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7
그는 가볍게 중년 남자를 치워 버리고는 빈자리로 묵직한 궁둥이를 옮겼다. 서준은 순간 강렬한 직감을 느꼈다. 육감은 예지보다 더욱 선명하게 불길한 기분을 안겨 주었다.
“이보게, 자네. 규칙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지. 이건 너무나 당연한 거야.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그걸 모르지. 아니, 알면서 무시하는 건가? 뭇 어른을 공경하고 그들의 지혜를 존중하는 것으로 이 사회가 돌아간다는 당연한 상식을 모르냐는 말일세! 하지 말라는 걸 하고, 하라는 걸 무시하지. 청개구리가 따로 없어. 규칙은, 그렇지. 이 콩 말이야. 콩을 먹어야 몸에 좋다. 그러니 콩을 먹으라고 하면 요즘 젊은이들은 이렇게 말하지. 이건 단 콩이에요. 저건 매운 콩이고, 오! 이건 짠 콩이네요. 대체 하는 말들이 죄 요점들에서 벗어나 있어! 콩이 콩인 게 중요하지, 달고 맵고 짠 게 무슨 상관이라고? 나중에 가서는 땅콩도 콩이지 않냐고 하겠지! 상관이 왜 없겠나! 땅콩은 땅콩이지, 콩이 아니야!”
보안관이 제 호주머니에서 땅콩을 한 움큼 꺼내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껍질을 까지 않아 단단한 땅콩이 딱콩 서준의 이마를 때렸다.
그렇다. 서준은 학창 시절 아침 조례 때 얼굴을 비추던 교장의 기운을 느낀 것이었다. 예감은 불행히도 틀리지 않았다. 서준은 소시지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콧구멍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른 채 일장 연설을 들어야 했다.
‘정신이 혼미해진다…. 그 인간, 대체 뭐였지?’
식당을 빠져나오는 서준은 넋이 쑥 빠져 있었다. 그는 어지러운 머리를 비에 젖은 개처럼 탈탈 털면서 트럭에 올랐다.
주정뱅이 보안관은 사람이 끈질긴 데다가 체력도 좋았다. 서준은 술에 취해 했던 말을 끝없이 반복하는 보안관의 장단에 맞추어 콩은 콩이라는 대답을 수십 번은 거듭해야 했다. 그 꼴이 어찌나 동정을 불러일으켰는지 무뚝뚝하던 바텐더가 서비스라며 우유를 내밀었다. 결국 서준은 취객을 상대하며 맥주는커녕 맨정신으로 우유나 연거푸 들이켰다. 물론 우유는 몹시 고소하고 맛있었지만, 끝내 마시지 못한 호박색 맥주가 아쉬웠다.
‘아깝다, 아까워. 잠깐, 그런데 난 운전대 잡아야 하니까 어차피 술 마시면 안 되는 거잖아?’
열쇠를 꽂던 서준의 손이 멈칫 굳었다. 목덜미로 서늘한 땀방울이 흘렀다. 혹시 보안관은 그걸 알고 계속 말을 걸었던 걸까? 서준은 괜스레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현재 그는 트럭을 몰고 유타피아에 딱 하나 있다는 여인숙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보니 오히려 편했다. 배도 채웠겠다 이제 침대에 누워 눈이나 감고 싶었다. 밤이 늦어 큰 소리가 날까 천천히 운전하다 보니 어느덧 사거리가 나왔다. 서준은 창을 열고 슬쩍 내다보았다.
‘악마가 나온다는 게 여긴가.’
솔직히 그는 코웃음밖에 안 나왔다. 세상에 악마라니…. 21세기였다. 21세기! 우주 괴수와 연쇄 살인마, 악령 등을 만났으면서 여전히 편견을 지우지 못한 청년이 피로한 눈을 세게 감았다가 떴다. 길게 늘어진 전조등의 타원형 빛에 새하얀 다리 두 개가 비쳤다.
“으헉!”
목구멍에서 비명이 튀어나오며 운전대를 급하게 옆으로 꺾었다. 끼이익, 트럭 바퀴가 아스팔트 바닥을 긁으며 불쾌한 소음을 만들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라텍스 장갑 안쪽으로 땀이 고였다. 서준은 가슴을 크게 헐떡이며 저도 모르게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부딪히는 감촉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야 했다.
이가 딱, 딱 닿는 통에 혀가 살짝 깨물렸다. 아릿한 통증과 비릿한 맛이 혀에 스며들었다. 덕분에 흐릿하던 의식이 또렷해졌다. 서준은 전조등을 이용해 다시금 앞을 보려고 했다. 그 순간 차의 시동이 뚝 꺼지지만 않았어도 가능했을 일이다.
“어, 뭐야.”
갑작스럽게 멈춘 차 때문에 서준도 당황스러웠다. 분명히 열쇠는 제대로 꽂혀 있는데 난데없이 이 무슨 횡액이란 말인가!
“야, 넌 산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놈이 벌써 이러면 안 되지. 어? 야. 야! 네가 내 전 재산이야. 난 이제 자전거도 없어!”
서준은 기도하는 심정으로 열쇠를 빼고 다시 끼웠으나 트럭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기대했던 가전제품의 고장을 고치는 가장 훌륭한 민간요법도 소용없었다. 발바닥이 얼얼할 정도로 난장을 부리던 서준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렸다. 새까만 눈동자가 불신, 의심, 절망, 공포, 마지막으로 일말의 희망을 품고 운전대를 응시했다. 고요했다.
‘퍼진다고? 이렇게? 길거리에서? 한밤중에?’
마음속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는 욕설이 죄 날아다녔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괴로워하는데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새하얀 손이었다. 언뜻 푸르게 보이는 손바닥이 운전석의 창문을 탁…탁… 두드렸다. 숨이 목구멍을 턱 막았다. 다섯 개의 손가락이 거미 다리처럼 천천히 구부러져 창문을 긁었다. 흐어어, 하며 입에서 채신머리없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곧 손가락이 주먹으로 뭉쳐 빠르게 창문을 때렸다.
“이봐요, 좀 나와 보세요!”
의자에서 주룩 미끄러진 서준을 비웃듯이 맹랑한 목소리였다.
어차피 고장 난 차에 계속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서준은 트럭에서 내렸다. 그가 후리후리한 몸뚱이를 바깥으로 내놓자 그곳에는 똑 닮은 얼굴의 소녀들이 서 있었다. 서준은 차가 퍼지기 전 보았던 흰 다리를 기억해 냈다. 그는 새삼스럽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나이대는 열대여섯 살 정도일까? 잠옷처럼 긴 리넨 원피스를 입은 소녀 둘은 쌍둥이처럼 똑 닮은 꼴이었다.
옷차림만이 아니라 외모 또한 동일했다. 검은 리본을 맨 황갈색 머리카락은 끝이 부드럽게 말렸다. 턱은 갸름하고 눈이 약간 삼백안이었다. 얌전한 차림새에 비해 사나운 인상을 풍기는 건 눈매 탓이 컸다. 이들의 유일한 차이점이라면 왼쪽에 선 소녀는 눈동자가 초록색이었고, 오른쪽에 선 소녀는 눈동자의 색이 붉은빛이 감도는 짙은 갈색이었다. 어쩌면 붉은색일지도 모르나 워낙 주변이 어두워 확언하기 힘들었다.
야밤에 잠옷 바람의 소녀들과 마주친 서준은 몹시 거북했다. 일단 나오라고 하니 나왔지만 피차 얼굴을 보고 있어 봐야 난감할 따름이었다. 심지어 쌍둥이로 추정되는 소녀들은 사이가 나쁜지 서로서로 바라보는 시선이 대단히 고약했다. 그때 초록색 눈의 소녀가 콧김을 뿜으며 서준을 돌아보았다.
“부탁이 있어요!”
붉은색 눈의 소녀도 지지 않고 맹렬한 속도로 고개를 돌렸다.
“이 사거리에서, 우리 중 살아 있는 사람을 말해 주세요!”
서준은 멍청한 얼굴로 대꾸했다.
“뭐?”
그가 제대로 된 말을 다시 만들어 내기도 전에 소녀들이 다시금 언성을 높였다.
“이 가짜! 나를 따라 하다니, 기분 나빠 죽겠어!”
“흥, 누가 할 소리를? 너야말로 산 사람처럼 굴지 마! 기분 나빠 죽겠어!”
투닥거리고, 멱살을 잡고, 머리끄덩이를 잡아채고, 침을 뱉고…. 서준이 소녀들의 짧은 전투를 파투 냈을 때 그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왜 싸운 당사자보다 제가 더 농락당한 꼴인지 몹시 궁금했으나, 그는 자신의 정신 건강을 위해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깊은 고민에 빠졌다. 어른들의 술주정이 문제인가, 사춘기 아이의 야음을 틈탄 밤 산책이 문제인가? 서준은 배 속 깊이 나온 한숨을 내뱉고는 머리를 긁었다.
“어른 너무 놀리지 말고 너희 집에 돌아가서 잠이나 자라.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내가 너네 바래다주기는 어렵고, 저기 식당에 아직 보안관 있을 거, 어?”
어깨 너머를 손가락질하던 서준이 입을 다물었다. 분명 뒤를 돌아보면 있어야 할 식당이 보이지 않았다. 가게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손님들을 내보내고 불을 껐단 말인가? 당혹스러움이 밀려왔다. 그저 새까만 어둠만이 조용히 가라앉아 있을 뿐, 시끌벅적하고 조명으로 환하던 서부 시대풍 식당은 흔적조차 없었다.
서준은 허둥거리며 재킷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를 꺼냈다. 휴대 전화의 손전등 기능이라도 사용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믿었던 휴대 전화조차 상태가 이상했다. 화면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더니 돌연 뚝 꺼졌다. 트럭의 시동이 끊긴 것처럼 갑작스러웠다.
“이게, 뭔….”
어이가 없어 휴대 전화를 탈탈 터는데 뒤에서 완벽하게 같은 목소리가 이중창처럼 흘러나왔다.
“여기는 악마의 사거리예요.”
“악마의 부탁을 들어주기 전까지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똑같은 얼굴, 똑같은 목소리. 유일하게 다른 점은 눈동자 색뿐인 소녀들이 눈길을 모아 서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서준은 눈물이 날 것 같은 심정으로 생각했다.
‘아니, 세상에 설마 진짜 악마가 있다고?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그가 문화적 충격을 받는 사이 초록색 눈의 소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난 도우드 비드예요. d, o, a, d, e, 도우드! 이 악마가 절 따라 했다지만 없는 이름, 없는 가족, 없는 족보를 만들 수 있겠어요? 그렇지, 식당이라고 했죠? 거기 우리 집이에요.”
“그거 비드라고 읽는구나….”
알파벳만 따로 떼어 읽는 줄 알았더니 아무래도 성이었던 모양이다. 초록 눈의 도우드가 자신만만하게 집안 내력을 까발리자 붉은 눈의 도우드 역시 분기탱천했다.
“하하!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오네. 믿지 마세요. 저거 다 거짓부렁, 은 아니고. 제 사정이에요. 뻔뻔하기는!”
“누가 할 말이야? 뻔뻔한 건 너겠지, 이 악마야.”
“얘 말은 듣지 말아요. 그렇지, 내 취미를 말해 줄게요. 나는,”
“취미는 주사위 던지기와 장례식 놀이고, 특기는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걷는 거예요!”
“내가 말하려고 했는데!”
“그것참, 참신하다고 해야 할지…. 요즘 아이들답지 않다고 해야 할지….”
머리가 지끈거려 서준은 하나뿐인 눈을 감아 버렸다. 그간 사라졌던 두통이 섭섭했냐는 듯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말 그대로 앞날이 깜깜했다.
이들이 고약한 장난꾸러기 쌍둥이가 아니라면 정말 악마가 사람인 척 난장을 피운다는 뜻이었다! 도대체 이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려고 악마까지 실존한단 말인가.
서준은 통탄을 금치 못하면서도 간절한 마음을 담아 초록 눈의 도우드와 붉은 눈의 도우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어느 쪽의 소녀도 이마에 뿔이 솟거나, 엉덩이에 꼬리가 달리거나, 등에 박쥐 날개가 달리지는 않았다. 그들은 여느 평범한 사람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