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69)화 (69/156)

#068

에이프릴의 정체를 피어에게 전해 들으며 그와 로렌 부부가 속삭인 살인 허수아비의 설명이 어긋났던 이유를 알아차렸다. 살인 허수아비란 에이프릴이 만들어 내고자 하는 새로운 자신이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살인 허수아비가 얼마나 그럴싸한 내력을 지녔는지 퍼뜨리는 것이었다. 반면 트레이시와 베일리는 가공의 살인 허수아비가 아니라 그의 진짜 정체인 에이프릴에게 살해된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 살해자의 정보가 뒤섞여 말의 요점이 어긋났다.

서준은 에이프릴이 살인 허수아비 괴담을 만들어 내는 것 외에는 무엇을 목표로 삼았는지 알지 못한다. 살인 허수아비의 허명이 퍼진다면 옥수수밭을 벗어나 행동반경이 늘어나지 않을까, 하는 것도 추측에 불과했다. 무뚝뚝한 목소리가 서준의 생각을 가로막았다.

“그런 게 무슨 상관이야? 개죽음당하기 싫으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일일 뿐이야. 아니면 설마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

에이프릴의 단조로운 어투는 종전과 달리 경쾌함이 묻어나지 않았다. 서준은 펄떡거리는 허파를 바라보았다. 만약 피어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에이프릴의 제안을 얼씨구나 좋아라 하며 받아들였을 인간이었다. 본인도 잘 알았다. 아무리 의인이 되려고 노력한들 뼛속 깊이 박힌 버릇이 쉬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제가 살기 위해 지인을 괴물과 살인마의 아가리에 밀어 넣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이미 지나간 과거였다. 그 말인즉슨 절대로 바꾸지 못한다는 뜻이다. 의식하지 않는 한 그는 자연스럽게 이기적인 선택을 할 것이고 그것을 편하게 느낄 터였다.

하지만 그게 어쨌단 말인가? 서준은 그보다 더한 저항감을 맛보았을 크리스티나의 손을 떠올렸다. 마냥 어여쁘기만 한 그녀의 얼굴과 달리 손에는 자잘한 흉이 가득했다. 대부분 공구를 만지다 다친 상처였다. 그리고 그가 톰팃톳을 떠나기 전까지 사라지지 않은 넓은 자국이 하나 있었다. 바로 괴생명체 X를 죽이며 생긴 2도 화상이었다. 병원에서 조치를 받은 후로도 크리스티나의 손바닥 색은 옅은 갈색이었다.

뻣뻣한 손바닥이 서준의 등을 미는 듯했다. 단 한 발자국이면 충분했다. 서준은 에이프릴의 만용 아래에 섰다.

“아니, 난 널 못 이겨.”

뒤돌아보지 않아도 긴장했을 피어가 훤했다. 갈퀴의 끝에서 검은 피가 뚝 떨어졌다. 흙에 스며든 핏방울은 불길한 흔적을 남겼다. 바로 옆에서 피어오르는 지독한 시취가 서준의 콧구멍으로 들어갔다. 그의 다리가 볼품없이 떨렸다.

에이프릴이 가소롭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높이 치켜세운 갈퀴가 햇살을 받아 흉흉한 빛을 번쩍거렸다. 아무리 서준이 키가 커도 이번에는 갈퀴를 잡아당길 만한 것이 없었다. 에이프릴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걸렸다.

“목숨 구걸을 할 거면 기회를 줄 때 잡았어야지.”

“그런데 내가, 우리가 널 꼭 이겨야 하나?”

반문과 동시에 서준이 팔짱을 풀었다. 그의 품에서 길디긴 내장 밧줄이 튀어나왔다. 길쭉한 팔이 카우보이처럼 밧줄을 던졌다. 끝부분을 고리처럼 묶은 내장이 살점과 피를 흩뿌리며 날아갔다. 에이프릴의 목에 휘감긴 고리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와 피어가 에이프릴의 앞에 털레털레 나타난 건 그래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서준이 에이프릴을 잡아당겼다.

“으아아아!”

기합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가 목젖을 치면서 바깥으로 터져 나왔다. 숨길 장소가 마땅찮아 내내 재킷 속에 들어 있던 내장 밧줄은 훌륭하게 본분을 다했다. 이미 뜯겨나간 기도氣道를 조르는 행위가 과연 얼마나 의미 있을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에이프릴을 넘어뜨리는 데에 모자람은 없었다.

“아!”

앞으로 쏠리며 쓰러지는 거체와 달리 부숭부숭한 머리카락 위에 얹혀 있던 밀짚모자가 허공 높이 날았다. 새파란 하늘 위로 헐거워진 밀짚이 부유했다. 일순 태양을 가린 그것이 역광을 받아 어둡게 그늘졌다. 밀짚모자의 그림자가 에이프릴의 머리 위를 스쳤다. 줄곧 가려져 있던 얼굴의 윗부분이 부옇게 이는 흙먼지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허수아비를 무너뜨렸다고 기뻐할 틈은 없었다. 서준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고 허겁지겁 달려 나가 긴 다리로 허수아비의 갈퀴를 발로 찼다. 갈퀴의 철사 부분이 거칠게 쓸리면서 꽤 시원스러운 소리를 냈다.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팽그르르 돈 장대가 트레이시와 베일리였던 살덩이에 가 쿡 박혔다.

어디선가 앓는 소리가 들렸지만 서준은 무시한 채 갈퀴를 잡았던 손의 목장갑을 벗겨 냈다. 거칠게 주저앉은 탓에 무릎이 다 시큰거렸다. 하지만 곧 그런 사소한 통증 따위는 아뜩한 감각과 함께 날아갔다. 새까만 눈동자가 지저분한 장갑 안쪽에 감쪽같이 숨겨졌던 새하얀 조각들을 응시했다.

목장갑이 벗겨지자 드러난 것은 자그마한 손뼈였다.

“아, 내 손!”

피어가 짧게 비명을 질렀다. 아이의 목소리에는 다양한 감정이 실려 있어 무어라 단정 짓기 어려웠다. 서준의 눈가가 살풋 일그러졌다.

창자를 통해 보게 된 로렌 부부 참살의 현장은 이러했다.

피어가 옥수수 줄기 사이로 작은 몸을 숨겨 사라졌을 때도 트레이시와 베일리는 정신없이 옥수수를 뜯어 먹었다. 이미 그 당시부터 제정신이 아니었으리라. 그들의 모습은 마치 지옥의 아귀와도 같았다.

이윽고 살인 허수아비는 느릿하게 나타났다. 거추장스러운 다리를 달고 비척거리며 등장한 허수아비는 거대한 갈퀴로 옷을 찢고 뱃가죽을 갈랐다. 곡식을 긁어모으는 대신 장기를 모두 뜯어냈다.

심장과 폐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을 때였을까. 철사에 덜걱 베일리의 척추뼈가 걸렸다. 제법 단단히 얽힌 탓에 장대에 목장갑을 묶어 놓은 노끈이 풀렸다. 그리고 훌렁 벗겨진 목장갑의 안쪽은 텅 비어 있었다. 장갑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서준은 한쪽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가 살인 허수아비에게 습격받았을 당시 그는 알아차렸다. 단 한 순간에 불과했으나 새까만 눈동자에는 목장갑이 뼈대의 모양대로 두드러지는 것이 선명했다.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라는 말이 있지. 에이프릴, 넌 정말 그 말을 그대로 실천했어.”

에이프릴은 훔쳐 낸 손뼈를 제 손으로 위장했다. 이는 에이프릴이 지껄인 살인 허수아비의 과거와 제법 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서준은 섬뜩하게 자신을 쏘아보는 시선을 무시하고는 중얼거렸다.

“난 너희가 들려준 이야기가 참과 거짓을 섞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꾸며 낸 부분이 적었구나.”

암시는 곳곳에 있었다. 도둑질해 잘린 손과 내 손을 대신할 자를 구하라는 사형수의 유언, 그리고 텅 비어 있던 허수아비의 오른손. 에이프릴 나름대로 덮어 놓았으나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진실이 그의 언행에 달라붙어 종적을 남겼다.

서준은 이를 악물고 작은 손뼈를 품에 갈무리했다. 용건은 끝났다. 이제 떠날 때였다.

“아저씨!”

“그래, 피어. 당장 여기서 나가자!”

벌떡 일어난 서준이 피어를 달랑 집어 들었다. 넉넉한 재킷 속에 피어가 쏙 들어갔다. 애당초 에이프릴을 완전히 죽이겠다는 작전 따위는 짠 적도 없었다.

‘귀신 죽이는 방법도 몰라, 나는.’

서준과 피어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옥수수밭에서 탈출하는 것이었다. 이는 허수아비를 물리적으로 쓰러뜨려도 바뀌지 않았다.

가슴팍이 뜨거웠다. 피어의 몸에서는 여전히 한기가 피어오르니 그의 체온 때문이리라. 그러나 서준은 왜인지 모르게 피어가 살아 있는 아이처럼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처절한 애걸이 서준의 발목을 붙잡았다.

“가지 마, 피어! 나를 두고 혼자 떠나지 마!”

쓰러진 충격으로 다리가 흩어진 에이프릴이 홀로 일어나지도 못한 채 울부짖었다. 그가 입을 열 때마다 목구멍에서 피가 한 움큼씩 쏟아졌다.

“피어, 너와 나! 우리 둘만이 서로 이해할 수 있어. 우린 모든 게 같잖아!”

피눈물을 흘리는 에이프릴을 서준의 어깨 너머로 보던 피어가 불쑥 말했다.

“에이프릴, 너. 이미 약해져 있었구나. 엄마나 베일리 아저씨 이후로는 네 먹이가 될 영혼도 육신도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내가 무서워하며 도망치지 않아도 됐을 정도로….”

피어의 대꾸에서 서준은 홀연히 깨달았다. 그는 뒤돌아 비참한 몰골의 에이프릴을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기를 쓰고 서준을 겁주고 윽박질러 내보내려던 것이다. 마지막 만찬을 즐기는 게 아니라 낚시찌를 드리우기 위해서.

‘뭐 이런 교활한 놈이 다 있어….’

목덜미로 식은땀이 흘렀다. 귀신 주제에 미래를 준비하는 저 철두철미함이라니? 음험한 계략에 서준은 도저히 한마디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피어를 추어올리며 대거리했다.

“야, 이 새끼야. 도대체 너랑 피어가 뭐가 똑같냐? 죽었다고 양심 없이 구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피어는 엄밀히 따지면 아사는 아사지만 너 때문에 죽었어. 네가 이곳에서 못 나가게 막아서 도망치다가 죽은 거라고. 너처럼 다 큰 어른이 부모 탓이나 하면서 뒤진 게 아니라.”

“뭐?”

에이프릴이 충격받은 얼굴로 대답했다. 서준은 사지가 뜯겨 장대에 엉긴 와중에 온전한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흉측해진 외양 중에서 에이프릴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한 축에 들었다. 하지만 외려 잘못되지 않은 부분이 에이프릴의 추악한 면모를 낱낱이 까발렸다. 눈가에 살며시 난 주름과 그늘진 눈매.

그는 도저히 아이라 부를 수 없는, 성숙한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트레이시와 베일리가 이야기한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는 너였었겠지, 에이프릴. 1년이 지나도, 3년이 지나도, 5년이 지나도, 7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아이. 그건 네 이야기였다.”

지나간 시간은 중첩되는 게 아니라 따로 더해야 했다. 아마 에이프릴의 부모는 아홉 살짜리 아이가 바뀌기를 오래도록 기다렸을 터이다. 장장 16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도록.

그러나 스물다섯의 청년은 어릴 때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어리게 행동했고, 여전히 잔혹했다. 그래서 그는 벌을 받았다. 당연한 대가였다. 어린 나이를 방패 삼아 벌을 피해 오던 시간은 지났으므로.

“헛소리 마! 나는, 나는 버림받은 불쌍한 아이야. 모두 부모님이 나쁜 거야, 내가 아니라! 부모라면 아이를 지켜야 해. 언제까지나! 내가 살인 허수아비가 된 건 모두 부모님 탓이라고!”

청년의 낯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성대조차 없을 에이프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이것이 마지막 발악이라는 건 영감靈感이라는 특별한 기질이 없는 서준이라도 알 수 있었다. 그를 두렵게 한 모든 것이 허장성세였다는 듯 무너졌다. 서준은 조용히 읊조리듯 말했다.

“에이프릴, 넌 살인 허수아비도 뭣도 아니야. 난 살인 허수아비라는 이야기 이제까지 들은 적도 없어. 그러니까, 너희는 그냥 그런 존재에 불과해. 옥수수밭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죽은 사람. 초자연적인 힘을 발휘하는 악귀가 아니라 규칙을 지키지 못하고 죽었을 뿐인 그런 사람. 그러니까…. 너는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야.”

낮은 목소리가 선고를 내렸다. 기실 서준의 선언은 아무런 의미도 위력도 가지지 못했다. 그저 그의 의견이었다. 그러나 에이프릴은 자신의 마지막 기회가 그렇게 사라졌다는 걸 누구보다 절절히 이해했다. 부정하고 싶어도 무너진 몸뚱이와 텅 비어 버린 곁이 그를 억지로 납득시켰다. 그런데도 에이프릴은 도저히 인정하지 못해 악을 썼다.

“날 여기에 두고 가도 소용없어! 단 한 사람이라도, 너희가 아닌 단 한 명이라도 이곳에 들어온다면…. 내 목소리를 듣는다면 나는 부활할 거야! 그때가 되면 너를 찾아가 죽이겠어. 살점 한 조각 남기지 않고 찢어 버리겠어!”

등 뒤로 피비린내 나는 저주가 울려 퍼졌다. 고통에 찬 울음은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를 찾는 칭얼거림처럼 들리기도 했고, 필사적인 애원 같기도 했다. 그러나 서준은 더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피어의 머리를 껴안고 옥수수밭을 헤쳐 나갔다.

안고 있는 작은 몸이 점점 가벼워진다는 걸 알아차린 것은 도로가 언뜻 보일 즈음이었다. 조바심에 헐레벌떡 뛰쳐나가려는 발바닥을 간신히 땅에 붙든 서준은 부족한 붙임성을 끌어모아 애써 유쾌하게 굴었다.

“피어, 보여? 네가 알려 주는 대로 걸었더니 금방이야. 곧 여기서 나갈 수 있어.”

“…아저씨.”

피어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귀를 기울여야 들렸다. 그러나 서준과 아이의 거리는 무척 가까웠고 그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왜, 피어?”

“아저씨.”

아이는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작은 입에 달린 자물쇠가 왜 그리 많은지 피어는 계속 머뭇거렸다. 그래도 서준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원래 사람은 곳간이 넉넉하면 인심이 생기기 마련이라 탈출을 코앞에 둔 그의 말씨도 약간 더 다정해졌다.

“괜찮아. 말해 봐.”

“아저씨, 저 사실은요.”

“응.”

“사실은 너무 무서워요. 여기 있고 싶지도 않은데, 나가는 것도 너무 무서워요.”

부드럽게 올라간 입꼬리가 멈칫 굳었다. 무엇이 두려운지 서준은 되묻지 않았다. 그는 구태여 물어보지 않아도 알았다. 평생을 공포로 떨었기에 공감할 수 있었다. 대신 서준은 잘게 떨리는 어깨를 안아 주었다. 이미 살아 있지 않은 존재일지언정 죽음은 무서운 것이었다.

“여기서 나갔는데 계속 귀신이 돼서 이 근처만 돌아다니면 어떡하죠? 아무도 내 말을 들어 주지 않는데 똑같은 말만 중얼중얼 기분 나쁘게 굴면 어쩌죠? 그런 거 엄마도 싫어했는데. 겨우 나를 보는 사람이 생겨도 징그럽게 보는데 그걸 알아차리지도 못하면 어떡해요?”

“피어.”

얼음 알갱이처럼 차가운 눈물이 피어의 뺨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피어는 여느 아이처럼 마음껏 울지도 못하고 섧게 훌쩍거렸다.

“그런데, 그런데 그것도 아니고 여기 나갔는데 아무것도 없으면 어떡해요?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지, 진짜 죽는 것처럼….”

서준은 가만가만한 손길로 동그란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이제 피어의 무게는 곰 인형보다 가벼웠다. 질량 없는 존재도 피하지 못할 근원적인 공포였다. 어설픈 위로는 안 하느니만 못했다. 그래서 서준은 숨죽여 속닥거렸다.

“피어, 이건 정말 엄청나게 비밀인데 아저씨는 옛날에 죽었었어.”

“네?”

콧물을 들이마시던 피어가 발간 눈으로 서준을 보았다. 엉뚱한 소리에 제 귀가 헛소리를 들었나 의심하는 눈치였다. 영화를 좋아하는 골초는 태연하게 장담했다.

“트럭에 치여 죽었었는데 다시 태어났지 뭐야? 사실 국적도 달랐어. 너 대한민국이라고 가 봤니?”

“아, 아뇨.”

“그래. 너도 다시 태어나면 한번 가 봐. 북한 아니고 남한이야. 혹시 경주 갈 거면 나한테 연락하고. 가이드해 줄게.”

“아, 아저씨?”

피어가 혼란스러워했다. 눈물은 쏙 들어간 지 오래였다. 서준은 가붓한 정수리를 쓰다듬으며 힘 있게 단언했다.

“정말이야, 피어. 사람은 죽어도 다시 태어나는 경우가 있어. 그러니까 무서워하지 마. 한숨 자는 거야. 넌 너무 오랫동안 쉬지도 못하고 달렸으니까. 잠깐 푹 잤다가 다시 깨어날 거야.”

“아저씨.”

“응.”

“꼭 그랬으면 좋겠다.”

“응, 물론이지.”

“아저씨.”

“그래, 피어.”

“안녕.”

인사말을 들으며 눈을 한 번 깜빡이자 서준의 가슴께는 텅 비어 있었다.

그는 무표정하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하늘은 푸르렀고 지긋지긋한 옥수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새빨간 낡은 경고판이 서준의 오른편에 있었다.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빛무리나 투명한 모습의 인영은 아무 데도 없었다. 품을 감싸듯 안았던 팔을 풀고 서준은 숨을 내쉬었다. 지친 다리가 옥수수밭과 도로의 경계선 위를 훌쩍 뛰어넘었다.

그가 허겁지겁 뛰어내렸을 때와 똑같았다. 먼지와 땟자국으로 지저분한 봉고차가 앞에 있고, 그 뒤에 서준의 드림 카가 번듯하게 서 있었다. 도로조차 한결같아 바람처럼 쌩하니 지나가는 차도 없었다.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뚱이를 간신히 운전석으로 옮겼다.

그때 주머니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꺼내 들자 휴대 전화의 통화권 이탈 표시는 말끔히 사라지고 대신 문자 발송 실패 따위가 떠 있었다. 순간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 서준은 휴대 전화를 옆좌석으로 내동댕이쳤다. 가슴팍이 크게 헐떡였다.

그가 옥수수밭에 발을 들이고 고작 12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현실보다 더한 짜증이 서준의 얄팍한 심지를 건드렸다. 노곤함을 이기지 못한 서준은 운전대에 뺨을 기대고 건조한 시선으로 창밖을 올려다보았다. 맑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새파란 트럭이 움직였다. 방해되는 봉고차를 슬쩍 피한 트럭은 텅 빈 도로를 죽 나아갔다.

***

인체가 얼기설기 엮인 장대가 굴러갔다. 한참을 구른 끝에 그것은 덩그러니 놓인 무전기와 닿았다. 찢어진 입꼬리가 길쭉하게 올라갔다.

***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노란색 장수풍뎅이 같은 자동차가 씩씩하게 길게 뻗은 도로를 달렸다.

“한 꼬마, 두 꼬마, 세 꼬마 인디언.”

열린 창문 사이로 노래가 흘러나왔다. 낮고 우렁우렁한 목소리는 음정 박자가 죄 틀린 주제에 즐겁게도 불렀다. 세 명이었던 꼬마가 여섯 명으로 불어났을 즈음 오디오에서 지직거리는 소리가 불쑥 튀었다. 새파란 눈동자가 의문스럽게 라디오를 쳐다보았다.

- “살려 주세요! 살인 허수아비가 절 죽이려고 해요! 제발, 제발 옥수수밭에 들어와 주세요! 도와주세요!”

소년의 울부짖음이 처절하게 메아리쳤다. 찢어지는 목소리 다음으로 짐승의 괴성, 날붙이가 살을 터뜨리는 끔찍한 파열음 따위가 따라붙었다. 간절한 애원이 자동차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요한은 손을 뻗어 음량을 최저치로 맞췄다. 시끄러운 소리가 사라지자 그는 마저 흥에 취해 노래를 불렀다. 곧 꼬마가 열 명으로 늘어났다.

자동차는 옥수수밭 근처에서 멈추는 일 없이 계속 달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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