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79)화 (79/156)

#078

‘내가 귀신까지는 그래도 어떻게 받아들이겠지만, 악마는 조금….’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멀쩡한 사람 몰골인 아이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쉬이 믿기 어려웠다. 서준이 떨떠름해하는 기색을 흘리자 두 명의 도우드가 격렬하게 항의했다.

“눈이 하나밖에 없어서 그런가? 내가 진짜 도우드예요! 자, 이 로켓을 보라고요. 두 눈으로, 아니, 한쪽 눈으로 똑똑히 보라고요. 할머니의 초상화가 든 내 보물이에요.”

붉은 눈의 도우드가 성큼성큼 다가와 목에 건 목걸이를 내밀었다. 목걸이 펜던트 속에는 노령의 부인이 그려진 작은 초상화가 들어 있었다. 세필로 섬세하게 묘사된 노부인은 구부러진 매부리코에 알이 굵은 진주 목걸이를 차고 어깨를 드러낸 고전적인 드레스를 입었다. 풍성한 소매께가 언뜻 보이고, 새하얀 머리카락을 덮듯 화려한 모자를 썼다. 서준은 초상화를 바라보며 무심코 크리스티나를 떠올렸다. 정확하게는 딱 한 번 얼굴을 본 적 있는 그녀의 할머니 돌리를. 그만큼 평범하지 않은 외양이었다.

‘이분도 배우신가?’

미술관에서나 볼 법한 초상화를 구경하자니 초록 눈의 도우드가 척척 걸어왔다. 독특한 억양이 앞니를 건드리고 부드러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가짜 말에 그만 좀 홀려요. 이 얼빠진 표정을 좀 봐. 홀랑 넘어가서는! 자, 여기 내 손바닥, 손바닥에 흉터가 남은 걸 봐요. 이건 열두 살 때 어머니 재봉틀을 만졌다가 다친 자국이에요. 이때 아버지가 크게 화를 내셨는데, 귀한 재봉틀이 망가질 뻔해서 그랬는지, 내가 다쳐서 그랬는지 영 헷갈리더라고요.”

초록 눈의 도우드가 흰 손바닥을 내밀자 밤바람이 묻어나는 서늘한 체온이 눈앞으로 훅 다가왔다. 과연 그녀의 말대로 검지와 중지 사이 우둘투둘한 흔적이 있었다. 붉은 눈의 도우드가 이를 갈며 초록 눈의 도우드를 밀쳤다.

“누군 없어서 안 보여 준 줄 알아?”

“밀었어? 지금 밀었어!”

같은 얼굴의 소녀들이 서로를 말벌처럼 매서운 시선으로 쏘아보았다. 그러잖아도 썩 얌전하지 못한 눈초리가 불이 붙은 듯 이글거렸고 이를 뿌드득뿌드득 가는 소리가 흉흉했다.

그러나 그들은 다투는 것보다 자신이 진짜라는 걸 증명하는 게 우선이라는 듯 온갖 사소한 버릇부터 중차대한 과거까지 쏟아 내기 시작했다. 특히 붉은 눈의 도우드는 몹시 거창하게 한탄하며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았다.

“오, 정말, 신께 맹세코 이것만은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실은 거름더미에서 구른 뒤 씻지 않고 케이크를 먹었죠. 하지만 그건 사촌 동생이 놀러 와서는 내가 손을 씻기도 전에 다 먹겠다고 으름장을 놓아서 그런 거였어요!”

“너, 이 악마가! 남의 부끄러운 과거를 멋대로 지껄여?”

“굴러도 내가 굴렀지, 네가 굴렀어? 정말 철면피가 따로 없구나!”

붉은 눈의 도우드와 초록 눈의 도우드가 뒤엉켜 데굴데굴 굴렀다. 그들은 몹시 사이좋은 자매 혹은 도플갱어와 만나 공포에 질린 피해자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준은 영 믿음이 가지 않았다. 세상에, 악마라니? 그의 미묘한 거리감에 붉은 눈의 도우드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못 믿겠어요? 전 쌍둥이가 아니라고요.”

초록 눈의 도우드는 깜깜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가슴을 쳤다.

“답답한 사람 같으니! 어디 이 사거리를 나가려고 해 보세요. 안 될 테니까.”

그녀는 한껏 짜증을 부리며 서준에게 삿대질했다. 헐렁한 소맷자락이 펄럭이며 흰 손목이 살며시 드러났다. 푸른 정맥이 솟은 가녀린 손이 사거리의 지평선을 가리켰다. 창백한 손끝이 우뚝 멈춘 곳은 먹칠을 한 듯 그저 새까맸다.

“음, 그거 좋은 생각이야. 한번 도전해 볼게.”

그리고 지나가던 행인에 불과한 서준은 이 제안을 냉큼 받아들였다. 가타부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재깍 행동했다. 뛰듯이 걷자 서느런 밤공기가 피부를 스쳤다.

‘그 망할 옥수수밭에서 발바닥이 벗겨지도록 뛰어다닌 보람은 있군.’

조심조심 다닐 때는 균형 감각이 안 맞느니, 어지럽다느니 온갖 약한 척을 다 했는데 한번 죽을힘을 다해 뜀박질하자 그새 외눈으로 다니는 일에 익숙해졌다. 서준은 혀를 끌끌 차며 팔뚝을 쓰다듬었다.

애차를 버리거나 악마를 주장하는 정신 나간 소녀들을 방치할 작정은 아니었다. 다만 무엇이든 확인하고 싶었다. 제법 걸었다고 판단한 그는 팔짱을 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

길쭉한 다리로 경보했으니 무언가 나와야 하건만 주변은 여전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새까만 눈동자가 불안에 떨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덧 지나온 길도 보이지 않았다. 안개가 낀 듯이 시야가 불분명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완벽할 정도로 뚜렷한 경계가 그어져 있었다. 비정상적으로 빈틈없는 단절이었다.

빠르게 걷던 발이 우뚝 멈추어 섰다. 제자리에 선 서준의 턱에서 땀방울이 떨어졌다. 불길한 기분이 뱀처럼 스멀스멀 아래서부터 올라왔다. 종아리와 오금을 건드리고, 허벅지를 짓누르듯 휘감고 가슴을 선뜩하게 훑는다. 낡은 운동화가 뒷걸음질 쳤다. 마모된 고무가 바닥과 마찰하며 불쾌한 비명을 질렀다.

서준의 시선은 어느새 정면에 못 박혔다. 속에서 들끓는 초조함을 억지로 누른 채 다리를 움직였다. 비척거리던 걸음이 곧 필사적인 질주로 변했다. 밭은 숨이 목 끝까지 차오르고 반고리관이 뒤흔들렸다. 서준은 쓰러지려는 몸을 억지로 바로 세웠다. 기껏 찾은 보람은 멀리 떠났다.

그때 무언가 어른거렸다. 바짝 긴장한 몸에서 천천히 피가 돌았다. 머릿속을 차지한 수십 가지 걱정이 눈 녹듯 사라졌다. 축축하게 젖은 이마와 등이 못마땅하지도 않았다. 입술을 씹듯이 깨문 서준의 입가에 어설픈 미소가 번졌다. 달음박질치는 몸뚱이가 새처럼 가벼웠다.

“어….”

그러나 그가 다시 마주한 것은 자신의 트럭과 그 앞에 무표정하게 서 있는 두 명의 소녀였다. 초록 눈과 붉은 눈이 서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으나 마치 지독한 비난을 받은 듯 거센 충격이 머리통을 강타했다.

이런 건 불가능했다. 서준은 분명 길을 직선으로 쭉 걸어갔다. 잠시 멈추기야 했으나 방향만은 바뀌지 않았다. 결코 도우드와 마주칠 일이 없었다. 아니, 없어야 했다.

핏기가 사라진 얼굴이 마찬가지로 시체처럼 창백한 면면을 응시했다. 체념, 조롱, 비난, 야유, 애걸…. 그들의 낯에서 괴이쩍을 지경으로 수많은 감정이 읽힌다면 제가 미쳐 버린 걸까? 바짝 마른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갔다. 서준은 그대로 소녀와 악마를 지나쳤다.

그는 사거리의 다른 길을 선택했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온 힘을 다해 달렸다. 그러나 서준은 이번에도 똑같은 얼굴과 길 한가운데서 퍼져 버린 멍청한 트럭을 발견했다. 다시, 다시. 총 네 번의 시도가 있었다. 모두 불발이었다.

땀으로 흠뻑 젖은 서준이 사거리의 중앙으로 기듯이 다가왔다. 말린 고사리 같은 몰골로 철퍽 엎어지니 누군지 모를 도우드가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몸을 내던져 가며 확인하느니 내 말을 믿는 게 낫지 않았어요?”

서준은 몸을 비척비척 일으키며 쉰 목소리로 애처롭게 물어보았다.

“혹시 너희가 여덟 쌍둥이일 가능성은 없겠니?”

“네, 뭐. 그럴 수도 있겠죠. 이 낡아 빠진 고물도 미리 공수한, 준비성 좋은 쌍둥이 말이어요.”

초록 눈의 도우드가 빈정거리자 붉은 눈의 도우드도 한마디 거들었다.

“말 같지도 않은 헛소리 늘어놓지 말고 빨리 악마의 부탁이나 들어줘요. 그래야 여기서 벗어나죠.”

서준은 아직 누가 진짜 도우드인지 알지 못했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악마건 진짜 도우드건 성격이 나쁜 건 똑같았다. 그는 한쪽 눈으로 눈물을 질질 흘렸다. 톰팃톳에는 그래도 비현실적인 존재는 우주에서 날아온 괴생명체 X가 전부였다. 그런데 톰팃톳을 벗어나자마자 이게 무슨 꼴인가? 귀신에 이어 악마라니!

하지만 늘 그렇듯, 받아들이기 싫은 현실이 그를 압박해도 종국에는 겸허히 수용했다. 물론 서준의 마음에는 겸손, 공손, 손순 대신 비열, 교만, 시기, 이기 등으로 가득 차 있으나 어쨌든 겉보기는 그랬다. 눈물과 콧물을 재킷 소매로 대강 닦은 서준이 도우드를 하나씩 하나씩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그래…. 너희의 말이 맞는다면 둘 중 한 명은 악마고 도우드인 척 행세한단 말이지? 그리고 도우드는 식당 비드의 자식이고, 할머니의 초상화를 든 로켓을 목에 걸고 다니고, 어머님의 재봉틀을 만지다가 손을 다쳐서 아버지께 혼나고, 거름더미에서 구른 적이 있고…. 자, 잠깐.”

도우드의 이력을 읊던 서준의 눈 밑의 살이 움찔 떨리고 얇은 입술이 약간 벌어졌다. 귀로 들은 걸 낭송하던 그는 중요한 점을 깨달았다.

서준은 유타피아의 주민이 아니었다. 따라서 도우드나 악마가 아무리 진실을 말해 봤자 소용없었다. 유타피아의 거주민도 아닌데 이들이 말한 정보의 사실 여부를 어떻게 확인하란 말인가? 더군다나 악마의 사거리라는 특수한 공간에 갇힌 상황에서?

과도한 스트레스 탓인지 오른쪽 눈이 있던 자리가 욱신거렸다. 서준이 오른쪽 눈두덩이를 손등으로 누르며 입을 열었다.

“어, 얘들아. 이거 내가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틀리면 어떻게 되는 거야?”

초록 눈의 도우드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갸웃 기울였다.

“아마 악마의 장난감이 되지 않을까요?”

붉은 눈의 도우드가 고개를 왼쪽으로 갸웃 기울였다.

“아마 영원히 이곳에서 못 나가지 않을까요?”

황갈색 머리통이 가볍게 통 부딪쳤다. 초록 눈의 도우드와 붉은 눈의 도우드가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렸지만 서준은 지금 그들의 사소한 다툼에 신경 쓸 수가 없었다. 그는 황망해하며 손을 퍼덕거렸다.

“뭐? 왜 내가 그런 꼴을 당해야 해? 난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다고!”

“그렇게 따지면 나도 짜증 난다고요.”

“누군 좋아서 여기 있는 줄 알아요?”

말 한번 잘못했다가 벌새한테 쪼이듯 마구잡이로 물어뜯겼다. 만신창이가 된 서준은 생각보다 심한 대가에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그러잖아도 하얀 피부는 푸른 핏줄이 비칠 정도로 새하얗게 변했다.

“악마가 그렇게 대단해?”

본의는 아니었으나 제법 어투가 시비조로 튀어나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소녀들은 한결 누그러진 태도로 대답했다.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글쎄요. 사람 영혼 정도는 붙잡아서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 수 있지 않을까요? 얘가요.”

“이상한 소리를 하네. 네가 그러려던 거겠지. 이 악마야.”

서준의 얼굴이 이제 퍼렇게 질렸다. 아무튼 악마가 사람의 영혼을 가지고 지지고 볶을 정도의 능력은 있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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