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
흰 옥수수를 적시는 액체가 핏물인지, 혹은 썩은 살점이 녹아내려 액화된 상태인지는 모른다. 그저 확실한 점은 로렌 부부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뿐이었다. 침을 간신히 삼키자 목울대가 크게 꿀렁거렸다. 유독 큰 소리가 난 것 같아 절로 어깨가 굳었다. 그는 황급히 내리깔았던 눈을 느릿하게 굴렸다.
훅, 서준이 숨을 들이쉬었다. 트레이시와 베일리는 어느새 가만히 멈춰 서 그를 빤히 쳐다보는 중이었다. 차라리 박제된 곤충을 관찰하듯 흥미 섞인 시선이었다면 한결 나았을까? 그들의 태도는 한없이 건조했다. 표정 없는 얼굴은 마치 새하얀 가면을 쓴 듯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은 눈, 코, 입이 없는 단순한 만듦새의 인형. 좀비, 괴물, 귀신, 그 어떠한 비현실적 존재보다 아이의 손에 들려 움직이는 꼭두각시와 비슷했다. 어쩐지 눈앞에 있는 것이 그렇게 느껴졌다.
서준은 입 안쪽의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따끔한 통증이 그의 안일한 정신을 일깨웠다. 지금 한가롭게 저들의 정체를 파헤칠 때가 아니었다. 아무리 크리스티나를 본받기로 마음먹었다고는 하나 그의 인생 대부분은 도주와 회피로 점철되어 있었다. 발바닥은 당장이라도 달음박질하고 싶어 근질거렸고 이성은 얄팍한 호기심을 채우려는 뇌 주름을 팽팽히 잡아당겼다. 눈앞에 닥친 현재의 이 시간에서 얼른 벗어나야 했다.
낡은 운동화의 앞코가 슬쩍 움직였다. 그 순간 영영 다물려 있을 줄 알았던 석고상 같은 입술이 동시에 벌어졌다.
“도망치려고요?”
“도망치려고?”
“그건 불가능해요.”
“그건 불가능해.”
“살인 허수아비가 당신을 죽일 거예요.”
“살인 허수아비가 너를 죽일 거야.”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가 기묘한 화음을 이루었다. 로렌 부부가 달라붙어 있던 몸을 떨어뜨렸다. 덕분에 가슴 사이부터 배꼽 아래까지 길게 열린 뱃가죽 사이로 옥수수가 와르르 쏟아졌다. 찰나, 서준은 샌들을 신은 발과 탁한 눈동자를 번갈아 보았다. 고민은 짧았다. 사실 그 이상은 사치였다.
그는 주저 없이 뒤돌아 달려 나갔다. 거리감이니, 방향 감각이니 느긋하게 따질 재간이 아니었다. 서준은 전력을 다해 달음질쳤다. 폐가 한껏 부풀고 팽팽하게 부푼 허벅지에서 뜨겁게 열이 올라왔다. 하지만 노력에 비해 속도는 썩 좋지 못했다. 발치에 자라난 잡초가 발목을 잡아챘고, 끝이 날카로운 옥수수 이파리가 얼굴과 팔뚝을 스쳐 따끔따끔한 통증을 선사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과 목에 땀이 배어 나왔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 굴리듯 뛰는 몸뚱이 뒤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려요……. 우리 함께 죽어요……. 메아리치며 귀를 간지럽히는 저주가 서준의 이마에 핏줄이 불룩 서게 했다. 그가 이를 갈며 외쳤다.
“미친, 소리, 작작 해!”
쓰라린 목구멍에서 침 대신 욕설이 튀어나왔다. 도대체 저 부부는 자신에게 무슨 원한이 있어 물귀신처럼 구는지! 분통이 터져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는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빈약한 체력을 도주에 온통 쏟아부어야 했건만, 폐에 들어가야 할 공기를 한순간 악다구니와 함께 뱉어 버린 서준의 등에 차가운 시체의 손이 다가왔다.
“흐엇!”
베일리의 억센 손이 아슬아슬하게 서준의 옷자락을 놓쳤다. 그와 트레이시는 어느새 서준과 거리가 몹시 가까워져 몇 걸음밖에 차이가 벌어지지 않았다. 서준은 뺨이 뻣뻣하게 굳는 걸 느끼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쪽이에요!”
“헉!”
그때 누군가 그의 손을 잡아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서준이 무심코 뿌리치려 했으나, 예상외로 강한 아귀힘이 그를 끌어당겼다. 서준의 허리가 앞으로 꺾이며 의문의 인도자에게 끌려갔다. 다시금 몸에 힘을 주어 버티려는데 곧 하나뿐인 눈이 서준에게 새로운 정보를 알려 주었다. 왜소한 등에 제 키의 반도 되지 않는 단신이었다.
‘아이?’
서준은 놀라 강제로 잡힌 손을 빼지 않고 따라갔다. 아이는 몇 번이나 방향을 바꾸며 움직였다. 좁은 보폭이었으나 거리낌이 없었고 작은 등 역시 보무당당했다. 아이가 뭘 알고 가기는 하는 걸까 내심 우려가 되었으나 놀랍게도 점차 로렌 부부의 목소리가 멀어져 마침내 들리지 않게 되었다.
아이가 멈춘 곳은 미라나 허수아비가 있던 땅처럼 트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서준은 그런 점에서 되레 마음이 놓였다. 높이 자란 옥수수가 로렌 부부의 시선에서 벗어나게 해 주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기대를 품게 했다. 길게 나오려는 한숨을 억지로 삼켰다.
그는 손을 놓은 아이가 제 손가락을 오므렸다 펴는 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이는 라텍스 장갑을 신기하다는 듯 빤히 응시했다. 그러나 서준이 장갑을 벗어 주거나 하지 않자 입맛을 다시며 어른스럽게 작은 가슴을 폈다.
“여기라면 안전해요.”
“…고맙다.”
서준이 간신히 대꾸한 후 말을 이었다. 그는 이미 모든 기력을 소진했지만 기껏 도와준 아이에게 감사 인사를 하지 않을 정도로 인성에 문제가 있는 편은 아니었다. 적어도 3개월 전부터는 그런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는 간신히 미소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넌 여기서 뭐 하고 있니?”
“뭐겠어요. 보면 알잖아요.”
아이가 발로 옥수숫대를 차고는 불평을 터뜨리듯 말했다. 자신과 보비 외에는 썩 동정하지 않는 서준이 드물게 딱하다는 눈빛으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아이의 옷은 낡고 헤져 그간의 고생이 여실히 드러났다.
“길을 잃었구나? 이놈의 옥수수밭은 뭔…. 꼬마야, 바깥의 경고문을 잘 봤어야지. 규칙은 지키라고 있는 거야.”
서준이 자신도 안 지킨 규칙을 뻔뻔하게 지껄였다. 그의 탄식 섞인 꾸짖음에 아이가 신경질을 부렸다. 비죽거리는 입술이 새 부리처럼 뾰족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람? 난 길을 잃은 게 아니에요. 어디까지나 부모님을 잃어버린 거라고요. 이 둘은 정말, 확고하게 다른 거예요. 등치가 아니라고요.”
‘꼬맹이 주제에 어려운 말을 쓰는군….’
아이의 태연스러운 기세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곧 머리에도 피가 돌기 시작하자 뒤통수에 망치를 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 이 아이와 로렌 부부의 이야기는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로렌 부부의 상태가 썩 건강하지 못하다는 건 아무리 의학적 지식이 부족한 서준이라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최대한 안면 근육을 일그러뜨리지 않도록 애쓰며 질문을 했다. 움찔거리는 눈매 하며 염소처럼 덜덜 떨리는 목소리 탓에 썩 그럴듯한 품새는 아니었다.
“혹시 너희 부모님이 어머니 쪽은 날씬하고 콧날은 화살촉처럼 뾰족하고, 눈 색은 조금 투명한 느낌이었는데. 아버지는 턱이 각지시고 눈매가 부리부리한…. 그런 외모에 샌들을 신으셨어?”
서준은 로렌 부부의 갈라진 뱃가죽과 뭉그러진 잇몸을 머릿속에서 박박 지우며 그나마 멀쩡한 생김새를 건져 내 묘사했다. 그들의 외모적 특징 대부분은 훤히 열린 배 때문에 깔끔히 날아갔으나 다행히 몇몇 인상적인 부분은 기억났다.
그는 잔뜩 긴장해 아이의 앙다물린 입술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부디 아이가 로렌 부부의 자식이 아니기를 바랐다. 만약 그렇다면 서준에게 너희 부모님은 좀비와 같은 몰골이 되셨다는 서글픈 소식을 전해야 하는 책임이 생겨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한 막중한 임무는 그의 넓기만 하지 골밀도는 터무니없이 낮은 어깨뼈를 바스러뜨릴 게 분명했다.
서준은 내실 없는 어깨를 주무르며 아이의 대답을 기다렸다. 곧 아이가 서준과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힘차게 입을 열었다.
“아뇨? 제 부모님은 말이죠, 엄마는 안으면 폭신했고 아빠는 뼈밖에 안 만져졌어요. 그리고 제 아빠는 언제나 반들반들하게 닦은 구두를 신으셨다고요. 샌들이라니, 그런 일은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아, 그래?”
참나, 샌들이라니! 하고 똑같은 말을 종알거리는 아이를 보며 서준은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는 온몸의 뼈가 녹아내린 듯이 흐물흐물해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채신머리없이 구는 서준의 정수리에 열이 고였다. 태양은 언제나처럼 하늘 높이 걸려 있었다. 옥수수밭에 들어왔을 때와 한 치도 달라지지 않은 태양의 열기에 그는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해를 노려보았다가, 하나 남은 안구의 시력이 나빠질라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무슨 연유인지 서준의 시력은 외눈이 된 후로 좋아졌다. 시력은 나쁜 쪽을 따라간다지만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원래 안경과 콘택트렌즈를 사용했지만 인제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그는 부옇게 흐리지 않고 모든 것이 선명한 세상을 둘러보며 작게 숨을 쉬었다. 서준은 안구의 능력 향상이 사이코메트리의 부가적인 효과가 아닐까 하고 내심 점쳐 보았으나 안과에 가 물어볼 일도 아닌지라 그저 속으로 생각하기에 그쳤다.
혼자 부산을 떠는 서준을 보던 아이가 혀를 찼다. 아주 잠깐 시간을 보내 확신하기 어려웠으나 태도로 보아 무척 의젓한 성격을 가진 듯했다.
“아, 혹시 아까 당신을 쫓아다니던 사람들이 제 부모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건가요? 엄청나게 큰 착각을 하셨네요.”
“그래? 그럼 다행이지만….”
‘그 말인즉슨 이 너른 옥수수밭에 자식 찾으러 왔다 죽은 부부와 그들의 자식, 그리고 부모를 잃어버린 이 아이가 있는 건가? 하기야 이렇게 넓으니 별 기구한 사연을 가진 사람이 서넛쯤은 더 숨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
서준이 홀로 납득하는 사이 아이가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콧김을 뿜었다. 아이는 밀짚모자를 쓴 탓에 눈가에 그늘이 져 있었으나 큼직하게 벌어지는 입매 덕분에 표정을 구분하기가 어려운 편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저들은 살인 허수아비의 부하인데 어떻게 제 부모님이 되겠어요?”
“살인 허수아비?”
또 들린 기괴망측한 단어에 서준이 기가 막힌 기색을 숨기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환생한 이후 늘 느끼던 바이지만 미국의 땅은 너무나 광활했다. 도대체 우주에서 날아온 괴물과 연쇄 살인마에 이어 살인 허수아비라니? 이제는 무생물까지 괴인 열전에 끼어든단 말인가. 서준은 암담하기까지 한 심정으로 물어보았다.
“야, 꼬마야. 대체 그게 뭐니? 저 이상한… 좀비들도 그런 소릴 하던데.”
“좀비가 아니라 살인 허수아비의 부하라니까요. 그리고 나도 꼬마가 아니에요. 난 에이프릴이라고요!”
체크무늬 긴팔 셔츠에 멜빵바지를 입은 소년, 에이프릴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활짝 벌린 입 속, 어금니가 하나 빠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