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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64)화 (64/156)

#063

태양을 찌르듯 높이 들린 갈퀴의 날이 번뜩 빛났다. 무심코 눈살을 찌푸린 서준의 귓가에 불만에 찬 속삭임이 들려왔다. 이렇게 쉽사리 죽어 줄 생각이야? 낯선 음성이었지만 동시에 익숙했다. 그것은 서준 자신의 목소리였다. 연이어 억울한 심정이 불쑥 치솟았다.

‘내가 그 빌어먹을 캠프장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자그마한 친절을 발휘했다는 이유로 죽을 위기에 처한다고?’

이곳은 어둠이 깔린 캠프장이 아니었다. 피부를 익힐 듯한 열기가 고통스럽기야 했지만 한낮의 옥수수밭에 불과했다. 그를 지독하게 노려 대는 연쇄 살인마나, 집채만 한 크기의 우주에서 날아온 식인 촉수 괴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고작해야 죽어 나자빠진 시체 둘과 조금 감각적인 장신구를 지닌 허수아비 하나가 전부였다.

서준이 이를 악물었다. 곧 죽어도 두 번째 인생의 끝을 이렇게 단장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이래 봬도 우주에서 온 괴물과 맞서서 살아남은 인재였다. 물론 괴생명체 X를 온전히 끝내 버린 건 에어리와 크리스티나의 활약 덕분이었으나, 서준은 레몬과 화염병에 관한 힌트를 내 준 자신에게도 제법 지분이 있지 않나 생각했다.

살면서 공들여 가꾼 염치없는 정신이 깨어나자 손과 발에 피가 돌기 시작했다. 하나뿐인 눈은 생을 향한 집착으로 기묘한 광채를 뿜었다. 그러자 공포에 가려져 있던 시야가 한결 밝아졌다. 예를 들면, 허수아비 뒤편의 옥수수 줄기 사이로 보이는 창백한 얼굴이라든가.

처음에는 에이프릴이 아닐까 의심했다. 눈높이가 그와 비슷했고 몸집이 자그마했다. 하지만 밀짚모자를 깊게 눌러써 코 윗부분이 잘 드러나지 않았던 에이프릴과 달리, 희게 질린 얼굴에 박힌 또렷한 흑갈색 눈동자가 서준을 응시했다.

아이는 입 모양을 뻐끔거리며 허수아비를 힐긋거렸다. 허수아비는 다행히 뒤통수에 눈이 달리지는 않은 모양인지 아이를 알아차린 기색은 없었다. 서준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자 아이가 다시 한번 입을 움직였다.

이쪽으로 도망쳐요.

조금 전보다 더 크고 느릿하게 입매를 움직인 덕분에 내용을 알아차리는 건 쉬웠다. 하지만 서준의 발을 묶은 건 말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과연 이 아이를 믿어도 괜찮을까?

옥수수밭에 들어와 만난 놈들은 하나같이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미라화된 시체는 둘째 쳐도 사람인 척 굴다가 돌연 본색을 드러낸 로렌 부부에 고집을 부리다 혼자 사라진 에이프릴, 갑자기 나타나 갈퀴를 휘두르는 허수아비…. 이럴 때 저 납색 감도는 피부를 지닌 아이의 정체가 의심스러워지는 건 타당했다.

그러나 서준의 인생 대부분이 그러하듯 그는 갈등할 시간조차 넉넉지 못했다. 서준이 잠시 한눈을 팔자 허수아비가 갈퀴를 내려찍듯 휘둘렀다. 목장갑이 뼈대의 모양대로 구부러지고 쐐액, 하며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무수한 다리가 시각적인 공포를 안겨 주었다면, 갈퀴는 실질적인 두려움이었다. 둘둘 말린 내장은 갈퀴가 단순한 장식적 요소가 아님을 시사했다.

“큿!”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무너지려는 몸뚱이를 오른쪽으로 굴리기 무섭게 갈퀴가 그곳을 내려찍었다. 무시무시한 기세에 머리카락 몇 가닥이 철사에 잘려 나갔다. 동시에 갈퀴에 감겨 있던 창자가 길게 휘날리며 서준의 이마를 후려갈겼다.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에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핏물이 질질 묻어나는 것은 대단히 역겨운 일이었다.

“흐, 으아악!”

서준은 대경실색하며 자빠졌다. 엉덩방아를 찧고 뒷걸음질하는 몰골은 꼴사납고 무방비했다. 어디선가 로렌 부부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러나 허수아비는 당장 그를 향해 갈퀴를 내려찍지 않았는데, 갑자기 서준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난 게 아니라 갈퀴가 바닥에 단단히 박혔기 때문이다. 사람의 정수리를 아주 깨부수려고 작정했었는지 땅 깊숙이도 들어간 갈퀴 덕에 서준의 가냘픈 목숨줄이 약간이나마 더 붙어 있게 되었다.

“이, 이봐.”

말라붙은 입술에 침을 바르며 서준은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허수아비는 그 다양한 재주에 비해 목을 돌린다는 간단한 기능은 없는지 서준의 부름에도 묵묵히 경작질을 했다. 물론 허수아비의 경작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 분명했고, 서준은 그 틈을 타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가장 좋은 선택은 도망질이었다. 문제는 조금 전 나동그라지며 다리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는 아무렇게나 나불거렸다. 당장 움직일 수 있는 게 주둥이뿐이었으니 고르고 자시고도 없었다.

“폴 씨. 아니, 풀이었나? 아무튼, 그 모습에 이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게.”

끼익, 끼익, 끼익…. 허수아비의 상체가 자꾸만 소리를 냈다. 장대를 축으로 곧게 선 모양새로, 엮인 다리는 이동 수단 외에는 별반 쓸모가 없는 듯했다.

“음, 나는 생긴 걸로 편견을 가지지 말자는 주의를 가졌어. 정말이야. 아무래도 인종 차별이나…. 그런 건 요즘 시대에 뒤떨어졌잖아?”

솔직히 이것만은 진심이었다. 그는 보비 외의 사람은, 심지어 골든이라 할지라도 진정성 있게 대하려 노력했다. 결과는 자전거의 원한이었으나, 어쨌든.

“아무리 종이 달라도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어. 사실 나도 당신 같은 친구가 한 명 있거든. 리처드라고 은발이 멋진 녀석이야. 염색인지 진짜 머리카락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막상 말로 꺼내자 서준도 헷갈렸다. 동생인 헨리는 태생부터 별처럼 빛나는 머리카락이었던 듯한데, 리처드는 어땠더라? 같이 다니던 골든과 브래스 중 골든은 확실하게 물들인 금발이었고 브래스는 놀랍게도 자연모였다. 그리고 요한의 금실을 뽑아낸 듯 진한 금색 머리카락 또한 날 때부터 지닌 머리카락 색이었다.

언제였더라? 계절은 여름이었다. 서준은 그다지 즐기지 않았지만 미식축구는 톰팃톳 학생들 대다수가 좋아하는 스포츠였다. 우연히 보게 된 경기는 거의 끝물로, 마침 요한의 팀이 승리한 참이었는지 팀원에게 둘러싸여 주먹을 맞부딪치는 중이었다. 누군가 뒤에서 그의 턱끈을 풀고 헬멧을 벗겨 냈다.

그때 역시 공교롭게도 태양이 높게 뜬 정오였다. 땀으로 젖은 얼굴과 약간 곱슬기가 도는 머리카락이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짓던 요한은 곧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환한 미소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황금과 비슷했다. 금색 광택으로 빛나는 청년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그런 평가를 내릴 터였다.

‘아니, 지금 이딴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머릿속을 채우는 안개를 빠르게 휘저으며 서준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짐짓 간드러진 목소리를 내뱉으며 허수아비를 꾀었다.

“바란다면 소개해 줄게. 너희는 분명 좋은 친구가 될 거야. 속도 비슷하고….”

콰득! 서준의 발치에 다시 한번 철사가 꽂혔다. 정성을 다한 제의였지만 살인 허수아비는 영 마음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씨발, 이거 안 통하네! 거!”

졸가리 같은 몸뚱이가 구겨져서 뒹굴었다. 하기야 서준도 온갖 금칠을 다 했지만 리처드가 영혼의 단짝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화가 날 것이다. 서준은 휘청거리며 다가오는 허수아비를 노려보았다. 이제는 진실로 방법이 없었다. 납색 얼굴의 아이가 손짓하는 방향.

갑자기 믿음이 무럭무럭 자라났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별로 신기할 것도 없이 주변은 여전히 옥수수투성이었으며 뒤에서는 로렌 부부의 즐거운 웃음이 들려온다. 그렇다면 정면 돌파 외에 다른 답이 있던가.

서준은 제 앞을 막아선 허수아비를 바라보며 달렸다. 여전히 도주를 위한 뜀박질이었으나 이번만은 뒤가 아니었다. 그는 갈퀴를 들어 올리는 허수아비를 향해 똑바로 나아갔다. 창자를 크리스마스 장식끈처럼 둘둘 휘감은 녀석과 맞대결하겠다는 심산은 단연코 아니었다. 괴생명체처럼 명확하게 약점을 알지도 못하는데 그러한 종류의 배짱은 서준의 뱃속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흐읍!”

길게 미끄러지며 목표를 향해 팔을 쭉 뻗었다. 허수아비의 악랄한 다리? 징그러운 꼴에 보행 기능도 갖추어서 무너뜨리면 더할 나위 없을 터였다. 하지만 장대를 기준으로 두 다리를 갖춘 상태인 게 난관이었다. 두 다리 중 하나, 혹은 장대를 노려도 2개의 기둥이 남으니 단번에 중심을 흐트러트리기 어려웠다. 실패의 리스크가 너무 컸다.

그렇다면 갈퀴? 허수아비가 치켜든 이상 터무니없는 높이였다. 요한이나 윌리엄처럼 힘과 반사 신경이 모두 뛰어나지 않고서야 어정어정 손댈 부위가 아니었다. 고작 제 키 하나 믿고 계획을 짜기에는 서준에게도 눈치라는 게 조금쯤은 갖춰져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장갑을 낀 손이 그것을 잡아챘다. 철퍽, 소리가 났다. 물컹한 촉감이 장갑 너머로도 느껴졌으나 서준의 얼굴은 불쾌하게 일그러지는 대신 환한 미소가 걸렸다. 인간의 창자란 몹시 길어서 허수아비가 갈퀴를 치켜들고도 바닥에 닿았다. 눈앞에서 보란 듯이 창자가 덜렁거렸고, 그는 두 번 고민하지 않았다. 왼손에 휘감은 창자를 온 체중을 실어 쭉 잡아당기자 허수아비의 몸이 불시에 휘청거렸다.

‘생각보다 가벼워?’

크게만 느껴졌던 허수아비는 예상외로 가붓했다. 하지만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서준과 허수아비가 스쳐 지나가는 순간은 몹시 짧았다. 그럼에도 말 그대로 허수아비를 쓰러뜨리기는 충분했다. 팔에 휘감긴 창자를 기분 나빠할 겨를도 없이 뒷골이 저릿해지는 쾌감이 올라왔다. 정면으로 쓰러지는 허수아비가 먼지를 부옇게 흩날리는 광경은 짜릿한 승리의 맛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여전히 여유를 부리며 승리를 음미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이쪽으로!”

납색 얼굴의 아이가 등을 돌리며 외쳤다. 그리고 가느다란 목소리가 이끄는 대로 달려가던 서준의 눈이 크게 뜨였다. 거리가 가까워진 덕에 그는 옥수수 줄기 사이에 숨어 있던 모습을 드디어 보았다. 고동색 머리카락, 검은색 반소매 티셔츠에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회색 칠부바지.

옥수수밭에 들어와 처음 마주쳤던 시신이었다.

짧은 승리를 만끽하기도 전에 등줄기로 오한이 샘솟았다. 자신은 또 귀신을 마주치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면 좀비일까? 사실 그런 구분은 무의미하기도 했다. 로렌 부부의 경우를 보라. 그들은 귀신이자 좀비인 몸뚱이로 날뛰며 서준을 농락했다. 사람이었다던 사형수가 베갯잇을 뒤집어쓴 꼴은 또 어떻고? 옥수수밭에서 죽은 놈들은 하나같이 줏대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 애는… 귀신일 수도… 시체일 수도… 있다! 가능하다!’

아이란 본디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존재가 아니던가? 서준은 필사적인 자기 합리화 끝에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허겁지겁 달리느라 그의 심장은 결코 평안하지 못했지만 어차피 고단할 것이라면 정신이라도 붙들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아이가 천천히 멈췄다. 소녀는 목뒤까지 오는 머리카락 타래를 팔락팔락 흔들더니 고개를 돌려 말했다.

“여기쯤이면 괜찮을 거예요. 그리고 손에 그거….”

“어?”

소녀의 지적에 서준은 뒤늦게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허수아비를 끌어당길 때 사용한 창자가 아직도 그의 팔뚝에 둘둘 감겨 있었다. 길이가 어중간한 게 아무래도 잡아당기던 중 끊어진 듯했다.

“깜짝이야!”

서준이 창자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철퍼덕, 땅바닥에 내려쳐진 사람의 내장은 불쾌한 소리를 내며 곤죽이 됐다. 소녀는 눈썹을 찌푸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거, 아무래도 저희 부모님 같은데 그렇게 함부로는 대하지 말아 주세요.”

상당히 똑 부러진 아이였다. 하지만 중요한 건 소녀가 얼마나 말을 야무지게 하는가가 아니라 내용이었다. 서준은 흩어진 창자와 소녀를 번갈아 보았다.

“뭐? 너희 부모님?”

설마 창자가 부모라는 말은 아닐 터이니, 이 창자의 주인이 소녀의 부모라는 뜻이다. 그리고 서준이 짐작하기로 이 배 속을 가득 채웠을 내장의 주인이라면…. 옥수수를 먹을 때마다 열린 뱃가죽에서 죄 떨어지던 스산한 낯짝들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설마 네가 말하는 부모님이 어머니는 웃음소리가 무척 낭랑하다 못해 귀가 찢어질 것 같으며…. 아버지는 손아귀 힘이 심히 강력해 남의 머리카락을 전부 뽑아 버릴 기세이신…. 이름은 트레이시와 베일리라고 하는…?”

“맞아요. 그분들이요.”

소녀는 여전히 심드렁한 태도로, 어찌 보면 불퉁한 어조로 대꾸했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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