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4
요한은 제 팔뚝을 적시는 침을 깨끗이 무시하고는 창고 안쪽의 잠금쇠를 풀었다. 캉! 직후 손잡이가 철 특유의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바깥에서 창고의 문손잡이를 내리치던 사장의 당황스러운 숨소리가 들렸다. 그는 자신의 예상보다 더 쉽게 열린 문에 당혹해했다.
그러나 요한은 그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먼저 몸을 움직였다. 전력을 다해 달릴 때처럼 부푼 허벅지가 힘 있게 발바닥에 힘을 실었다. 발로 차인 철문은 움푹 패어 들어가며 바로 앞에 있던 사람을 문째로 밀쳐 냈다.
꽝, 귀가 울리며 마침내 창고의 문이 열렸다. 편의점은 어두컴컴하던 창고와 달리 환한 빛으로 가득했다. 극명하게 갈린 명암 탓이었을까? 주유소의 사장은 창고에서 들소처럼 뛰쳐나오는 인영을 향해 손에 든 쇠 지렛대를 휘둘렀다. 끄윽…. 미약한 신음이 흘렀다. 목에서 피가래가 끓는 듯한 소리였다.
뼈가 부러지는 감촉이 쇠 지렛대를 잡은 손바닥을 통해 전기처럼 찌릿하게 올라왔다. 그는 광대뼈가 볼록하도록 환하게 웃었다. 기름기가 묻은 콧구멍을 벌름거리고 이를 가득 드러내며 활짝 미소 지었다. 웃음이 이르게 핀 꽃처럼 만개했다.
그리고 때를 맞추지 못한 꽃은 한순간에 지기 마련이다. 사장은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그가 쥔 쇠 지렛대는 자식의 이마에 꽂혀 있었다. 번의 한쪽 안구가 살짝 튀어나왔다. 번은 입을 살며시 벌렸다.
“아….”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 의미 없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의 입술이 움찔 떨렸다. 마침 사장의 윗입술도 경련해 부자가 퍽 닮은꼴이었다. 번을 방탄조끼처럼 두르고 있던 요한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가정 폭력은 안 좋아요. 번, 불쌍하게도….”
“끅!”
사장은 아들의 안면에 박혀 버린 쇠 지렛대를 함부로 뽑지 못하고 온몸이 뻣뻣하게 굳혔다. 차라리 이마의 정중앙만 깨부수었다면 얼른 손을 뺐을 테지만, 위치가 영 안 좋았다. 이마와 눈썹의 경계 부근을 찍어 내린 쇠 지렛대를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는 번의 안구가 쑥 하니 뽑혀 굴러떨어질 것처럼 보였다.
당연하지만 요한이야 알 바 아니었다. 그는 부드러운 손길로 번의 얼굴에 박힌 쇠 지렛대를 살살 어루만지더니 불쑥 당겼다. 배려 없는 작태에 사장이 놀라 큰소리를 쳤다.
“개수작 부리지 마라!”
“정말요?”
요한이 팔뚝으로 번의 목을 조르자 자동 응답기처럼 신음이 튀어나왔다.
“게으윽….”
“불쌍한 번의 가녀린 목이 부러진다면 어머니의 곁에 함께 놓아 주세요. 그렇게 된다면 번도 지옥에서 기뻐할 거예요.”
동정심을 담아 말하는 요한의 손등에서 핏줄이 불룩 솟았다. 그의 두꺼운 근육에서 나오는 힘은 사장과 비교해도 절대로 밀리지 않았다. 사장은 이를 악물고 살기를 담아 말했다.
“살인을 우습게 보지 마라, 애송아.”
“뭐 그렇게 어렵진 않던데…. 요즘 애들은 경험이 빠르잖아요.”
사장의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번의 고통도 잊고 손에 쥔 쇠 지렛대를 더 강하게 움켜잡았다. 그때 창고에 있던 레이지가 외쳤다.
“파파, 그 자식은 미친놈이에요!”
“레이지, 얼른 거기서 나와라!”
레이지도 부모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이고야 싶었다. 하지만 손에 자꾸 땀이 차고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평소라면 능히 풀었을 결박을 풀기는커녕 자꾸만 손이 미끄러졌다. 그녀는 발목을 푸는 걸 포기하고 요한을 삿대질했다.
“아아, 이게, 더 안 풀려서, 젠장! 파파, 번의 손을 봐요. 그 자식은 정말 번을 죽여 버릴 인간이에요!”
“뭐야?”
온몸에서 열을 내뿜으며 씨근덕거리던 사장의 새까만 눈동자가 아래를 향했다. 그의 눈동자에 축 늘어진 번의 손이 비쳤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손이었던 살덩이…로 보였다. 사장은 순간적으로 번이 장갑을 끼었나 의심했다. 마구잡이로 꺾인 손가락은 이제 마디를 구분할 필요도 없이 부풀었고 살의 색 또한 보라색과 검은색이 섞여 본래의 살구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번!”
사장이 경악하자 쇠 지렛대를 잡은 힘이 풀렸다. 그만큼 끔찍한 몰골이었다. 물론 요한은 이 연쇄 살인자로 추정되는 가족의 남다른 사랑이 어처구니없었다. 저렇게 사소한 상처에도 일희일비할 성격이면 즐거운 홈 비디오나 찍어서 투고할 것이지, 뭐 하러 사람을 잡아 죽이려 해 이 사달을 냈을까?
하지만 이용할 수 있다면 이용하는 게 보람찬 일이 아니겠는가? 그는 레이지와 사장을 번갈아 보며 빙긋 웃었다.
“자, 우리 좀 더 건설적인 대화를 나누어 봐요. 서로에게 이득이 될 수 있도록 그동안 번은 내가 보살필게요.”
그들 모두에게 잠깐의 유예가 주어졌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면 아무도 바란 적이 없는 시간이었다.
요한은 고통에 넋이 나간 번을 붙잡고 사장과 거리를 벌렸다. 심지어 그사이 쇠 지렛대는 자연스레 요한의 손으로 넘어갔다. 멍키 스패너는 요한과 제법 합이 맞는 도구였으나, 그는 역시 길이가 긴 쇠 지렛대가 마음에 들었다. 하기야 그러니 사장도 쇠 지렛대를 휘두른 게 아니겠는가?
파란색 눈동자가 한결 여유롭게 편의점 안을 살폈다. 당장 창고에서 빠져나왔을 때는 사장의 습격으로 찬찬히 둘러보지 못했던 점이 점차 눈에 들어왔다. 대체로는 그가 레이지의 목소리에 이끌려 창고로 건너가기 전과 비슷했다.
하지만 카운터에 죽은 개 한 마리가 덩그러니 놓여 있어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작게 웅덩이가 고인 핏물이 타일 사이로 스며 붉은 선을 그렸다. 푸른 회색빛이 감도는 짧은 털의 개였다. 견종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 도베르만이 아닐까 요한은 짐작했다.
어디까지나 추측으로 그친 것은, 개의 머리통이 박살이 나 도저히 원형을 찾아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뇌와 뼈가 잘게 부서진 끔찍한 몰골에서 사장의 분노가 느껴졌다. 번들거리는 쇠 지렛대를 앞서 어디에 사용했는지 쉬이 상상이 갔다. 어쩐지,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더라니….
개의 사체는 번이 즉사하지 않은 이유도 알려 주었다. 쇠 지렛대로 저리 곤죽을 내 놓았으니 끝이 무뎌질 만했다. 다시금 찬찬히 관찰하니 사장의 작업복에 작은 핏방울이 무수하게 튀어 있었다. 만약 사장을 지금 처음 보았다면 원래 그런 무늬의 옷이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였다.
가볍게 혀를 찼다. 사장은 레이지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요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요한은 별 어려움 없이 그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편의점의 구조와 바깥에 있을 제 자동차를 떠올렸다. 단순히 도주만이라면 썩 어려울 것 없었다. 그의 품에는 이곳에서 새롭게 사귄 친구가 한 명 있었고, 이 친구는 기특하기 짝이 없어 요한을 물심양면 도울 터였다.
그러나 탐욕이 그의 발을 붙잡았다.
폐쇄 회로 TV가 있을 부근을 곁눈질하며 요한의 목구멍이 크게 울렁거렸다. 심한 갈증이 일어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서준이 톰팃톳을 박차고 나간 뒤 서둘러 뒤를 쫓았다. 매일같이 마주치던 새하얀 얼굴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캠프장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에 병원에서 입원했던 서준은 퇴원 후 한숨이 늘었다. 수심 어린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갑자기 발로 허공을 차 댔다. 몇 번은 그러다가 자빠질 뻔한 걸 잡아 주었다. 특히 그러한 이상 증세는 요한을 볼 적마다 잦아졌다.
그리고 돌연 사라졌다. 그야말로 바람과 함께.
물론 요한은 서준의 목적지, 현재 위치, 전화번호, 차량 번호 등을 안다. 다만 그는 서준에게 직접 들을 때까지 가능하면 먼저 아는 체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요한 젠틸의 순정이었다.
물론 순정은 순정이고, 우연히 서준이 담긴 영상을 얻는 일까지 마다할 요한이 아니었다. 그는 레이지의 말끔한 손가락을 빤히 바라보았다. 역시 멀쩡하게 놔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절로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그때 요한의 상념을 방해하듯 들짐승 같은 울음이 편의점 가까이서 들렸다. 고개를 살짝 돌려 보니 편의점 입구 앞에 큼직한 우리가 있었다. 그곳에는 죽은 개와 비슷한 짐승이 시끄럽게 으르렁거렸다. 견종은 마찬가지로 도베르만인 듯 네 다리가 길쭉하고 목과 가슴의 근육이 다부졌으며, 귀 끝이 뾰족했다. 편의점의 간판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개의 번뜩거리는 눈을 비추었다. 확장된 동공은 이유 모를 섬뜩함을 풍겼다.
개는 침을 흘리며 우리의 창살을 까득까득 깨물어 댔다. 우리는 상당히 단순한 물건으로 윗부분을 고정하는 못을 뽑아 버린다면 개는 당장이라도 풀려나 편의점 내의 모든 사람에게 입질할 기세였다.
요한은 눈을 한 번 깜빡이고는 사장의 팔뚝을 느릿하게 훑어보았다. 창고에 들어가기 전에는 멀쩡하던 팔에 흉한 상처가 남아 있었다. 지혈하려 했는지 수건을 대강 둘렀으나 워낙 헐거워 물린 자국이 훤히 드러났다. 억세게 뜯긴 살점과 카운터 위에 쓰레기처럼 널린 개의 사체…. 왜 사장이 저리도 씨근덕거리는지 알 만했다.
요한이 머릿속으로 셈을 하는 동안 안면의 타격과 못 쓰게 되어 버린 손의 고통으로 번의 몸에서 뜨끈하게 열이 올랐다. 그 사실은 다른 사람보다 그의 목을 조르느라 곁에 붙어 있는 요한이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요한은 친절한 마음으로 번의 용태를 그의 가족들에게도 전해 주었다.
“빨리하세요. 번이 아파하는데 해열제라도 먹여야 하지 않겠어요.”
“네 몸뚱이를 비틀어 기름을 짜 버릴 테다!”
사장이 분노해 소리칠 때 겨우 전신의 자유를 되찾은 레이지가 비틀거리며 창고에서 나왔다. 그녀는 피인 척 위장한 액체가 묻은 머리카락을 대강 쓸어 넘기고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파파, 저 녀석이 CCTV 영상만 조금 잘라 주면 군말 없이 떠나겠다고 했어요. 신고도 하지 않고요.”
성인 여성이 건조한 목소리로 다섯 살배기 아이나 할 법한 어투를 사용하는 모습은 몹시 기이했다. 이는 요한에게 결박되어 어린아이처럼 엄마를 부르짖는 번과 상통하는 야릇함이었다.
“너무 순진하구나, 레이지! 그런 걸 믿다니. 말로는 뭐든지 할 수 있어. 산타가 정말 있더냐? 악마나 천사가 있느냔 말이다.”
묵직한 주먹이 카운터를 치자 진열된 커피 잔이 우르르 쏟아졌다. 달각거리며 떨어진 커피의 향기가 넓게 퍼져 나갔다.
“하지만, 파파. 번의 손을 봐요. 사람이 제정신이라면 다른 사람 손을 저런 꼴로 만들어 놓겠어요? 저놈은 사람다운 마음이 없어요. 정말로 번을 죽여 버릴지도 모른다고요.”
요한은 레이지의 말이 심하다고 생각했지만, 괜히 반박하는 대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런 기특한 모습은 오히려 레이지의 심기를 건드렸다. 사장을 설득하던 그녀는 비위가 뒤집혀 구역질이 날 것 같은 표정으로 입술을 비틀었다.
“너,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네가 좋아한다는 놈까지 찾아내서 기름을 짜 버릴 줄 알아. 우리 가족을 건드린다는 게 얼마나 큰 실수였는지 깨닫게 해 주겠어.”
요한은 레이지의 협박에 큰 충격을 받아 눈을 크게 떴다. 레이지는 진심이었다. 아버지를 닮은 그녀의 새까만 눈이 머릿속에 단단히 새겨 넣겠다는 듯 요한의 용모를 샅샅이 뜯어보았다. 필사적인 각오가 서린 시선이었다.
그러나 진심이란 전염되는 법이라, 요한 또한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편의점의 벽에 붙은 포스터를 응시했다.
화재, 그리고 야생 동물을 조심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