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
이상하리만치 개운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계속 단잠에 빠져 있지 못한 것은 얼굴에 닿는 찬기 탓이었다. 밑바닥에서부터 맴도는 서늘한 기운에 온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기어코 경련하듯 움찔거린 눈꺼풀이 위로 올라갔다. 계속 감고 있던 눈동자는 어렵지 않게 주변 풍경을 받아들였다.
창고 안은 여전히 백열전구 하나의 불빛에 의존했다. 아니, 이제는 창고의 문까지 닫혀 있어 아까보다 더욱 어두웠다. 까만 눈동자가 조용히 움직이며 사방을 확인했다. 기울어진 시야에 그녀와 마찬가지로 쓰러진 번이 들어왔다.
그는 정신을 잃은 듯 눈을 감고 있었지만 결코 평온한 표정은 아니었다. 마치 거울에 비친 상처럼 번의 자세는 레이지와 똑같았다. 발을 길게 늘어뜨리고 양팔은 등 뒤로 넘겼다. 그녀와 다른 점을 굳이 꼽자면 번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괴로움으로 가득했다.
심장이 빠르게 요동쳤다. 두근거리는 소리가 온 창고에 울릴 것만 같은 거센 맥박이었다. 요한은 번의 발치에 등을 돌린 채 앉아 있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걸까? 레이지는 깨어 있을 무렵부터 끊임없이 되풀이한 질문을 다시금 속으로 중얼거렸다.
“깼어요?”
“…….”
언뜻 다정한 목소리에 농어의 배처럼 새하얀 몸이 굳었다. 그녀는 뱀 앞의 생쥐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인기척을 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낮고 우렁우렁한 목소리는 환청이 아니었다. 요한이 백열전구의 둥그런 빛 아래에서 몸을 돌리자 그의 새빨간 손이 드러났다.
“아, 정말 일어났구나. 역시 생각해 봤는데 둘 다 자는 사이에 수색하는 게 편하더라고요. 준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꿩 먹고 알도 먹고 도랑 친 김에 가재도 잡아야 한다고. 이럴 때 쓰는 거였구나.”
요한은 갑자기 밝게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레이지는 거구의 남자가 혼자 깔깔거리는 광경에 소름이 끼쳤다. 그녀는 사지가 묶인 탓에 닭살이 일어난 피부를 쓸지도 못하고 비좁은 목구멍을 열어 휘파람보다 가느다란 목소리를 겨우 흘려보냈다.
“다, 당신은 지금 뭘 착각하는, 중이에요. 게다가 그 생각이 맞다면, 저 직원이 정신을 차리고 여기 주인을 불러오기 전에 저를 풀어 줘야 하잖아요.”
“요즘 편의점은 이런 게 유행인가….”
레이지의 간청에 요한은 다소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매정한 태도에 그녀의 뺨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주룩 흘렀다.
“저기 바깥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내 목숨은 나만의 것이 아니에요. 가족 같은 아이가 괴롭힘을 당하고 있어요. 아아…. 보비, 보비!”
“…….”
창고의 문은 레이지가 정신을 잃기 전과 다르게 닫혀 있었다. 요한은 그녀가 말한 개 짖는 소리를 들어 보기 위해 귀를 기울였지만 그는 듣지 못했다. 요한은 불가능한 일에 오래 품을 들이는 걸 주저하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어디에 노력을 쏟을지 정할 수는 있었다. 그는 멍키 스패너로 바닥을 툭 건드렸다.
“그런 것치고는 초콜릿을 많이 좋아하던데요?”
“네, 네?”
눈물을 흘리던 레이지가 얼굴을 들었다. 발갛게 부어오른 그녀의 눈가가 축축했다.
“손수건요. 레이지를 습격한 범인이 챙겨 갔다면서요.”
“아, 맞아요. 그 사람이 챙겨 갔어요. 그런데 그게 뭐 어쨌다는 거예요?”
요한은 설탕과 당분이 가득한 음식을 싫어한다. 그래서 더욱 어느 브랜드가 무엇을 주력 상품으로 선전하는지 꿰고 있었다. 그는 떠올렸다. 창고에서 나오며 손을 닦던 남자가 들고 있던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손수건을. 본디 하얀색이라 크게 티 나지 않았지만 검붉은 액체가 스며들면서 윤곽을 뚜렷하게 만들었다. 유명한 브랜드의 로고였다. 요한은 그것이 미국 전역에 프랜차이즈 지점을 세운 초콜릿 전문점의 표식이라는 걸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그 손수건, 사은품 아니에요?”
“그건!”
“우리 동네에 신시아라는 친구가 있어요. 자기 애완동물인 기니피그를 무척 아껴서 실수로 이상한 걸 먹기라도 할까 봐 매사 조심하거든요.”
개에게 초콜릿을 먹이면 위험하다는 사실은 제법 흔하게 알려진 이야기이다. 더군다나 레이지의 주장대로 개를 목숨보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모를 리 없었다.
“그건 너무 억지예요! 나도 보비의 발이 닿지 않는 곳에 둔다고요. 그렇게 따지면 애견가들은 모두 초콜릿을 먹지 못한다는 말이잖아요? 그, 그런 건 너무 근거가 희박한 편파적인 말에 불과해요.”
“뭐, 그렇죠.”
요한은 순순히 수긍했다. 그는 선반에 상체를 기대 몸을 일으키는 레이지에게 다가갔다. 조그마한 불빛을 등지자 요한의 얼굴과 목, 그리고 쇄골에 새까만 그늘이 번졌다. 레이지는 그에게 구조를 요청한 것조차 잊고 저도 모르게 뒤로 몸을 뺐다. 그러나 그녀의 뒤로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그렇게 다가온 손은 불가항력적인 존재였다. 요한은 레이지의 두피를 부드러운 손길로 쓸었다. 젖어 미끌거리는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그래도 말이에요. 레이지, 난 당신이 거짓말쟁이인 걸 알아요. 왜냐하면 당신 두피는 상처 하나 없이 아주 깨끗하거든요. 아니면 혹시 레이지는 혈관을 통과해서 피를 뿌리는 재주라도 있어요? 만약 그런 능력이 있다면 병원에 가 보는 걸 추천할게요. 아니면 정부의 연구 기관이나. 모르긴 몰라도 초능력자를 환영할 거예요.”
요한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에서 꺼낸 손가락을 보며 코웃음 쳤다.
“그런데 이건 피가 아니잖아.”
그는 비밀을 알려 주듯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레이지가 홱 머리를 돌렸다. 두 사람의 얼굴은 모두 어두웠다. 요한은 창고의 유일한 광원에서 등졌기 때문이라면, 레이지는 요한의 몸에 가려진 탓이었다. 그녀의 하얀 얼굴과 색이 짙은 적발은 어둠 속에서 새까맣게 변했다.
레이지는 자신을 변호하려 하지 않았다. 거칠었던 그녀의 호흡은 점차 안정되었고 입술이 굳게 닫혔다. 요한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희번덕대는 시선이 그를 향했다. 쏘아본다는 표현은 미적지근했다. 레이지는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살기 어린 눈빛으로 요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물론 요한이야 그녀가 눈에서 빔을 쏘는 것도 아니니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았다. 그는 엉덩이를 가볍게 털고는 머리를 옆으로 기울였다.
“바깥에 사장이 총이라도 들고 있을까 봐 무서운데.”
“어떻게 알았지?”
요한과 레이지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불협화음처럼 어울리지 못했다. 레이지는 이를 악물고 다시 말했다.
“어떻게 알았냐고 묻잖아.”
“뭘? 당신의 거짓말?”
“그래….”
레이지는 약한 체하던 걸 그만두고 순순히 긍정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알고 싶었다. 실패의 원인을 알아야 다음번에 성공할 가능성이 올라가지 않겠는가? 요한은 레이지와 번을 가늠하듯이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탄식을 흘리더니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 또 실수했네.”
이해 못 할 말에 레이지가 그를 흘겨보자 요한이 손을 내저었다.
“당신한테 하는 말이 아니에요. 그리고 이유는…. 왜냐고 물어도 이유가 너무 많은데.”
“많다고? 고작 초콜릿이?”
“그건 계기였고. 예를 들면, 그렇지. 처음 번이 창고에 들어왔을 때 그를 의심하지 않았잖아요. 당신은 혼자 주유하고 아무도 없는 편의점에 들어와 있을 때 덮쳤다면서요? 만약 레이지가 정말 습격을 당한 사람이라면 번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겠죠.”
“목소리로 구분했다면?”
“벌써 잊었어요? 도와 달라고 말한 건 당신이 먼저였어. 둘 다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는데 나처럼 순진한 사람은 겁먹죠.”
레이지는 기가 막힌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그녀는 살기등등한 시선으로 요한을 노려보았다.
“파파가 나는 성격이 급하다고 했지. 저 멍청이는 너무 느리고 말이야.”
표독스러운 눈빛에도 요한은 태평했다. 그는 창고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그래요? 사장이 보스가 아니라 아버진가 보네. 가족끼리 사이좋아요?”
“파파가 널 쏴 죽일 거야!”
레이지가 이를 갈며 악을 썼다. 그녀의 저주에 요한이 팔뚝을 쓰다듬으며 어깨를 떨었다.
“아, 진짜요? 너무 무섭다….”
요한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고는 뒤를 돌아 쓰러진 번의 뺨을 철썩 내리쳤다. 살갗 터지는 소리가 작은 창고 안에서 요란하게 울렸다. 하지만 효과는 훌륭했다. 번은 고통에 머리를 흔들며 눈을 떴다. 그의 눈꺼풀은 여전히 반쯤 올라가 흐리멍덩했다. 아직 제정신까지는 아닌 모양이었다. 요한은 그에게 다가가 물어보았다.
“저 말 진짜예요?”
“뭐, 뭐가. 뭐가, 요.”
그는 레이지가 쓰러지기 전보다 한층 더 얼빠지게 굴었다. 고작 얼굴을 얻어맞아 저렇다면 번은 천하의 얼간이가 따로 없었다.
“이 편의점…. 그러니까 주유소에 총이 있냐고요.”
얼간이는 입을 꾹 다물고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장 난 인형 같은 꼴이었다. 짙푸른 눈동자가 잠시 그를 빤히 바라보더니 멍키 스패너를 고쳐 잡았다.
“내가 좋아하는 애한테 배운 건데 사람은 도구를 쓸 줄 알아야 여러모로 유용하더라고요. 열려라, 진실의 입!”
요한은 얍, 하는 장난기 어린 기합을 지르며 공구를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멍키 스패너를 본 번이 경기를 일으키며 울부짖었다.
“흐으윽, 흐아, 으아아! 마마, 마마아…. 아니야, 아니야! 우리 가족은 절대 총을 쓰지 않, 아, 아, 아, 아, 마마! 마마!”
“절대라니, 요즘 같은 험난한 세상에 신뢰하기 어려운데…. 번, 뭔가 믿음이 가는 든든한 말을 해 줘요.”
명백히 이상 반응을 보이는 번을 두고 요한은 멍키 스패너로 바닥을 긁었다. 그러자 번이 숨을 헐떡이며 눈과 코, 입에서 온갖 액체를 줄줄 흘리며 소리쳤다.
“바, 바깥의 해골이 우리 마마야! 마마는, 마마는 주유소에 온 강도한테 초, 총으로 살해당했어! 그러니까 우리 가족은 절대로 총을 쓰지 않겠, 않겠다고 맹세했어! 정말이야!”
“번, 너 이 멍청한 새끼!”
레이지가 온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고 번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고함에도 번은 어깨를 들썩이며 혼자 흐느낄 뿐이었다.
“역시 교차 검증이란 중요하구나. 학교에서 배운 건 다 쓸모가 있어. 안 그래요?”
홀로 뿌듯해하는 얼굴에 레이지의 머리통에서 뜨거운 김이 솟았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익은 토마토처럼 터져 버릴 듯했다. 번이 몸을 웅크리기 직전까지는 본인도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등 뒤로 숨겼던 손가락이 드러나며 그런 마음은 깨끗하게 사라졌다. 레이지는 오로지 경악에 찬 시선으로 번을 바라보았다. 정확하게는 그의 마구잡이로 꺾인 손가락을.
“너, 너! 그게 뭐야. 그게 뭐야, 번!”
번의 손가락은 다양한 각도로 틀어져 곧게 자라나지 못한 나뭇가지처럼 보였다. 살가죽이 터지고 관절마다 피가 흘렀으며, 퉁퉁 부어 꽉 졸라맨 소시지 같기도 했다. 곧 그녀는 원인을 알아차렸다. 원흉은 다소 수줍어하며 알려 주었다.
“손하고 발을 묶어 둘까 했는데, 아무래도 마땅한 게 안 보이더라고.”
레이지는 요한의 평온한 낯짝을 믿을 수 없었다. 심장이 터질 듯 빠르게 뛰었다. 그녀는 보라색으로 변색된 번의 손가락을 응시하며 밭은 숨을 내뱉었다.
“대체 무슨 짓을….”
물론 요한의 입장에서는 더욱 황당했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아니, 나야말로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묻고 싶었을 정도였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