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3
“여기 온 목적이 뭐야.”
번의 끔찍한 상처에서 눈을 돌린 레이지가 낮은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손과 발이 묶인 상태에 걸친 것이라곤 얇은 속옷밖에 없었지만 야생 짐승 같은 음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요한은 가볍게 대꾸했다.
“주유소에 뭐 하러 오겠어요? 기름 넣으러 왔지.”
그러나 레이지는 영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그녀의 눈에 비친 요한은 여행하는 연쇄 살인마인 듯했다. 사실 그의 꿍꿍이속이 따로 있기야 했다만 적어도 살인이나 폭행은 아니었다. 더 진실하게 말하자면 요한은 경찰에 신고하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았다.
“살려 줘요, 마마…. 마마, 마마아….”
“닥쳐, 번!”
번의 다리는 아직 무사했지만, 그는 스스로 설 기력조차 없는 처지였다. 레이지는 번의 자유로운 다리를 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원래 그들의 계획은 이렇지 않았다. 먹잇감이 미끼를 풀어 주기 위해 다가오면 그때 기습해 약물을 주사할 작정이었다. 미끼 역은 남매인 번과 레이지가 번갈아 맡았다.
만약 이번 미끼 역할이 번이고 자기 손과 발이 자유로웠다면 레이지는 결코 저리도 무력하게 울부짖기만 하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이미 남매는 역할 분배를 끝낸 후였고 요한의 폭력 또한 끝난 다음이었다. 아무리 후회한들 늦었다. 레이지는 분이 치솟아 적반하장으로 소리쳤다.
“대체 우리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야? 도망치고 싶었다면 나나 저 멍청이가 정신을 잃었을 때 떠났으면 됐잖아!”
쉰 목소리로 지른 윽박에 요한이 곰곰이 턱을 매만졌다. 그도 레이지의 의견이 타당하다고 여겼다. 다만 요한은 이 편의점에 간절히 바라는 게 있었다.
“내가 여기서 이러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긴 해요. CCTV 영상을 좀 얻어 가고 싶은데, 내가 기계랑은 거리가 멀거든.”
“CCTV?”
레이지는 그녀가 창고에 갇힌 척 요한을 속일 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는 CCTV 운운하며 영상을 언급했었다. 문득 레이지는 요한이 사복 경찰일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의심은 빠르게 걷혔다. 엉망으로 고문당한 번의 모습은 도저히 공무 집행의 일환으로 보이지 않았다. 레이지가 머리를 굴리는 사이에도 요한은 가만가만 설명을 이어 나갔다.
“나도 당신들을 신고할 마음까진 없어요. 그렇게 되면 나도 경찰에 붙잡혀서 이야기해야 할 테고. 지금도 너무 느린데 시간을 너무 빼앗기니까….”
“CCTV에 찍힌 걸 전부 달라는 거야?”
레이지가 경계하는 눈초리를 보내 왔다. 하기야 그녀 처지에서는 그들이 저지른 증거물을 모조리 내놓으란 소리로 들렸으리라.
요한은 한결 너그러운 마음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멍키 스패너가 좌우로 까딱거렸고, 그러자 음량 조절 버튼을 누른 듯이 번의 울음소리가 성량을 키워 나갔다.
“그럴 리가요. 여기에 나보다 먼저 온 귀여운 애가 있을 텐데, 그 애가 찍힌 분량만 있으면 충분해요.”
“…뭐?”
요한의 말은 무척 단순한 단어로 이루어졌음에도 순간 레이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의 청력 및 청해력을 오해한 요한은 더 자세하게 풀어 말했다.
“당신네 파파한테도 말했던 건데…. 키는 나보다 살짝 작고, 머리는 검은색에 오른쪽 눈에 안대를 끼고, 아무튼 굉장히 잘생긴 애가 왔었죠?”
“아, 아아. 왔었지. 이상하게 굴던 음침한 남자.”
레이지가 눈을 치뜨고 요한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입가에 비웃음을 걸쳤다. 레이지는 자신의 안면 근육을 어떻게 움직여야 효과적으로 비열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잘 아는 여자였다.
“영상만 필요해? 몸뚱이는 필요 없나 봐?”
“레이지.”
장난감처럼 손바닥 위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던 멍키 스패너가 회전을 멈췄다.
“편의점 TV 화질이 깨끗하던걸요. 그건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이에요.”
요한의 어투는 한결같이 부드러웠다. 욕설이 섞이거나 거칠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손은 여전히 피로 젖어 있었다. 저 TV 운운하는 헛소리의 진의는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런데도 레이지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녀의 흉곽이 크게 부풀었다 가라앉았다. 모욕과 비난을 위해 준비된 날카로운 혓바닥을 애써 숨겼다.
“편의점에서 동전 하나 떨어뜨린 거 줍겠다고 온갖 난리를 부리더니 꺼졌어. 진상이었지. 그놈이 카운터에 늘어놓은 걸 내가 죄 정리해야 했거든. 그런 영상이 가지고 싶다는 거야? 도대체 이유가 뭐야?”
“왜 이렇게 공감 능력이 떨어져요? 난 그냥 내가 좋아하는 애가 찍혔을 영상을 개인 소장 하고 싶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이해하기 어렵나? 하기야 사랑을 안 해 봤으면 모를 수도 있지. 이해해 줄게요.”
요한의 턱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그는 오만과 자만을 겸비하고 타인을 동정했다. 꼴불견이었다.
레이지는 눈을 부릅뜨고 중얼거렸다.
“스, 스토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진상에게 스토커가 붙어 있건 말건 그녀와는 상관없었다. 오히려 먼저 왔던 손님을 빌미로 요한을 떼어 낼 수만 있다면 남는 장사였다. 레이지는 경멸을 마음속으로 갈무리하고 뻣뻣하게 굳은 뺨을 움직였다.
“정말 CCTV를 확인해서 그 분량만 주면 신고도 하지 않고 넘어가겠다, 이 말이겠지? 우리에게 더 해코지도 안 하고?”
“그렇게 다른 사람을 불신하면서 살면 삶이 피곤하지 않아요?”
“딴소리 말고 거래를 받아들일지 말지만 결정해.”
정신머리가 물렁물렁한 번은 협상의 주체가 되지 못했다. 레이지는 질질 짜는 형제의 나약함에 치를 떨었다. 사실 그가 아무리 뛰어난 의지를 갖췄어도 손가락이 전부 부러진 판국이었으니 어찌 되었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레이지와 요한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좋아요. CCTV 영상만 잘라 준다면 군말 없이 여길 떠나죠.”
그는 개의 진짜 주인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은 채 흥정을 마쳤다. 레이지는 요한이 가까워지자 신경이 바짝 조여졌다. 하지만 그는 레이지의 손목을 묶은 케이블 타이를 풀며 기막혀했을 뿐이다.
“어차피 진짜로 갇힌 것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세게 묶었어요?”
“꼼꼼한 리얼리티가 생명이거든.”
게다가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렇게 오래 포박되어 있을 작정이 아니었다. 자세가 계속 고정되어 있던 탓에 어깨가 뻐근하고 손목은 뻣뻣하게 저렸다. 레이지는 몸의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요한에게 등을 내맡겼다.
“말 난 김에 물어보는데, 사람 고르는 기준이 뭐예요? 준이를 잡지 않은 건 아주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보지만.”
그의 어투는 진심이 담겨 있지 않았다. 요한은 그저 손목을 푸는 동안 잡담이나 하자는 식으로 입을 열었다.
레이지는 요한의 무관심한 태도에 내심 충격을 받았다. 그녀를 비롯한 가족 모두 일종의 신념으로 사람을 잡아 왔다. 특히 레이지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몹시 존경해 그들 부부의 가업에 동참하는 것에 큰 자부심을 느꼈다. 동시에 레이지는 이 ‘가업’을 평범한 사람이 두렵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머리로도 이해했다.
문득 레이지는 제 뒤에 있는 것이 무척 징그럽게 여겨졌다. 혹시 뒤를 돌아보면 무언가 이상한 게 있지 않을까…. 불신 속에서 그녀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기름을, 짜려면. 지방이 어느 정도 있어야지. 그건 너무 말랐었어.”
“아, 그래요? 가성비 따지는구나.”
“그렇다고 지방만 많아서도 안 돼. 그러면 좋은 기름이 안 나와. 탈 없고 튼튼한, 풍요로운 신체에서 건강한 기름을 짤 수 있지.”
“흐음.”
요한은 잠시 고민하더니 중얼거렸다.
“역시 더 잘 먹여야 하나.”
순간 레이지는 요한이 동종업자가 되려는 줄 알고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러나 요한은 레이지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건 말건 손을 움직였다.
곧 레이지의 양손이 자유로워졌다. 그녀는 손목에서 올라오는 거북스럽고 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에 눈살을 찌푸렸다. 활력이 넘쳤다면 요한에게 덤벼들까 하는 고민도 잠시 해 보았으나 영 승산이 부족했다. 애초에 한 명이 감당하지 못할 체격으로 가늠했기에 둘이나 달라붙은 터였다.
그녀는 요한의 상처 하나 없이 멀끔한 상체와 번의 피로 새빨간 손을 보자 분기가 치솟았다. 결국 레이지는 참지 못하고 신경질을 부렸다.
“처음부터 파파가 널 잡았으면 지금쯤 네 기름을 쭉 짰을 거야. 운 좋은 줄 알아.”
“안 그랬잖아요? 의미 없는 가정이고, 부질없는 상상이죠. 발은 혼자 풀 수 있지?”
세차게 혀를 찬 레이지가 번을 쏘아보았다. 그는 고통에 정신이 나간 듯 몸을 태아처럼 웅크리고는 연신 어머니를 부르짖었다. 부모님의 대를 이어 앞으로도 손과 발을 맞춰야 하는 파트너가 저 꼴로 널브러져 있으니 앞날이 암담했다. 레이지는 제 눈에 번이 비칠수록 속이 홧홧해져 아예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녀는 풀려난 손으로 제 발목을 더듬었다.
어떻게든 기회를 엿봐서 요한을 죽여 버릴 심산이었다. 정신머리가 정상은 아닌 게 분명했으나 그렇다고 위험 분자를 방생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본인이 신고하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피가 섞인 가족도 아닌 타인을 어떻게 믿을까? 우선 창고에서 나가 아버지와 합류한다면 가망이 있지 않을까?
초조하기 때문인지 손가락이 헛돌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발목이 더욱 죄어 오는 듯했다. 레이지가 초조함을 곱씹는 사이, 요한은 멍키 스패너를 바지 주머니에 넣으려다 실패했다. 그가 미련이 남아 서운한 목소리로 탄식했다.
그때 창고 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레이지의 손이 굳었다. 그녀는 퍼뜩 정면을 바라보았다. 철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그러나 착각이 아니라는 듯,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냐, 레이지. 번!”
레이지와 닮은 성조의 거칠고 쉰 목소리였다. 그녀는 목이 꽉 메었다. 이번에는 연기가 아니었다. 레이지는 머리를 흔들어 고인 눈물을 후드득 털어 냈다. 신중하게 굴어야 할 때였다. 먹잇감은 대단히 교활한 성격에 신체적 조건까지 월등했다. 덜그럭거리며 문손잡이가 헛돌았다. 인제 보니 그녀가 정신을 잃은 사이 문을 안쪽에서 잠근 모양이었다.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비록 한 명은 바닥을 기는 중이었지만, 사람이 셋이나 되니 창고가 꽉 찬 기분이 들었다. 뭔가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하는 찰나였다. 발목을 서둘러 푼 뒤 행동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창고 안에는 레이지와 달리 다리가 자유로운 사람이 요한 외에도 한 명 더 있었다.
“파파! 파파, 살려 줘요!”
“번? 번!”
목이 찢어져라 지른 비명이 창고의 굳게 닫힌 문을 두드렸다. 덕분에 계획을 다듬을 시간은 허무하게 날아갔다. 레이지는 반동을 이용해 몸을 일으켰다. 용맹하게 날린 몸뚱이가 그대로 요한을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그를 덮치기에는 체구와 몸무게의 차이가 컸다. 요한은 간단히 그녀를 피했다. 게다가 아직 발목이 묶여 있던 레이지는 균형을 잡지 못하고 차가운 바닥으로 엎어졌다.
“악!”
“레이지, 번! 대체 무슨 일이냐!”
“마마아, 파파아!”
레이지의 비명과 문을 두드리는 소리, 번이 외치는 고함이 뒤섞여 창고는 그야말로 혼돈이었다. 깡! 쇠와 쇠가 부딪히며 귀를 괴롭히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창고 문의 손잡이가 크게 덜컹거렸다.
요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말 그대로 펄럭거리는 번의 몸뚱이를 휘어잡고 앞으로 껴안았다. 동시에 요한은 손을 뻗어 전구를 깨뜨렸다. 유리 조각이 날리며 그나마 있던 협소한 빛이 사라지자 창고 안에 지독한 어둠이 몰려왔다.
“아아악!”
번이 눈물과 콧물을 쏟으며 신음을 토했다. 외간 남자의 품에 안긴 충격보다는 아무렇게나 잡은 탓에 손가락이 눌린 고통이 원인인 듯했다. 물론 난데없는 포옹도 그의 여린 심성에 지나친 자극으로 작용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