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66)화 (66/156)

#065

설마 에이프릴이 살인 허수아비의 정체이자 사악한 악령이었다니! 서준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로렌 부부에게 쫓길 때 타이밍 좋게 나타나고, 물어보지도 않은 살인 허수아비의 유래와 유언과 사연을 술술 늘어놓고, 도와줄 것처럼 굴더니 냅다 사라지고, 그 덕분에 몰이사냥 당하듯이 달리다가 살인 허수아비를 만났다지만….’

경악이 순식간에 걷혔다. 에이프릴은 대놓고 수상쩍게 굴었다. 찬찬히 생각해 보면 모르는 게 이상한 수준이었다. 서준은 이마에서 흐르는 유독 차가운 비지땀을 무시했다.

‘도망치느라 바빴잖아. 어쩔 수 없어.’

그는 워낙 상황이 숨 가빠 뇌로 가는 산소가 부족했을 뿐이라며 애써 자신의 부족한 상황 파악 능력을 외면했다. 훌륭하게 자기 부정에서 벗어난 서준은 여전히 흙만 바라보는 피어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주눅이 든 아이는 여러모로 대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었다. 게다가 곧 물어보아야 할 질문은 그야말로 심장에서 배려심을 닥닥 긁어모아 마리아나 해구에 처박은 내용이었다.

서준은 가까스로 회피했던 자학이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걸 느끼며 간신히 입을 뗐다. 혀가 무척 썼다.

“그래, 피어. 그러니까 너는 폐 호흡과 아가미 호흡을 병행하던 공주처럼 공기의 정령이 되어 버린 거구나?”

서준은 최선을 다해 피어가 죽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돌려 말했다. 제 나름대로 헛소리를 겸한 예언을 내뱉고 다니던 경력이 있어서인지 혀가 기름칠한 듯 매끄럽게 움직였다.

“무슨 말이에요? 아가미요? 저는 물고기나 정령이 아니에요. 따지자면 시체고, 그곳에서 버섯처럼 돋아난 유령인 셈이죠.”

다만 피어는 직설적인 소녀였다. 피어는 동화보다 수기를 즐겨 읽는 편이었고, 인어 공주의 결말은 왕자와 결혼해 인간 왕국을 지배하게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덕분에 서준의 허옇게 뜬 뺨에 홍조가 떠올랐다. 회심의 비유가 물거품처럼 녹아내린 신체 나이 20대의 얼굴이었다. 그는 어물어물 입을 열었다.

“그, 바로 그게 문제인데 말이지. 내가 무당이 아니라서 그런데 널 도와줄 방법이 현실적으로 없지 않을까? 함께 이곳을 벗어나고픈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자칭 유령과 대화를 나누는 마당에 현실이 다 무엇인가 싶었지만 서준은 확실히 따져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피어를 믿는다손 쳐도 신뢰와 구조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아닌가? 비록 그에게 기묘한 초능력이 생기기야 했다지만 그건 귀신이나 좀비와는 전혀 상관없었다.

버릇처럼 눈썹을 찡그린 피어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아저씨 말대로, 저는 살아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억지를 부리는 건 아니에요. 그냥 이 옥수수밭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죠….”

짙은 색 눈동자에 서린 우울함은 어린아이가 품기에는 너무 무거운 감정이었다. 서준은 공연한 죄책감을 느끼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이를 갈았다.

‘이런 기분은 아동 학대범과 살인 허수아비가 가져야지. 그 자식들은 하나같이 칠푼이처럼 웃고 다니던데.’

서준이 혼자 오만 가지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을 때 피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건 제 유해를 가지고 이 옥수수밭에서 떠나 달라는 거예요.”

“네 유해?”

“본 적 있으시죠? 무전기를 이렇게 껴안고 있던….”

“아.”

서준의 머릿속에 아사한 소녀의 시신이 떠올랐다. 왼쪽 손목이 뜯겨 나간 것 외에는 이렇다 할 상흔이 없던, 외롭고 쓸쓸한 기색이 느껴지는 미라였다.

“저는 제가 죽은 걸 늦게 알아차렸어요. 달리고, 달리다가…. 옥수수밭에서 낮도 밤도 구분하지 못하고 헤매다가 문득 깨달았죠. 저에게는 더는 공기도 잠도, 먹을 것조차 필요 없다는 걸 말이에요.”

피어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시신과는 달리 유령인 소녀의 몸에는 작은 손이 야무지게 붙어 있었다.

“에이프릴은 그 틈을 타 제 유해를 훔쳐 갔어요. 아니, 빼앗았다고 말해야 할까요? 물론 저도 노력을 안 한 건 아니에요. 에이프릴과 엄마, 베일리 아저씨의 눈을 피해서 한 부위씩 야금야금 되찾았죠. 다리, 몸, 머리, 팔, 왼손…. 천천히 하나씩이요. 하지만 에이프릴이 어디에 숨겼는지 제 오른손만은 도무지 찾지 못했어요.”

그 손을 돌려받지 않는 한 옥수수밭을 떠나지 못한다며 피어가 웅얼거렸다. 서준은 아직 죽은 자의 법칙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본디 사자의 유골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중요하게 다뤄진다. 설혹 아니라 해도, 피어의 마음이 자신의 온전한 유해에 붙들려 있다면 옥수수밭에 매인 것이나 다름없을 터였다.

푸르스름한 뺨을 바라보던 서준은 제 죽음을 거리낌 없이 입에 담는 피어에게 의문스러운 점을 물어보았다.

“음, 피어. 너희 부모님은 굉장히 배고파하시던데 너는 그런 허기는 느끼지 않고?”

피어가 사후 손을 빼앗겼다면 소녀는 말 그대로 기력이 떨어져 사망한 것이다. 그렇다면 식탐을 부리는 로렌 부부보다는 오히려 피어가 기아에 고통스러워야 하지 않은가? 서준의 추측에 피어는 얌전히 고개를 흔들었다.

“네. 제가 이곳에서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과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뿐이에요. 그러잖아도 왜 그런지 생각해 본 적 있어요. 확실하지는 않지만요. 제가 말했죠? 저는 살아 있을 때부터 죽은 자들을 봐 왔다고요. 영혼들은 죽었을 당시의 기억을 바탕으로 행동했어요. 예를 들어 가장 흔한 건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이었죠. 그들 대부분은 사고를 당한 곳을 맴돌면서 당시 겪은 고통과 충격을 반복해서 곱씹어요. 그러다가 기력이 다하면 어느 날 사라지죠.”

하지만, 하고 말을 이으며 피어가 서준을 올려다보았다.

“가끔 에이프릴 같은 영혼이 있어요. 온몸이 차가워지는 사악한 마음을 품은 그런 영혼이요. 저는 죽는 순간까지 에이프릴이 두려웠어요. 그러니 저는 배고프지 않고, 졸리지 않아요. 하지만 이곳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계속 에이프릴을 무서워할 테지요. 전 그게 상상만으로도 끔찍해요.”

가냘픈 어깨가 작게 떨렸다. 서준은 말없이 피어의 등에 제 재킷을 걸쳐 주었다. 도대체가 영혼의 메커니즘이란 수수께끼가 아닌 부분이 없어 재킷은 피어의 상반신을 통과하는 일 없이 넉넉하게 감쌌다. 재킷의 소매를 정리하던 서준의 손등에 한기가 어른거렸다. 무더운 날씨에도 소녀의 피부는 마치 얼음덩이 같았다.

이 서늘한 기운은 피어가 이미 죽은 존재라는 걸 알기 때문에 느끼는 착각일까? 어쩌면 낮은 온도는 비인간적인 증거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흉한 몰골의 살인 허수아비나 뱃가죽을 팔랑팔랑 흔들고 다니던 로렌 부부와 달리 피어를 보노라면 가뭄으로 메마른 논밭 같은 서준의 심장에도 안쓰러움이라는 감정이 물씬 피어올랐다. 그는 뒷덜미를 문지르며 혀를 찼다.

‘이래 놓고 사실 이 애가 진짜 숨겨진 파이널 최종 마지막 종결 반전 흑막이면 곤란해지는데….’

멀리 갈 것도 없이 에이프릴만 해도 살인 허수아비라는 무시무시한 정체를 숨기고 서준에게 앙큼을 떨어 대지 않았던가? 아무리 톰팃톳을 벗어난 김에 착하게 굴려고 해도 대상이 연쇄 살인 영혼 따위라면 하지 않느니만 못한 일이었다.

평생을 불신 속에서 살아온 뇌가 속닥거리며 의심의 심지에 불을 붙였다. 그러나 과하게 동정이나 연민을 구하려는 기색 없이 힐끔힐끔 눈치나 살피는 피어의 얼굴은 마치 금·은·동 트리오에게 괴롭힘당하던 어리고 약하던 자신을 연상시켰다.

서준은 꼭 저런 표정을 알았다. 그도 누군가에게 구원받고 싶었다. 예를 들자면 여자 주인공이라든가, 툴박스 부부의 외동딸이라던든가, 크리스티나라든가. 엄밀히 따지자면 서준이 바란 구원의 형태는 인신 공양에 가까웠지만 그는 제 추악한 과거를 한껏 미화했다.

크리스티나를 생각하자 자연스럽게 톰팃톳이 뒤따라 왔다. 하나뿐인 눈꺼풀 안쪽으로 떠오르는 태양을 등지고 환하게 웃는 피투성이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내리쬐는 햇살에 플래시백처럼 머릿속을 차지한 미소의 주인은 금색 실타래 같은 머리카락을 지녔으나 그 길이가 절대 길지 않았다. 서준의 손을 잡은 것은 크리스티나가 아니었다….

‘아니, 생각하지 말자니까.’

서준의 머리통이 빠르게 좌우로 뒤흔들렸다. 목을 뽑아 버릴 기세로 내젓는 기행에 피어의 엉덩이가 슬금슬금 멀어졌다. 어두운색 눈동자에 제가 불러들인 동아줄이 혹여 썩은 게 아닌가 불신이 깃들었다. 서준은 황급히 주둥이를 나불거렸다.

“즉, 우리의 목표는 네 손을 찾아 도망치자는 뜻이구나. 겸사겸사 베일리와 트레이시, 에이프릴이 분장한 살인 허수아비를 무찌르면서 말이야.”

“네! 바로 그거예요.”

‘가능하겠냐.’

재바른 부정은 다행히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놀랍게도 서준 역시 경우를 아는 어른이었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그의 표정근은 어른스럽지 못했다. 활기차게 대답하던 피어의 입꼬리가 시무룩하게 내려갔다. 그러나 곧 피어는 영혼이기에 구현할 수 있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야물게 주먹을 쥐고는 입을 열었다.

“벌써 포기하지 마세요. 아저씨라면 가능할 거예요.”

“피어, 너의 그 무한한 신뢰와 믿음, 요즘 같은 각박한 세상에 정말 고마워. 그런데 대체 내 어딜 보고 그렇게까지 믿어 주는 거니?”

드물게 자기 객관화가 된 질문에 피어가 잠시 고민하더니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냐하면 아저씨는 키가 큰 어른이잖아요. 엄마나 베일리 아저씨, 에이프릴보다 훨씬요.”

“…….”

서준은 피어에게 사람이 싸울 때는 단순히 신장뿐 아니라 근육이나, 하다못해 묵직한 지방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어야 할까 고민했다. 물론 피어는 서준의 어림짐작보다는 영민한 소녀였다. 눈을 깜빡거리던 피어가 설명을 덧붙였다.

“제 생각에는 에이프릴이 손뼈를 허수아비의 몸통에 숨겨 둔 것 같아요. 찾지 않은 곳은 이제 허수아비밖에 없거든요.”

피어가 팔을 뻗었다. 뼈 없는 손이 무언가를 움켜잡듯 주먹을 쥐었다.

“아저씨라면 허수아비의 짚 속을 파헤칠 수 있어요.”

아저씨의 손이라면 닿을 거예요. 피어는 힐긋 서준을 올려다보았다.

“이미 한 번 허수아비를 쓰러뜨렸잖아요.”

아무래도 서준을 제 나름대로 경력직으로 우대했던 모양이었다. 막상 특대를 받은 당사자는 여전히 쨍쨍해 얄밉기까지 한 태양이나 쏘아보며 대꾸했다.

“피어, 그건 내 키의 문제가 아니었어. 따지자면 너희 부모님 내장이 알맞게 걸려 있어서 운이 좋았던 셈이지. 하지만 에이프릴도 멍청이가 아닌 이상 분위기 조성한답시고 또 갈퀴에 내장을 둘둘 감고 오겠니?”

“그래도 같은 방식으로 무너뜨리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요? 엄마와 베일리 아저씨의 내장이 이렇게 질기고 튼튼하니 묶어서 밧줄처럼 사용하자고요. 만화에 나오는 카우보이처럼요.”

피어는 옥수수밭의 조경물처럼 얌전히 널려 있던 내장을 들어 고무줄처럼 죽죽 잡아당겼다. 트레이시, 혹은 베일리의 창자는 배 속에서 갓 꺼낸 듯 탱탱한 탄력이 살아 있었다. 서준이 숨이 턱 막혀 콜록콜록 기침하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다 썩은 줄 알았더니…. 그, 그리고 피어. 네가 너희 부모님을 함부로 대하지 말아 달라고 하지 않았어?”

“이건 함부로 대하는 게 아닌걸요. 비록 엄마가 저를 죽이려고 이런 곳에 내몰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저를 소중히 여기는 따뜻한 마음이 개미 눈곱만큼은 있었겠죠. 저는 살가운 딸답게 엄마도 눈치채지 못한 숨겨진 마음을 빠르게 알아챈 거고요. 뭐, 아니면 베일리 아저씨일 수도 있고요.”

별별 요상한 능력을 지닌 선지자나 유령도 좀비의 싱싱한 내장만으로는 본래 주인이 누구인지 알 방도가 없었다. 서준은 짧게 고심하고 빠르게 수긍했다. 자기 부모도 아닌 판국에 아무렴 어떠랴?

“이걸 밧줄처럼 이용해서 다시 허수아비의 중심을 무너뜨려요. 그리고 그 틈을 타서 짚 속을 마구 파헤치면 되는 거죠. 있죠, 아저씨. 저는 그들을 피해 다녔어요. 쥐새끼 같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말이에요.”

명징한 눈동자가 서준을 올려다보았다. 확신을 담은 시선은 날카롭게 갈린 칼날처럼 윤기가 흘렀다.

“아저씨. 사실 에이프릴을, 살인 허수아비를 이기려 들 필요는 없어요. 제 뼈를 찾으면 저는 옥수수밭에서 풀려날 테고, 해방된 제가 아저씨를 옥수수밭 바깥으로 안내할게요. 저는 정말로 길을 알아요. 나가지 못하고 있을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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