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63)화 (63/156)

#062

아귀처럼 굴던 트레이시와 베일리가 망막 위로 떠오르자 지독한 거부감이 목구멍을 조였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손을 휘둘렀다.

“아!”

옥수수가 흙바닥으로 내팽개쳐진 것과 안타까운 한숨이 토해지며 공기를 덥힌 것은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데굴데굴 구르는 옥수수를 내려다보던 창백한 뺨이 경련하듯 떨렸다.

“아아….”

에이프릴의 입가에서 다시금 애통한 숨이 새어 나왔다. 그 나이대답지 않게 조숙한 기미를 물씬 풍겼다. 그러나 서준의 새까만 눈동자는 여전히 옥수수를 끔찍한 오물처럼 바라보았다.

머리로는 옥수수는 단순히 식물에 불과하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장소가 문제였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열기와 빽빽하게 자라난 옥수수가 끝없이 이어지는 바로 이곳이.

하나의 관념이 새로운 관념을 불러일으킨다. 옥수수가 그저 한해살이풀에서 그치지 않고 내장이 없어 텅 비어 버린 배 속을 연상시켰다. 검게 썩은 핏물로 치환당했다. 잔혹한 풍경은 그 존재만으로도 폭력이었다.

허기가 씻은 듯이 사라지자 서준은 뻣뻣한 볼을 억지로 움직였다.

“아니, 아니. 난 괜찮아. 배고프지 않아.”

“그래요? 맛있는데.”

으득, 하얀 이가 하얀 알을 물어뜯었다.

***

에이프릴이 배를 채운 후 그들은 계획을 실행시키기로 했다. 서준은 앞서는 에이프릴의 작은 등을 보며 옆구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허기 때문에 쓰라린 것인지, 아니면 적응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몸이 힘들다고 신호를 보내는지 도통 가려낼 수 없었다.

‘아마 둘 다겠지.’

원체 음울하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반면 에이프릴은 몹시 쌩쌩해 옥수수밭에 갇힌 소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세찬 기운을 선보였다.

“그렇게 축 늘어져 있을 거면 차라리 지금이라도 옥수수를 먹는 게 어때요? 그렇게 비실거려서야 뛸 수 있겠어요?”

“걱정하지 마. 물론 근성도 체력도 없지만.”

“그래 보이기는 해요.”

에이프릴이 혀를 찼다. 서준과 소년이 세운 계획은 단순했다. 에이프릴이 로렌 부부가 없는 길을 찾아 선두에서 움직이고 서준은 그 뒤를 열심히, 잘, 노력해서 따라간다.

‘이래도 되나?’

한심한 어른이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나 에이프릴이 말하길 본인은 안전한 길을 알고 있으니 앞서가는 건 당연히 자신이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길잡이가 헤맨다면 둘 다 살인 허수아비의 부하에게 잡힐 게 뻔하지 않은가? 또한 에이프릴은 서준의 마음을 헤아린 듯 이렇게 덧붙였다.

“정 그러면 살인 허수아비의 부하가 가까이 왔을 때 시간이나 벌어 줘요. 난 그동안 올바른 길을 찾을게요. 각자 역할 분담을 하자는 거죠.”

“알았어.”

에이프릴의 호언장담에도 서준은 여전히 불안했지만, 적어도 소년이 그보다 지리에 밝은 게 현실이었다. 이마를 찌르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서준은 불안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10분 후, 그는 등 뒤에서 쫓아오는 트레이시와 베일리의 높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늙은 개처럼 달렸다. 얼굴은 온통 땀으로 젖었고 실처럼 가느다란 머리카락은 바람에 휘날렸다. 온몸에 충돌하는 옥수수를 얌전히 고르며 치우거나 목 끝까지 차오른 숨을 내뱉을 시간조차 부족했다.

서준은 볼썽사납게 양팔을 허우적거리며 그저 앞으로 돌진했다. 길도 방향도 알지 못했다. 운동화의 바닥이 닿는 부분에 돌부리가 있어 넘어지지만 않도록 기도했다. 나오려는 눈물은 억지로 참았다. 쓸데없이 수분을 낭비해선 안 된다는 기특한 마음가짐은 아니었다. 한쪽 눈마저 보이지 않는다면 그는 길을 잃어버린다는 간단한 사실 적시에 불과했다.

찌푸려 얇게 뜬 눈이 정면을 향했다. 힘들게 밀어 올린 눈꺼풀이 희미하게 떨렸다. 아무리 눈을 감았다 떠도 그를 이끌어 주어야 하는 동행인의 작은 등이 보이지 않았다.

“윽!”

코를 훌쩍거리며 고꾸라지려는 허리를 겨우 바로 세웠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근성 있게 체력을 뽑아냈던 건 바로 일전의 독립 기념일이었다. 그런데 채 일 년도 지나지 않았건만 그때와 엇비슷하게 고통스럽고 힘겨웠다. 얼마나 불운해야 인생에 이런 방식의 고난이 연거푸 찾아온단 말인가?

서준은 주먹을 쥐고 팔뚝으로 앞을 가로막는 옥수수를 쳐 냈다. 휘어졌던 식물의 줄기가 탄력으로 되돌아와 그의 뺨을 철썩 후려갈겼다. 얼얼한 고통에 서준이 사납게 외쳤다.

“제엔장, 보비 같은 인생! 골든 같은 옥수수밭!”

뻥 뚫린 목구멍에 그제야 공기가 들어차는 기분이었다. 여전히 피곤하고 힘들었지만 멈추는 순간 트레이시와 베일리에게 무슨 꼴을 당할지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처음에는 순조로웠다.

에이프릴과 휴식을 취하던 안전한 장소에서 나온 뒤 소년은 재빠르게 뜀박질했다. 가벼운 몸은 옥수수 줄기 사이사이를 파고들며 길을 골라냈다. 하지만 그들의 소리를 들었는지 로렌 부부의 손길 또한 빠르게 뒤를 쫓았다. 음산한 웃음이 섬뜩하게 다가와 등 뒤를 스쳤다. 아슬아슬한 추격전이었다. 그나마 운이 좋았던 것은 에이프릴이 짧은 다리로도 유령처럼 홀연한 몸놀림을 선보여 진짜 귀신에게 잡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만 그 신출귀몰한 움직임 덕분에 서준까지 에이프릴을 쫓기가 무척 어려웠다. 키가 작은 소년의 밀짚모자는 잠시라도 시선을 놓치면 주변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서준은 에이프릴이 오른쪽으로 꺾어지고, 왼쪽으로 달려가고, 앞으로 곧장 나아간 흔적을 이를 악물고 따라갔다. 풀을 짓밟은 흔적이라도 살필 여유가 있었다면 좋았을 테지만, 당장이라도 베일리의 거친 손이 머리카락을 잡아 끌어당길 듯한 공포가 엄습했다.

실제로 그럴 뻔한 일이 두어 번 닥쳤다. 그때마다 서준은 발바닥이 닳을 기세로 에이프릴의 발자취를 쫓았다. 그쯤 되니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게 아닌 동물적인 감각만이 남았다. 볼썽사나운 자세로 팔과 다리를 퍼덕거리던 때, 에이프릴이 옥수수 사이로 작은 덩치를 쏙 집어넣었다. 기껏해야 다섯 걸음의 거리였다. 하지만 서준이 소년의 밀짚모자 챙을 따라 몸을 돌리자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질문은 뒤이어 찾아왔다. 왜 에이프릴이 보이지 않는 걸까? 시간이 아까웠지만 고개를 좌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밀짚모자를 쓴 소년은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감쪽같이 사라진 후였다.

“에이프릴? 에이프릴!”

로렌 부부에게 발각될 각오를 하고 크게 소년의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더운 바람이 불어 옥수수 줄기가 흔들흔들 나부꼈다. 그리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듯이 싸늘한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망연자실하게 서 있을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목적지를 잃어버린 채 잡히지 않기 위해 계속 달리는 건 정신을 갉아먹는 일이었다. 서준은 자신이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맴돌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꾸역꾸역 삼키며 추를 매단 듯 무거운 다리를 채찍질했다.

옥수수 줄기 사이로 이와 잇몸을 활짝 드러낸 베일리의 얼굴이 언뜻 스쳤다. 갈대 같은 몸뚱이가 주춤 멈추자 이번에는 귓가를 한기를 머금은 트레이시의 손톱이 할퀴었다. 멈춰서는 안 된다. 온몸이 땀으로 젖은 서준이 하도 깨물어 부르튼 입술을 짓씹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달려야 할까? 어쩌면 살인 허수아비의 부하들은 그가 죽을 때까지 도망치길 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서준이 두려움에 질려서 움직이지 못하고 쓰러지길 바라는 게 아닐까? 어린아이가 공벌레를 굴리고 놀듯 장난치면서….

눈앞이 둔하게 흐려졌다. 마라톤을 완주한 적 없는 몸은 땡볕을 받으며 지난한 술래잡기를 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폐가 텅 비어 버리고, 손과 발이 후들거렸다. 처음 로렌 부부에게 쫓겼을 당시와 상황이 비슷했다. 그러나 그때는 에이프릴이 서준을 도와줘 간신히 숨 돌릴 틈이 있었다. 지금은 오로지 그 혼자였다. 누군가 이 손을 잡고 도와준다면 평생 모은 저금액을 몽땅 털어 줘도 아깝지 않으리라.

물론 서준은 이미 전 재산을 털어 여행 준비를 끝마쳤다. 제가 아쉬운 처지인 주제에 저렴한 가격으로 구원을 꿈꾸었다. 이렇게 못된 꿍꿍이를 가져서일까? 흐릿해지기 시작하는 그의 눈앞에 드디어 누군가가 나타났다.

밀짚모자에 낡은 멜빵 바지. 활짝 벌린 양팔. 역광 탓에 얼굴은 새까맣다. 하지만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짐작하기는 쉬웠다. 거친 섬유의 질감을 드러내며 어설프게 꾸며 낸 웃음이 있을 터였다. 그러잖아도 세차게 요동치던 심장이 아프도록 뛰었다. 메마른 구강에서 억지로 모은 침이 깔깔한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손이라고 불러야 할지 고민되는 부위는 목장갑을 끼고 있었으며 그곳에 갈퀴가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장대 끝부분의 부챗살 모양으로 펼쳐진 철사에는 길디긴 창자가 엉켜 있었다. 작열하는 태양의 열기에 녹슨 철사가 둔중하게 빛났다. 허수아비가 서준을 굽어보듯 끼익…끼익… 하며 움직였다.

“아….”

서준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깜빡거리며 하나뿐인 눈에 그것의 하반신을 담았다. 보편적인 지식으로 허수아비란 장대를 이용해 땅에 꽂아 두는 물건이다. 하지만 이 허수아비는 조금 색다른 이동 방식을 고안했던 모양이다. 검은 피가 뚜욱 떨어져 검붉은 흙에 스며들었다. 허수아비가 비틀거리며 다가올수록 피는 더욱 흥건해졌다. 허수아비는 무릎 아래가 잘린 인간의 다리를 엉성하게 꿰어 만든 것으로 바닥을 딛고 있었다. 얼기설기 엮인 종아리와 발목, 발이 근육처럼 엉겨,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황당한 꼴에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다리로 다리를 만들었다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농담에 웃을 사람은 고작해야 보비가 전부이리라. 대체 몇 사람의 다리를 잘라 모았을까? 적어도 서넛은 넘을 것이다.

다리를 끌면서 허수아비는 서준에게 가까이 걸어왔다. 그래, 걸어온다. 비록 다리가 가진 본래의 기능 대부분은 소실한 듯 보여도 썩어도 준치라는 말처럼, 허수아비는 걸어 그에게 다가왔다. 해가 영원히 뜰 것만 같은 옥수수밭에서, 창자를 휘감은 갈퀴를 든 살인 허수아비가 닥쳐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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