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62)화 (62/156)

#061

큼직한 바위를 털며 주저앉은 에이프릴이 살인 허수아비 전설에 관해 떠들기 시작했다.

“살인 허수아비는 우리 마을에 오랫동안 전해진 이야기예요.”

“마을?”

이 근처에 마을이라 부를 만한 동네가 있던가? 서준은 가물가물한 머릿속 지도를 펼쳐 보았으나 썩 건질 만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애초에 타지인이니 그가 모르는 작은 촌락이 있을 법도 했다.

‘역시 미국에서 살 때는 자차가 필수지.’

서준이 자신의 중고 트럭을 흐뭇하게 떠올리는 사이 에이프릴이 발을 까딱거리며 말을 이었다.

“예전에 이곳에 심한 가뭄이 들었어요. 이웃 인심이 얼마나 팍팍해졌을지 상상이 가세요? 처음에는 다 같이 힘을 내자고 말했지만 하루, 이틀, 사흘, 나흘…. 하늘은 여전히 쨍쨍했고 비는 한 방울도 내리지 않으니 인내심이 닳았죠. 사소한 죄에도 지독한 형벌을 내렸어요. 도둑질을 하면 손을 자르는 게 어디 문명사회에서 일어날 일인가요? 그래도 하늘에선 빗방울 하나 떨어지지 않자 사람들은 눈에 불을 켜고 원인을 찾았어요. 누군가 죄를 지어 하늘이 벌을 내리는 거라고 믿었거든요. 그리고 마침 마을에는 구금된 사형수가 있었어요.”

“사형수가 있었다고? 대체 왜? 작은 마을이라며.”

“그거야 저도 모르죠. 그냥 그런 전설이라니까요. 아무튼 전설에 따르면, 사람들은 사형수 풀을 허수아비 대신 매달았어요. 어라, 풀이었나 풀스였나…. 뭐, 사형수의 이름 따위야 무슨 상관이겠어요? 중요한 건 사형수가 장대에 묶이며 사람들은 풍년이 들기를 기도했다는 거죠. 물론 사형수는 저항했지만 수많은 사람을 어떻게 당하겠어요? 마을 사람들도 참 지독했죠. 그 사형수는 이미 잔혹한 벌을 받은 후였는데 말이에요. 아무튼 저항하지 못한 사형수는 장대에 매달려 손목과 발이 묶이고 머리 위로 헝겊을 뒤집어썼어요. 뙤약볕 속에서 사형수의 신음이 들려왔죠. 바로 그때, 수많은 참새가 날아와 살아 있는 사형수의 살점을 쪼아 먹었어요.”

사형수의 죽음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참새의 뾰족한 부리가 머리를 제외한 전신의 살을 파먹었다. 서서히 뼈가 드러나며 사형수는 앙상하게 말라 갔다.

“헝겊을 뒤집어쓴 사형수는 보이지 않는 두려움과 불시에 찾아오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무시무시하게 울부짖었어요. 몇 시간이 흐른 후, 드디어 사형수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이 왔죠. 그런데 그때였어요. 죽기 직전에 잠깐이나마 찾아온 제정신이랄까요? 하지만 그건 회광반조(빛을 돌이켜 거꾸로 비춘다는 뜻의 불교 개념. 자신의 본심을 다른 데서 찾으려 하지 말고 스스로를 돌아보아 찾으라는 말) 같은 그럴싸한 게 아니었죠. 원한을 퍼붓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또렷한 광망이 필요했다…. 그런 느낌이었어요. 울부짖던 사형수가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저주를 내뱉었어요. 나는 허수아비가 되어 밭을 찾아오는 자를 전부 죽이겠다! 이 땅에서 나는 식량 한 톨마저 산 자의 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내 손에 죽는 너희 모두 끝없이 굶주리며 나의 노예로 부림 당할 것이다! 내 손을 대신할 자를 구하지 않는다면 영원토록 종이 되리라!”

에이프릴은 사형수의 유언을 열심히 모사했다. 섬뜩한 내용이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재현됐다. 그러나 이러한 재생은 서준에게 두려움을 안기지는 못했다. 그저 별 해괴한 일에 또 휘말렸다는 사실에 암담해졌을 따름이다. 이야기를 끝낸 에이프릴이 서준을 올려다보았다. 밀짚모자 탓에 눈가는 잘 보이지 않지만 기대 어린 시선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차마 열심히 설명한 에이프릴에게 너희 동네의 전설은 아이들의 정서 발달에 악영향이나 끼치게 생겼다고 솔직한 감상을 말하기 어려웠다. 그에게 가능한 대답의 수준은 고작 이 정도였다.

“으응, 너 어려운 단어 참 많이 안다….”

에이프릴은 잠시 뻐기더니, 곧 진지한 태도로 충고했다.

“이 나이에 보통이죠. 있죠, 내 생각에 아까 그 사람들은 살인 허수아비에게 살해당했을 거예요. 살인 허수아비에게 죽은 사람들은 사후 그의 부하가 되어 부림 당하고 벗어나기 위해서는 대신할 사람을 불러야 하지요. 아마 그들은 당신을 점찍었나 봐요.”

“그, 그런 일이….”

옥수수밭에서 물귀신 작전을 사용하다니? 서준은 불안, 초조 증세로 인해 떨리는 손바닥을 침울하게 바라보았다.

‘역시 난 옥수수밭하고 안 맞아. 얼른 나가 버려야겠어.’

마지막으로 그는 에이프릴에게 한 가지를 확인했다. 조금 전에는 여러모로 머리가 복잡해 미처 물어보지 못했던 사안이었다.

“그리고 난 이곳에 도와 달라는 목소리를 듣고 들어온 건데, 혹시 네가 구조 신호를 보냈었니?”

“아니요? 전 아니에요. 그건 아마 살인 허수아비가 당신을 끌어들이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게 아니었을까요?”

‘개잡놈의 살인 허수아비…. 허수아비 주제에 왜 이렇게 다재다능한 거야?’

서준은 속으로 이를 갈며 살인 허수아비에게 투덜거렸다. 기껏 톰팃톳을 벗어났건만 이 세상은 아직도 괴상망측 기기묘묘했다.

내장까지 다 끄집어낼 기세로 숨을 토해 낸 뒤 주먹을 쥐고 허벅지를 가볍게 때렸다. 하도 달려 저릿저릿하던 근육이 잠깐 쉰 것도 휴식이라고 제법 멀쩡해진 느낌이었다. 그는 에이프릴의 밀짚모자를 의미 없이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살인 허수아비가 당장 코앞에 있는 것도 아니고 부정적으로 굴어 봤자 움직이는 데 방해나 될 뿐이야.’

따지고 보면 자신은 괴생명체 X와 연쇄 살인마 가스마스크의 위협에서 벗어난 인재가 아니던가? 근거는 없지만 왜인지 이번에도 도망칠 수 있으리란 희망이 자라났다. 서준은 스스로 긍정적인 마음을 불어넣으며 기운차게 입을 열었다.

“에이프릴, 같이 여기서 나가도록 하자. 넌 이곳의 길을 잘 찾으니 나가는 길도 금방 발견할 수 있을 거야. 우리가 함께라면 가능해!”

“예? 안 돼요. 저는 부모님을 찾아야 해요. 그분들이 절 버렸을 리 없는걸요. 절대 혼자서는 나가지 않을 거예요.”

긍정적인 마음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에이프릴은 로렌 부부의 끔찍한 모습을 눈에 새겨 넣지 않아서인지 고집을 부렸다. 에이프릴의 대답에 서준이 놀라 펄쩍 뛰었다.

“무슨 헛,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네 말마따나 살인 허수아비와 그 부하들이 이 옥수수밭에 진을 치고 있다니까. 얼른 도망쳐야지.”

“안 돼요. 부모님이 지금도 저를 찾고 계실 거라고요.”

“허.”

눅눅하게 젖은 등에 웃옷이 달라붙었다. 이런 건 맞부딪쳐 견디는 방식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다. 도대체 부모와 함께하겠다는 아이를 어떻게 설득한단 말인가? 서준은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번만큼은 따끔한 통증도 별반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 또래, 아니지. 하다못해 고등학생 정도만 됐으면 그냥 버리고 갔을 텐데….’

가꾸지 않은 날것의 마음이 자꾸만 비죽거렸다. 하지만 자그마한 에이프릴의 몸집이 옥수수밭에 들어와 처음 보았던 앙상한 시신과 거푸 겹쳤다. 에이프릴은 그때의 시신과 연령대가 엇비슷했다. 한마디로 그저 아이였다. 서준은 에이프릴을 버리고 갔을 경우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후회와 자책에 시달릴지 가늠해 보았다.

곰곰이 머리를 굴리던 그는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코를 찌르는 고무 냄새에 곧 손이 내려갔다. 고민하는 시간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서준은 에이프릴을 잘 구슬려 옥수수밭 바깥으로 나가고자 결심했다.

결정을 내리기는 쉬웠고 이유는 별것 없었다. 아마 그는 에이프릴을 버리고 간들 한 사흘 정도나 찝찝해하다 말 것이다. 그리고 서준은 그런 성미를 가진 스스로가 싫었다. 지금도 썩 자랑스럽지 못하건만 여기에 ‘아이를 버리고 홀로 살아남은’ 타이틀까지 거머쥔 인간이 되는 건 사양이었다. 그는 음울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에이프릴을 보았다.

‘도와 달라고 신호를 보낸 게 에이프릴은 아니었던 모양이지만…. 어쨌든 신고는 해 뒀어. 저 빌어먹을 좀비들한테 잡히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된다.’

현실적으로 이 드넓은 옥수수밭에서 에이프릴의 부모까지 구하는 건 서준의 능력 밖이었다. 게다가 에이프릴의 부모도 자식이 이상한 귀신과 살인을 저지르는 허수아비가 출몰하는 옥수수밭에서 쏘다니느니 안전하게 탈출하길 원하리라. 일단 에이프릴을 꾀어 옥수수밭 바깥으로 나간 다음, 부모 문제는 멀쩡한 경찰이나 구조대원들의 전문가적인 손길에 맡기는 게 최선이었다. 문제는 역시나 에이프릴의 태도였다.

“난 부모님을 찾기 전까지는 결코 이곳에서 나가지 않아요.”

“글쎄, 위험하다니까….”

“위험은, 내가 아까 당신을 구해 준 걸 잊었어요? 나는 얼마든지 그들의 눈에 띄지 않고 돌아다닐 수 있는걸요.”

소년은 요지부동으로 고집을 부렸다. 서준을 도와줄 때는 어른스럽더니 갑자기 아이처럼 떼를 쓰는 모습이 기가 막혔다.

“지금껏 운이 좋았던 걸지도 모르잖아? 넌 어린아이야. 이런 곳에 계속 있으면 위험해.”

서준은 두 손을 모아 크리스티나의 상냥한 마음씨, 다정한 말투, 보비조차 살리려 했던 인간을 초월한 자애를 따라 했다.

“혹시 내가 걱정돼서가 아니라 이곳을 나갔다가 그들과 마주칠까 봐 두려운 거 아니에요?”

‘이 망할 꼬맹이를 버리면 편할 텐데….’

역시 모방은 힘들었다. 사흘짜리 양심이 슬슬 혼자 탈출하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해 왔다. 서준은 얄팍하기 짝이 없는 인내심이 닳아 가는 걸 느꼈다. 당장 달래야 하는 건 에이프릴이 아니라 그의 다 타 버린 양초 같은 근성이었다.

의미 없는 언어적 공방이 몇 차례 더 지나갔다. 그리고 놀랍게도 유의미한 건의를 한 쪽은 에이프릴이었다. 소년은 허리에 손을 얹고는 자비를 베풀듯이 말했다.

“후, 그러면 이렇게 해요. 나는 살인 허수아비의 꼭두각시들이 언제,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있어요. 이곳을 벗어나는 게 아니라 저들을 피해 내 부모님을 함께 찾아봐요.”

“그러니까 에이프릴 네 말은 너희 부모님을 찾으면 여길 순순히 나가겠다?”

“그럼요. 부모님만 찾으면 내가 여기에 계속 있을 이유도 없잖아요? 그리고 난 이곳에서 여러 날을 보냈다고요. 여러 가지를 알아요. 저녁에도 별로 춥지 않고 배가 고프면 옥수수를 따 먹으면 되지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렇게 급하게 굴 것 없다고요.”

심각하게 낙관적인 발언이었다. 한술 더 떠 에이프릴은 본인이 손수 시범을 보였다. 소년은 제 키의 몇 배나 되는 옥수숫대를 꺾어 과실을 훔치는 데 성공했다. 에이프릴의 손이 옥수수 이파리를 익숙하게 찢자 새하얀 알맹이가 드러났다. 규칙적으로 박힌 옥수수 알갱이가 햇빛을 받아 유리구슬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에이프릴은 서준에게 옥수수를 내밀었다.

“당신도 먹어 봐요. 달고 맛있어요.”

순간 배 속에서 큼직한 천둥이 쳤다. 위장이 요란하게 쥐어짜이며 허기를 채우라 요란을 부렸다. 이렇게 굶주렸는데 왜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을까? 목구멍은 갈증을 호소했고, 반대로 입 속에는 군침이 잔뜩 고였다. 간단하게 먹은 아침 외에는 배에 밀어 넣은 것이 없었다.

서준은 홀린 듯이 손을 내밀어 옥수수를 받았다. 큼직하니 실한 열매가 고소한 향을 뿌렸다. 코끝에 부딪힌 표면은 몹시 매끄러웠으며 입술에 닿은 옥수수는 단단했다. 하지만 씹는 순간 말캉하게 터지며 즙이 가득 뿜어져 나오리라는 걸 서준은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로렌 부부가 먹는 장면을 직접 봤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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