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60)화 (60/156)

#059

“아이요?”

트레이시의 갈색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서준의 심장이 덜걱 흔들렸다.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간 것은 당연하게도 어린 미라였다. 기억이 섬광처럼 머릿속에서 번뜩거렸다. 서준이 떨리는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구조대에 연락은 해 보셨습니까?”

트레이시가 난감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차에서 급하게 내리느라 우리 둘 다 휴대 전화를 두고 내렸어요.”

“그거 정말 근심이 크시겠어요.”

“음, 걱정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렇게 놀랄 거 없어요. 여기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요. 그렇죠, 베일리?”

“맞아. 해가 높을 때 들어왔는데 아직도 날이 저렇게 쨍쨍한걸.”

로렌 부부는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치고는 태연하고 느긋했다. 심지어 트레이시는 한술 더 떠 이렇게 덧붙였다.

“아이들은 원래 말썽을 부리면서 크는걸요. 배가 고프면 언제 숨었냐는 듯 뻔뻔한 얼굴로 나타날지도 모르죠.”

베일리를 대할 때와는 전연 다른 목소리였다. 그녀는 냉담하기까지 한 태도로 자리에 없는 아이를 평했다. 새까만 눈동자가 트레이시와 베일리를 거듭 관찰했다. 아무리 보아도 살이 부드럽게 차오른 그들과 뼈밖에 남지 않은 미라는 전혀 연관이 없는 듯 보였다.

서준이 곧장 어린아이의 시신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것은 그답지 않게 나름대로 배려심을 발휘한 덕이었다.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에게 혹 괜한 걱정거리를 얹어 줄까 마음을 쓴 것이다. 그러나 로렌 부부는 저들끼리 태평하게 지껄이며 깔깔 소리 높여 웃었다.

“맞아, 그보다 이것 좀 먹어 봐요. 그러잖아도 우린 배가 너무 고파서 옥수수를 먹고 있었어요.”

“알이 정말 실하고 굵어. 자, 먹어 봐. 돌아다녔으면 슬슬 출출할 테지?”

베일리가 머리맡의 옥수수를 하나 뚝 따더니 껍질째 내밀었다. 이곳은 분명 사람이 관리하는 밭이었지만, 잎사귀로 싸인 안쪽에서는 설익은 야생의 향이 훅 피어올랐다.

“아니요,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 이거 함부로 먹어도 되는 건가요?”

서준은 옥수수의 뾰족한 끄트머리가 제 몸에 닿을까 봐 슬쩍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베일리가 큼직한 잎사귀를 벗겨 내더니 아드득 깨물었다. 그는 옥수수 알갱이를 씹어 먹으며 뻔뻔스럽게 대꾸했다.

“하지만 배가 고픈 걸 어쩌겠나? 이깟 옥수수가 무슨 대수라고. 그렇지, 트레이시?”

“맞아요. 우린 배가 고프고, 이곳에는 옥수수가 정말 끝없이 펼쳐져 있는걸요.”

양쪽 볼이 부풀도록 옥수수를 뜯던 트레이시가 냉큼 맞장구쳤다. 익히지 않은 열매는 알의 색이 마치 치아처럼 새하얗게 빛났다. 그녀가 잇몸을 드러내며 씩 웃자 입 속 가득히 이빨이 돋아난 듯했다. 알알이 그득한 구강에 섬찟한 기분이 들었다. 우물우물 씹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등줄기에서 한기가 흘렀다.

그는 도무지 로렌 부부가 이해되지 않았다. 아무리 아이가 스스로 뛰쳐나간 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다고 한들 옥수수밭은 대단히 장대했다. 몇 헥타르일지 감히 짐작조차 하기 어려운 땅은 방위의 구분이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이런 곳에서 자식을 잃어버렸는데 잠깐의 굶주림을 우선할 수 있나?

목울대가 크게 울렁거리고 승모근이 뻐근하게 아려 왔다. 고민의 시간은 짧았다. 그는 로렌 부부와 멀어지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서준이 안녕의 인사를 꺼내는 것보다 빠르게 선수를 친 사람이 있었다. 베일리가 꿀꺽 소리를 내며 턱 근처를 닦더니 입을 슬쩍 벌리듯이 가볍게 웃었다.

“그렇지, 아까 허수아비 이야기를 꺼내서 생각났는데 자네는 이 근방의 살인 허수아비라는 걸 아나?”

“살인… 허수아비요?”

그 허수아비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이름 한번 고약했다. 물론 명칭만으로도 견적이 나오기야 하다만, 대체 허수아비 주제에 어떻게 살인을 저지른단 말인가?

서준의 시선이 저절로 앞을 향했다. 마침 이곳에도 허수아비가 하나 있는데 머리는 헤진 헝겊이요, 두 손은 끝이 벌건 장갑이고, 이목구비는 펜으로 대강 휘갈겨 배치가 엉망인 낡은 인형에 불과했다. 미심쩍은 눈빛을 따라 고개를 돌린 베일리가 눈썹을 구부리고는 파안대소했다.

“하하! 내가 말한 허수아비가 설마 이걸까 봐 그래?”

“당신도 참, 맞을 수도 있죠.”

트레이시가 야릇한 눈웃음을 치며 끼어들었다. 만약 양손에 든 옥수수가 아니었다면 제법 묘한 분위기가 흘렀으리라. 그녀는 옥수수를 갉아 먹으며 허수아비를 가리켰다.

“예전에, 아주 예전에…. 마침 저렇게 생긴 허수아비가 있는 옥수수밭에 아이를 버린 부모가 있었다고 해요.”

“아이를 버렸다고요? 이런 곳에다가?”

목이 깔깔하게 말라붙은 것은 비단 수분이 충분치 못해서가 아니리라. 서준은 여전히 드높이 떠 있는 태양과 멍청한 얼굴로 웃는 허수아비, 그리고 눈이 피로할 만큼 빽빽이 자란 옥수수밭을 둘러보았다. 키 하나만은 자신할 자신조차 버거운 장소였다. 그런데 이런 광활한 밭에 아이를 버리다니, 죽으란 것과 매한가지였다.

서준은 트레이시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입꼬리가 올라간 표정은 분명 미소에 가까웠으나, 회색과 푸른색 중 딱 이런 색이라 정의하기 힘든 어중간한 빛깔의 눈동자는 몹시 냉랭했다. 트레이시는 화살촉처럼 뾰족한 콧날을 씰룩거리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 아이는 너무 이상했거든요. 세상에는 마냥 귀여운 애들만 있지 않아요. 오, 그렇지. 당신은 아직 젊어서 모를 테지만 별 이유도 없이 거북하게 구는 아이들이 종종 있답니다. 바짓가랑이를 잡아서 막상 이야기를 들으려 하니 시선은 엉뚱한 곳을 노려보는, 그런 애들 말이에요.”

섬뜩하지 않으냐며 트레이시가 과장되게 어깨를 떨었다. 서준은 괜히 속이 찔려 왔다. 툭하면 사실과 망상이 뒤섞인 헛소리를 내뱉는 그의 과거야말로 기분 나쁜 꼬맹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준은 이제 어른이었고 트레이시의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이해할 머리 또한 지녔다.

“고작 불쾌하다는 이유로 아이를 버렸다는 건가요? 그렇다면 그건 아이 잘못이 아닌 것 같은걸요.”

“잘 모르는 사람이 듣기로는 그럴 수도 있죠. 이해해요.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모를 법도 하니까. 그런데 세상일이라는 게 그렇게 단편적으로 보면 큰일 나거든? 베일리, 이 어린 청년에게 이야기를 해 줘요. 그 끔찍한 아이에 대해서요.”

베일리의 손에 있던 옥수수가 상당히 큰 소리를 내며 반으로 뚝 쪼개졌다. 심지가 부러지자 알갱이가 비산하며 바닥으로 통통 튀었다. 그는 게걸스럽게 그것을 긁어 입에 욱여넣었다. 흙과 새하얀 옥수수가 섞여 베일리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서준의 소스라치게 깜짝 놀라는 표정에 겸연쩍게 대꾸했다.

“아, 하도 배가 고파서 말이야. 그래, 트레이시가 한 이야기가 믿기지 않나?”

당장 서준에게 믿기지 않는 건 베일리의 기행이었다. 그러나 서준은 제 심정을 솔직하게 토로하는 대신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았다가 저 기인이 제 머리 가죽까지 뜯어 먹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만 들었다.

대신 그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모호한 턱짓을 했다. 그러자 베일리가 수긍하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흙 묻은 손으로 턱을 매만졌다. 서준은 대체 그가 무엇을 알았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하지만 우리는 정말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아이라고 하지만 사실 정확히 몇 살인지는 몰라. 어디 보자, 키는 내 무릎 아래까지나 겨우 올까?”

베일리가 자기 무릎을 두드렸다. 로렌 부부는 모두 서준보다 작았으나 겨울의 나뭇가지처럼 마른 트레이시와 달리 베일리는 팔뚝과 허벅지에 꽤 살과 근육이 붙은 체형이었다. 그런 베일리의 종아리는 알이 굵은 편이었다. 그가 검지를 들어 자신의 대퇴부를 일자로 죽 그어 보였다.

“이곳의 동맥이 중요하다는 건 많은 사람이 아는 점이지. 그리고 이곳에서 버림받은 아이 역시 그걸 잘 알았어. 상상이 가나? 아홉 살짜리 어린아이가 팔을 뻗어서 매달려 와. 하지만 그건 사탕을 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과 근육을 파헤쳐 핏줄을 끊어 놓기 위해서지.”

“흉기는 아무래도 좋았다고 해요. 손에 잡힌다면 그게 부엌의 칼이건, 공구함에서 굴러다니는 송곳이건, 하물며 끝이 날카로운 만년필이든 뭐든. 그 아이는 말이죠, 처음에는 순수한 궁금증 때문에 그런 일을 벌였어요. 개구리를 반으로 토막 내면 어떨까? 과학 시간의 해부만으로는 만족스럽지 않아. 나는 내장을 손으로 죽 잡아당기고 싶어. 개구리도 심장이 있는데, 간도 있을까? 폐도 있을까? 아, 궁금해라!”

트레이시가 노래하듯 말을 받았다. 나긋한 손길로 괴담 속 아이가 동물을 죽일 때마다 옥수수를 한 알씩 떼어 냈다.

“참새의 눈알을 송곳으로 찔러 뽑으면 어떨까? 시신경이 딸려 나올까? 토끼는 토악질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바늘을 먹여도 정말 그럴까? 특별한 아이의 특별한 호기심이었어요. 그리고 아이의 호기심이란 끝없죠…. 원래 사람은 작은 일에서부터 점점 큰일을 배워 나가는 법 아니겠어요.”

덜 여문 기가 남은 옥수수가 손톱 사이로 들어갔다. 알갱이가 으깨지며 시큼한 진액이 흘렀다. 탁한 눈동자에 서준의 창백한 얼굴이 비쳤다.

“마침내 칼날이 동물이 아니라 사람을 향했을 때, 아이의 부모는 아이를 버리기로 마음먹었죠. 1년이 지나도, 3년이 지나도, 5년이 지나도, 또 7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아이를 품기란 얼마나 어려웠겠어요? 그래요, 바로 이곳이요. 살인 허수아비가 있는 이 옥수수밭에.”

트레이시가 강조하듯 발음을 세게 내뱉었다.

“살인 허수아비의 유래는 정확하지 않아요. 하지만 분명한 건 그게 바로 이 땅에 존재한다는 사실뿐이죠. 허수아비는 버림받은 아이가 홀로 남을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렸어요. 봐요, 저렇게 바람결에 선들선들 흔들리며 기회를 엿봤죠. 살인 허수아비의 인내심은 억센 밧줄과 비슷했고, 배곯은 아이는 빠르게 쇠약해져 갔어요.”

툭, 툭, 툭. 옥수수 떨어지는 소리가 트레이시의 말소리와 겹쳤다. 베일리는 까드득거리며 잎에 싸인 옥수수를 손가락으로 닥닥 긁어 냈다. 소음을 배경 음악 삼아 들려주는 사이코패스의 성장담에 서준은 정신이 다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따가운 열기를 품은 바람이 갈퀴처럼 목덜미를 할퀴고 지나갔다. 텁텁한 기도를, 폐를 지나갔다.

옥수수밭, 미라화된 시체, 기이한 언동의 부부, 살인 허수아비…. 온통 기이한 일투성이였다.

“허수아비의 손에 들린 갈퀴가 보이죠? 바로 저것…. 살인 허수아비는 쓰러진 아이의 앞으로 다가와 저것으로 복부를 파헤쳤어요. 그거 알아요? 허수아비는 예의를 몰라서 옷도 안 벗기고 무작정 찢어발겼어요. 빨갛게 드러난 살에, 세상에! 그 핏줄이라니! 베일리, 베일리도 말해 줘요.”

서준이 무심코 자신의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납작하게 말라붙은 가죽은 얌전히 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마치 제가 작달막한 키의 어린이가 되어 허수아비 앞에 선 양 배가 아파졌다. 서준의 행동을 본 트레이시가 목청 높여 웃었다.

그녀의 재촉에 베일리가 선뜻 다가왔다. 그는 트레이시를 마주 껴안더니 목을 돌려 서준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빙글빙글 돌며 몸을 앞뒤로 갸우뚱거렸다.

“이 사람의 말이 맞아. 인간의 뱃가죽은 꽤 부드럽게 뚫린다는 걸 아나? 살인 허수아비는 활짝 열린 배에서 텅 빈 창자를 꺼내고는 제 갈퀴에 둘둘 감았지!”

“활짝 열려서, 아무것도 못 넣는 배는 홀쭉해져서, 하지만 장기는 인체 모형처럼 부위별로 나누어진 게 아니잖아요? 전부 연결된 부분이 있어서, 감자 줄기처럼 하나를 캐면 나머지가!”

베일리와 트레이시의 언어는 점점 체계가 사라지며 지리멸렬해졌다. 서준은 서로 배를 붙이고 춤추는 그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인제 보니 로렌 부부는 순 정신 이상자가 틀림없었다. 애당초 이들이 말한 잃어버린 자식이 존재하기는 할까?

더 고민할 시간도 아까웠다. 그는 즉시 로렌 부부와 헤어지기로 결심했다.

서준은 깔깔거리는 그들의 눈에 들지 않도록 조용히 뒷걸음질 쳤다. 그때 운동화 뒤꿈치에 바닥에 흩뿌려진 옥수수 알갱이가 짓밟혔다. 부드득 눌러 뭉그러지는 감촉에 놀라 서준의 외눈이 아래를 향했다. 그것의 색은 하얗지 않았다. 알알이 퍼진 알갱이에는 검붉은 액체가 묻어났다. 서준은 별생각 없이 그것을 주워 들었다.

이상했다. 트레이시와 베일리가 먹다가 실수로 떨어뜨린 옥수수에 왜 점성 있는 액체가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을까? 시선이 천천히 올라갔다. 로렌 부부의 발치에서 무릎과 허벅지, 샅과 아랫배…. 그래, 아랫배였다. 트레이시와 베일리가 한 몸처럼 서로 단단히 엉겨 붙은 그 부위. 왜 몰랐을까? 그들의 배는 세로로 길게 갈라져 있었다. 배 속은 어두컴컴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새까만 무저갱 같은 그곳에서 옥수수 한 알이 툭,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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