 다 함께 찍은 사진이에요.”
초록 눈의 도우드가 낡은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서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녀가 제출한 증거에는 중차대한 문제가 두 가지 있었다.
첫째, 놀랍지 않게도 사진이 흑백이라 도우드를 비롯해 그녀의 가족들이 정확하게 어떤 색깔의 눈을 가졌는지 알 길이 없었다.
둘째, 심지어 사진 속의 도우드는 눈을 감고 있었다.
“…….”
서준이 입을 꼭 다물고 초록 눈의 도우드를 바라보자 똑같은 얼굴을 한 붉은 눈의 도우드가 코웃음 쳤다.
“이 멍청이! 사진이라면 나도 있어. 하지만 소용없으니까 내밀지 않았던 거야.”
붉은 눈의 도우드가 말한 그대로였다. 무채색 사진은 증거로서 가치가 부족했다.
사진 속 도우드는 잠들어 있다는 사실만 제외한다면 눈앞의 소녀들과 똑같았다. 검은 리본을 맨 도우드가 우아한 의자에 앉아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녀는 잠들었는지 두 눈을 감고 있었으며 부모로 보이는 두 남녀가 의자 뒤에 서서 정면을 쏘아보았다. 바닥에는 여러 장난감이 즐비했다. 눈이 하나에 멈춰 선 어린아이 주먹만 한 주사위와 놀이판을 비롯해 자그마한 도기 인형이 의자 다리 기둥 뒤에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과연 본인의 주장대로 요즘 아이들다운 취미는 아니었다.
아기자기한 풍경과 달리 도우드의 부모는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웃지 않는 입은 굳어 있었으며 눈 주위가 어두웠다. 서로를 지탱하듯 어깨를 붙잡은 손이 없었다면 혹 부모님의 불화가 심각한 수준이냐고 경망한 질문을 던질 뻔했다. 콘셉트 사진인지 이들의 차림새도 로켓 속의 초상화와 비슷했다. 음울한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 사진을 보자 제 머리통까지 흐물흐물해지는 기분이었다.
‘골치 아프네. 애초에 뱀의 눈이라는 건 뭐야?’
서준으로서는 대단히 안타깝게도 사진 속 소녀가 눈을 번쩍 뜨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현실의 도우드와 달리 사진에 찍힌 도우드는 무척이나 얌전했다.
목뒤를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을 괜스레 잡아당겨도 고뇌는 깊어져만 갔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초록 눈의 도우드와 붉은 눈의 도우드의 행동을 정리했다.
우선 초록 눈의 도우드는 제법 성실하게 자기변호를 하며 애썼다. 하지만 원래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하지 않던가? 그녀의 태도는 누가 먼저 따지기 전에 변명부터 한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그에 더해 자신 있게 내민 사진도 초록 눈의 도우드가 사람이라고 증명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붉은 눈의 도우드가 진짜 도우드인가 하면 그것도 확신하기 어려웠다. 붉은 눈의 도우드는 주로 초록 눈의 도우드를 조롱하거나 한 발짝 늦게 과거사를 털어놓는 편이었다. 먼저 나서기보다는 뒤늦게 꼬투리를 잡았다. 수상쩍게 볼 여지야 많았다.
서준이 머리에 쥐가 나도록 고민하는 중에도 두 도우드는 개와 원숭이처럼 싸워 댔다.
“이 사악한 악마 같으니. 내 얼굴로 그런 표정 하지 마, 기분 나빠!”
“웃기시네, 너야말로 허튼소리 작작 지껄여. 네 밑천 따위 벌써 바닥을 드러냈어.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거야!”
“주제에 명언을 주워섬기다니?”
두피를 긁어 대던 손이 우뚝 멈췄다. 흑요석처럼 반질반질한 눈동자에 고양이처럼 아웅다웅하는 소녀들이 비쳤다. 누가 그 말을 했는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똑같은 목소리였다. 아마 도우드가 한 명이라도 몸을 숨기고 목소리를 냈다면 서준은 그녀가 자문자답한다고 착각했으리라. 그러나 중요한 건 누가 말했는지가 아니라 그 내용이었다.
“주사위?”
고작 한 단어를 내뱉는데도 목구멍이 깔깔했다. 붉은 눈의 도우드가 그를 잠시 힐긋거렸다. 초록 눈의 도우드도 따라 하듯 서준을 보더니 흥미를 잃은 듯 팔짱을 끼고는 제 앞의 똑같은 얼굴을 향해 무어라 고약한 말을 던졌다.
하지만 서준은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머릿속에서 술에 취해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남자의 모습이 흐릿하게 스쳤다. 백 스트레이트 카드를 쥐고 있던 남자. 그가 뭐라고 했던가? 뱀의 눈. 숫자 1밖에 나오지 않는….
서준이 아직도 자신이 쥐고 있던 사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도우드의 발치, 의자 다리 근처에서 구르는 주사위는 둥그런 점이 하나 박혀 있었다. 그 색은 도우드의 모친으로 보이는 여자의 눈동자와 명도가 비슷했다.
악마는 뱀의 눈을 가졌다. 깊게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 비유도 뭣도 아니었다.
서준은 아웅다웅하는 도우드와 도우드를 바라보았다. 정확하게는, 입가에 비웃음을 띤 붉은 눈의 도우드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악마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