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4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고 날은 무더웠다. 땅에서 피어오르는 열기가 서준의 발바닥을 뜨겁게 데웠다. 옥수수밭에 들어와 줄곧 느끼던 더운 기운이 소녀의 말을 듣자 돌연 찬 공기로 바뀌었다. 싸한 냉기가 피부의 표면에 달라붙고 들이쉬는 숨이 서늘했다. 얼음 조각이 목구멍에 쿡 박힌 듯이 따가운 감각은 제 착각일까?
그러나 서준은 늘 그랬듯이 도망치는 대신 소녀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허수아비에게서 벗어난 이후에야 듣게 된 아이의 목소리가 낯익었다.
“나한테 구조 요청을 한 게 너야?”
“그건, 네. 맞아요…. 죄송해요. 일부러 위험하게 만들려던 건 아니었어요. 정말이에요.”
대답하는 소녀는 무전기를 껴안고 쓰러졌던 시체와 완전히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우선 눈앞의 아이는 적어도 살아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몸뚱이는 마르고 초췌했다. 풀죽은 시선이 눈치를 보듯 서준을 힐긋거렸다.
걸음걸음 다가갈수록 몰랐던 부분이 보였다. 심드렁한 기색은 떨리는 눈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고, 무뚝뚝하다고 여겼던 입가는 사실 시무룩하게 기울어진 탓이었다. 소녀는 에이프릴처럼 같은 자리를 서성이다가 맨바닥에 철퍼덕 앉았다. 바지 아래로 드러난 발목은 굵기가 서준의 손목과 비슷했다.
“끌어들여서 죄송해요.”
소녀는 무릎을 끌어 모아 얼굴을 비볐다. 죽은 자 특유의 음산함과 악의 서린 정기로 생생하던 로렌 부부나 마냥 유쾌하고 낙천적이던 에이프릴과는 달리 아이는 지치고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서준은 결코 고의가 아니었다며 웅얼거리는 소녀의 곁으로 가 함께 앉았다.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소녀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알았어. 혼 안 낼 테니까 우리 통성명이나 하자. 난 서준이야. 이름으로 부르거나 아저씨라고 불러도 괜찮아. 참고로 결벽증은 아니야.”
“아저씨처럼 생기지는 않았는데. 그리고 결벽증이 뭔데요?”
“나이가 그래. 그리고 그런 게 있어.”
그는 소녀를 믿기로 했다. 이유는 옥수수밭에 들어왔을 당시와 마찬가지로 별것 없었다. 이 어린아이의 구조 요청을 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죄책감으로 점점 좁아지는 어깨를 보았기 때문이다. 때때로 사람의 마음이란 고작 그 정도로도 움직이는 법이다.
소녀는 서준을 보았다가 하늘 높이 솟은 옥수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옥수수들은 소녀의 키에 비하면 하나같이 너무 커 창살이 빼곡한 감옥 같았다. 아이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저는 피어예요. 원래는 쥘 기요가 될 뻔했는데, 아빠가 반대해서 피어가 된 피어 로렌. 저는 살아 있었을 때부터 죽은 사람을 볼 수 있었어요.”
살아 있었다고 하니까 기분이 이상하네요, 하고는 피어가 볼을 부풀렸다.
날 때부터 영감이 있던 피어는 살가운 자식이 아니었다. 눈은 때때로 허공을 쫓았으며 대화의 방향이 쉽게 어긋났다. 친모 트레이시의 평에 따르자면 사랑을 받기 적절하지 못한 언동이었다.
“엄마는 베일리 아저씨와 불륜을 했어요. 불륜이라는 말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어요.”
피어의 친부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디라는 건 막연한 단어였다. 잘 모르는 곳을 가리키는 지시 대명사만이 피어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친부의 흔적이었다. 그 결과 피어의 부모 자리에는 트레이시와 베일리가 앉았다.
하지만 그들은 원체 도덕적 기준이 평균에 못 미치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새로운 로렌 부부는 피어를 버리기로 결심했다. 저녁 식사의 메뉴를 고르며,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계단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피어의 귀에 들어갈 만치 허술한 대화를 통해, 너무나 쉽고 간단히.
동시에 트레이시와 베일리는 교활했다. 친구라고는 옆집의 동갑내기밖에 없던 피어를 유기하기 위해 그들은 여행을 떠났다. 봉고차의 뒷좌석에 과일이 그려진 튜브와 나이에 맞지 않는 고무 오리를 싣고. 피어는 그 틈바구니에 끼어 몸을 웅크렸다.
운전대를 잡은 트레이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옆자리의 베일리에게 말을 걸었다. 베일리는 즐겁게 그녀와 대화했다. 그들과 피어의 거리는 의자 한 줄이었으나 피어는 까마득한 절벽을 사이에 둔 것 같았다.
피어의 흑갈색 눈동자가 울적하게 가라앉았다. 창가에 비치는 색은 피어의 친부와 똑 닮아 트레이시가 종종 불평을 토하곤 했다. 그러나 피어는 태어나면서 가족을 고를 권리가 없었고 생김새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홉 살짜리 아이의 얼굴에 우울함이 한겨울의 눈처럼 쌓였다. 빠르게 달리는 차 바깥으로 보이는 풍경과는 상반된 표정이었다.
평화롭다 못해 한갓진 도로의 오른쪽에는 초록 내음을 물씬 풍기는 옥수수가 끝없이 자라나 있었다. 옥수수밭은 끝도 없이 이어져 차가 달려도 연이어 같은 경치가 펼쳐졌다. 그때 바깥을 구경하던 피어의 눈이 크게 뜨였다. 옥수수밭에 웬 아이가 서 있었다. 멜빵바지에 목장갑을 낀 아이가 인사하듯 흔들흔들 손을 좌우로 움직였다.
“어.”
작은 입에서 무심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피어의 얼굴이 창문에 찰싹 달라붙었다. 유리의 찬기가 뺨에 닿았고 트레이시의 고함이 울렸다.
“피어!”
피어의 어깨가 파드닥 떨리며 창가에서 떨어졌다. 룸 미러에 비친 트레이시의 눈이 짜증을 담아 피어를 노려봤다. 피어는 배를 감싸며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몰래 챙긴 무전기를 셔츠 안쪽에 숨긴 터라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하지만 트레이시는 무전기를 눈치챈 게 아니라 그저 트집을 잡으려던 것뿐이었다.
“피어, 운전하는데 조용히 못 하겠니? 또 헛소리를 늘어놓을 거면 차라리 입 좀 다물고 있어. 엄마를 얼마나 더 힘들게 만들어야 성이 차니?”
피어는 트레이시의 바람대로 입술을 꾹 눌렀다. 그러나 이도 오답이었는지 트레이시의 성난 목소리가 한 번 더 날아왔다.
“또, 또 저 불리하니까 입도 벙긋 안 하는 거 봐.”
“그만해, 트레이시. 피어도 엄마를 너무 피곤하게 하지 말렴.”
베일리가 트레이시를 타이르자 봉고차 내부는 조용해졌다. 그는 뒤를 돌아보며 푸근하게 미소 지었다. 새까만 눈이 반들거리며 피어를 반사했다. 피어는 황급히 얼굴을 숙이며 침을 삼켰다. 발작적으로 흥분하는 경향이 있는 트레이시보다 베일리가 더 두려웠다. 밤늦게 잠드는 아이는 자신을 옥수수밭에 버리자는 계획이 누구의 머릿속에서 나왔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후 조용하지만 절대로 편하다고 말할 수 없는 날 선 공기가 세 사람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리고 차가 멈췄다.
길가에는 봉고차 한 대뿐이었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도로는 적막했다. 이 고요함 속에서 북을 치듯 세게 뛰는 심장의 소리가 피어의 귓가에서 울렸다. 피어는 제발 차가 다시 출발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트레이시는 시동을 거는 대신 안전벨트를 풀며 즐겁게 말했다.
“예전에 이곳에 못된 아이를 버린 부모가 있다지? 얼마나 속이 시원했을까!”
그녀는 조심성 없게 떠들었다. 베일리는 이제 트레이시를 만류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뒷좌석의 문을 열고 피어의 어깨를 붙잡았다. 해가 높이 뜬 날이었다. 물론 봉고차의 그늘에 가려 베일리의 얼굴에는 빛 한 점 들지 않았다.
“피어, 아빠가 너무 배가 고프구나. 가서 옥수수를 하나 따 와 주지 않으련?”
“들어가지 말라고 적혀 있는걸요.”
짧은 손가락이 새빨간 경고판을 가리켰다. 선명한 흰색 글씨가 반쯤 협박하는 어조로 길고 긴 경고를 하는 중이었다. 억센 손가락이 피어의 가냘픈 어깨를 움켜잡았다.
“피어, 저런 낡은 규칙은 지키지 않아도 괜찮아.”
그렇지 않다. 규칙은 지켜야 옳다. 그러나 피어는 대꾸하지 못했다. 입 속이 바짝 말라만 갔다. 버석버석한 입술을 깨문 아이가 트레이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차라리 외면당했다면 좋았을까?
힘없이 의자에서 일어난 다리가 봉고차 바깥으로 나왔다. 운동화를 신은 발이 느릿하게 옥수수밭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느낀 기묘한 기분이란…. 자신에게 닥칠 불행의 편린을 엿본 것처럼 몹시 서글프고 역겨운, 그런 기분. 바람을 타고 날아온 지독한 냄새를 맡을 겨를도 없이 피어는 옥수수밭을 밟았다.
아이답게 키가 작은 피어는 가장 가까운 곳의 옥수수 줄기를 잡고 흔들었다. 하지만 트레이시와 베일리의 목소리가 피어의 등을 떠밀었다. 더 안쪽으로, 더, 더, 더! 피어는 뒤를 돌아보고픈 마음과 차라리 쭉 내달리고 싶은 이중적인 마음에 시달렸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자 로렌 부부가 옥수수밭에 들어와 있는 게 아닌가? 그들은 정신없이 옥수수를 뜯어 먹었다. 실핏줄이 터져 붉게 달아오른 눈으로 식탐을 게걸스럽게 표출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아귀였다. 심지어 트레이시와 베일리는 배가 불룩 튀어나올 때까지도 먹는 걸 그만두지 않았다. 아무리 보아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피어는 옥수수 줄기 사이에서 숨을 죽였다. 쉬지 않고 먹으면서도 배가 고프다고 중얼거리던 그들이 멈춘 건 허수아비가 나타난 후였다. 기괴한 다리를 단 허수아비는 갈퀴를 들어 트레이시와 베일리의 배를 찢었다. 내장을 모조리 긁어내며 즐겁게 어깨를 흔들었다.
열심히 귀를 틀어막아도 친모와 계부의 비명이 손가락 틈새로 파고들었다. 차라리 눈을 감았다면 한결 나았을까. 모든 광경이 안구에 선명히 새겨진 피어는 공포에 질려 옥수수밭의 안쪽으로 달려 나갔다. 로렌 부부가 살해당하는 광경이 머릿속에서 끝없이 재생됐다. 앞도 뒤도 구분하지 못하고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뛰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너무 깊숙이 들어온 다음이었다. 사방을 둘러싼 옥수수 탓에 도로의 방향이 어느 쪽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피어는 떨리는 손으로 무전기를 켰으나 잡음만이 터질 뿐이었다. 마지막 보루였던 무전기도 소용없었다.
며칠이 지나 피어는 아사했다.
“엄마와 베일리 아저씨, 그리고 저…. 우리는 이곳에 고인 물웅덩이나 다름없어요. 썩어 갈 뿐이죠. 벗어나지 못한다면 저도 에이프릴에게 잡혀 그 애의 꼭두각시로 이용당할 거예요. 저는 그게 싫어요.”
스스로 죽은 존재임을 자처하는 소녀가 단호하게 말을 끝맺었다. 그런데 이상한 이름이 하나 있었다. 서준은 귓구멍을 후빈 다음 다시 물어보았다.
“에이프릴?”
“네? 에이프릴이요.”
“혹시 그 에이프릴이 밀짚모자를 쓰고 멜빵바지 입고…. 그런 에이프릴?”
서준이 에이프릴의 용모를 자세히 설명하자 피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피어의 고동색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맞아요. 저희 부모님을 죽이고 허수아비 머리를 뒤집어쓴, 사악한 악령 말이에요.”
“무, 무슨 소리야? 에이프릴이 귀신이라니? 증거가 있어?”
“증거고 자시고…. 저한테 직접 말했는걸요. 우리를 버린 부모를 죽이고 가족이 되자고요.”
“뭐?”
서준이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는 묘기를 선보였다. 그는 얼얼한 엉덩이를 문지르며 이를 갈았다.
‘어쩐지 그 꼬맹이, 너무 맹랑하더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