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8
소녀의 구조 요청을 듣겠노라는 기특한 결심은 옥수수밭에 들어온 지 3분 만에 사그라들었다. 멀리서 보아도 높이 자랐던 옥수수는 가까이 다가가니 이루 말하지 못할 정도로 키가 컸다. 서준도 어디 가서 눈높이가 낮다고 할 인사가 아니었건만, 이 옥수수란 놈들은 어디 평범한 사람이 분별없이 머리를 들이밀면 안 되는 작물이었다. 옥수수밭에 들어오자마자 만약을 대비해 문자로 신고도 해 놓았으니 차라리 지금이라도 돌아가 경찰이나 기다릴까, 하는 후회가 발꿈치를 끌어당길 즈음이었다.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빽빽이 자라난 옥수숫대 사이로 라디오에서 들었던 가냘픈 목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왔다. 차에서보다 더 크게 들리자 서준은 목을 빼고 이름도 모르는 소녀를 향해 크게 외쳤다.
“너, 거기 가만히 있어! 움직이지 말고!”
그는 인사하듯 흔들거리는 잎을 마구 헤치며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눈이 한쪽만 남으면서 거리감이 달라진 탓에 걸핏하면 넘어지기 일쑤였다. 덕분에 서준은 경보에 취미를 붙일 수밖에 없었다. 재바른 걸음으로 뺨을 스치는 잎사귀 사이를 걷던 서준의 귓가에 점점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메아리치듯 반복되는 비명과 함께 텁텁한 공기가 훅 불어왔다. 머리가 어지러워질 정도로 콧속을 가득히 채우던 진한 풀 내음이 사라지고 나타난 것은 둥근 공터였다. 지금까지 시야를 가리던 옥수수가 한 포기도 자라나지 않은 땅은 새까맸다. 흙이라기보다는 석탄을 잘게 부수어 놓은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였다. 그 중앙에 그것이 있었다.
검은색 반소매 티셔츠에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회색 칠부바지를 입은 아이였다. 아이는 공벌레처럼 몸을 웅크리고 옆으로 누워 있었다. 저 아이가 자신을 불렀던 걸까? 하지만 그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흐읍….”
틀어막힌 목구멍이 어색하게 숨을 내뱉었다. 이 검은 땅 위에서 살아 있는 사람은 오직 서준뿐이었다. 눈앞의 작은 시신을 아연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미라화된 시체는 죽은 지 오래되었다는 걸 알려 주듯 피부가 드러난 팔과 얼굴, 발목 등이 바싹 말라붙어 뼈의 윤곽이 도드라졌다. 체모는 목덜미 부근에서 묶은 짙은 고동색 머리카락 외에는 남지 않아, 텅 빈 안와와 살짝 열린 입 구멍만으로는 아이가 도대체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눈동자가 힐긋 아래로 내려갔다. 시체의 품에는 무전기가 안겨 있었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왼손의 주먹을 쥐지 못한 손가락이 고붓하게 휘어져 있었으며, 오른쪽 손목은 통째로 뜯겨 무전기를 잡을 손가락이 없었다. 서준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이제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있는 것이라고는 언제 죽었는지 어림잡아 헤아리기도 어려운 시체가 전부였다. 이해가 가는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뒷골을 잡아당기는 어떠한 감각이 분명하게 존재했다. 가스마스크를, 괴생명체 X를, 군인을 만났을 때 후각을 건드리던 지독한 피비린내….
낡은 운동화가 땅을 지익 끌었다. 서준은 몸을 둥글게 만 시체를 똑바로 응시하며 뒷걸음질 쳤다. 도저히 영문 모를 마당이기에 되레 종아리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옥수수잎이 귓불과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감촉이 섬찟했다. 하지만 외부의 자극은 정신을 각성시키는 촉진제로 작용했다. 그는 빠르게 옥수수를 헤치며 왔던 그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미쳤지, 괜히 들어왔어!’
머릿속에서 자학과 불평이 한데 뒤엉켰다. 다만 입으로는 그러한 오물 덩어리를 뱉어 내지 못했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빈약한 체력 탓에 밭은 숨을 내쉬기도 바빴다.
서준이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를 거칠게 뒤졌다. 차갑고 단단한 현대인의 필수품이 그의 손가락 끝에 걸렸다. 그러나 허벅지 한쪽에 묵직하게 자리 잡은 휴대 전화는 놀랍도록 쓸모없었다. 통화권 이탈 표시가 반짝거리는 배경 화면을 보자 그러잖아도 하얀 얼굴이 더더욱 창백해졌다.
그는 울상을 지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서준은 분명히 도로에서 직선에 가깝게 걸어왔다. 길을 걷던 마지막에 목소리를 듣고 방향을 아주 약간 틀기야 했으나 사실 차가 있던 쪽을 기억하니 그대로 죽 나가기만 하면 되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의 눈앞에는 온통 옥수수가 가득했다. 앞이며 뒤, 좌우를 구분할 필요도 없이 모두 높게 자란 옥수수로 빼곡했다. 더군다나 진한 초록빛 이파리가 팔이며 다리를 스쳐 움직임을 방해했다. 얇은 잎에 불과했으나 그것이 수천 장에 이르자 마치 족쇄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땀과 눈물이 얼굴에 자국을 남겼다. 축축하게 젖은 뺨을 손등으로 억세게 문지르며 서준은 들고 있던 재킷을 허리춤에 묶었다. 해가 중천에 걸려 몹시 뜨거웠다. 콧잔등을 찌푸린 서준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이건만 오늘따라 분통이 터졌다. 쨍쨍하게 빛을 흩뿌리는 태양을 향해 이를 갈던 서준의 눈길을 무언가가 잡아끌었다.
“아.”
허수아비였다.
***
허수아비를 기준으로 이동하기로 한 계획은 서준이 생각하기에 대단히 온당했다.
‘비록 내가 차에서 본 허수아비가 있던 방향이 동쪽인지 서쪽인지 북쪽인지 남쪽인지는 헷갈리지만….’
다른 수가 없으니 그나마 희망 비스름한 것에 매달려야 할 때였다. 설령 희망의 탈을 쓴 것이 낡아 빠진 헝겊 인형이라 해도.
운이 좋게도 허수아비는 쓸데없이 키만 큰 옥수수 사이에서도 빼어난 장신이었다. 허위허위 까치발을 들던 서준의 눈에 불쑥 튀어나온 허수아비의 머리통은 금방 발견되었다. 더위 먹은 개처럼 땀을 흘리던 입꼬리가 간신히 올라갔다.
그는 왼쪽 눈으로 허수아비의 머리통을 노려보듯 응시하며 발을 놀렸다. 운동화 밑바닥이 바작바작하게 자란 풀과 흙을 밟을 때마다 허리가 휘청거렸다. 처음에는 신기루가 아닐까 의심했던 허수아비는 실제적인 물체이기는 했는지 땀을 뺄수록 가까워졌다.
서준이 마침내 묵직하게 자란 옥수수의 성긴 틈으로 머리를 삐죽 내밀었다. 고소하면서도 진한 풀 내를 머금은 공기가 코를 찌르는 감각이 걷히고 맵싸한 향이 자리를 차지했다. 순간 서준의 머릿속에 조금 전 목격했던 작은 미라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의 운동화가 밟은 땅은 이전처럼 검지도, 옥수수로 발 디딜 틈이 없지도 않았다.
작물이 자라나지 않은 공간은 인위적이기보다는 어떠한 우연이 모여 생긴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그곳은 사람 대엿 명이 편안히 서 있는 게 가능한 넓이로, 사방이 막힌 건물이었다면 편협하다 느낄 만한 크기였으나 빼곡히 자라난 옥수수 탓에 답답한 와중에도 하늘만은 넓게 트여 제법 마음이 시원스러웠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다. 서준을 놀리듯 어린 미라가 따라서 온 것은 아니었다.
“아!”
동그랗게 벌린 입에서 감탄사인지 경악인지 모를 모음 하나가 튀어나왔다. 서준도 멈칫 몸이 굳어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트레이시, 이리 와.”
“오, 베일리. 조심해요.”
허수아비 아래에서 서성이던 남자가 여자를 제 등 뒤로 숨겼다. 그는 서준을 위아래로 흩어보며 경계했다. 서준 또한 한쪽 눈으로 그들을 꼼꼼히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살아 있는 듯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말이지.’
여자와 남자는 서로를 대하는 행동이 친근했으며 얼굴에서 건강한 혈색이 감돌았다. 옷차림은 평상복으로 도무지 농부다운 차림새는 아니었다. 특히 남자는 해변에서나 신을 법한 가벼운 샌들을 신고 있었다. 그가 각진 턱을 움직이자 녹음된 카세트테이프처럼 다부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거기 멈춰요. 그래, 더 다가오지 말고. 우리한테 무슨 볼일 있습니까?”
남자가 팔을 길게 뻗어 손바닥을 내밀었다. 잔뜩 힘을 준 잿빛 눈동자에 멀뚱하니 선 꺽다리가 비쳤다. 이쯤에서 서준은 자신의 외양을 새삼스럽게 자각했다. 한쪽 눈에는 안대를 하고 엉성하게 묶여 목뒤를 덮은 머리카락은 나돌아다니느라 헝클어졌다. 그런 몰골로 땀에 젖은 장신의 청년이 숨을 밭게 내쉬며 얼굴을 갑자기 불룩하게 쑥 내밀었다면….
엄청나게 수상했다!
하지만 서준이라고 할 말이 없지는 않았다. 그는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식은땀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별로 볼일은 없어요. 저는 이 허수아비를 찾아왔을 뿐입니다. 볼일들 보세요.”
처음에 느꼈던 살아 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안도감은 이미 안개처럼 흩어진 지 오래였다. 이들에게 나가는 길을 물으려던 마음을 고쳐먹었다. 초면에 적의를 드러내는 사람에게 물어 봤자 좋은 대답이 나올 리 만무했다. 서준은 불퉁한 표정으로 허수아비를 올려다보고, 다시 옥수수밭을 눈에 담았다. 그는 광속보다 빠르게 오만한 마음을 내적 쓰레기통에 쑤셔 넣었다.
“그런데 선생님들, 혹시 여기서 도로로 가는 방향을 아시나요? 혹여 아신다면 그대로 손가락만 접어 위치를 알려 주신다면 대단히 기쁘겠습니다.”
“…….”
그런데 서준의 공손하다 못해 비굴한 말을 들은 남자와 여자의 표정이 다소 묘했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더니 입가에 살며시 미소를 띠었다.
“뭐야, 길을 잃은 사람이었잖아. 우린 어쩌면 비슷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렇죠, 베일리?”
“트레이시, 당신은 늘 적절한 비유를 찾아내지. 바로 지금처럼!”
서준은 거울에 비친 듯 똑같은 웃음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설마하니 이 인간들까지 길을 잃은 거야? 도대체 경고판을 읽는 거야, 마는 거야.’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고, 서준은 저나 그들이 똑같다는 사실을 외면하면서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반면 여자와 남자는 지금까지의 태도를 버리고 서준에게 살갑게 다가왔다.
“설마 길을 잃은 사람을 만날 줄은 몰랐어요. 난 트레이시라고 해요. 트레이시 로렌. 이쪽은 내 남편이죠.”
“베일리 로렌일세.”
베일리가 손을 내밀며 씩 웃었다. 서준은 주저하며 손을 맞잡았다.
“만나서, 음, 반가워요. 서준이라고 합니다.”
얇은 라텍스 장갑 너머로 베일리의 굳은살이 박인 단단한 피부가 느껴졌다. 곧 베일리의 시선이 의문을 담고 아래를 향했다. 그의 눈빛이 무슨 뜻을 품었는지 어렴풋하게 짐작이 갔다. 사람들은 종종 그를 결벽증 환자로 오해하고는 했다. 물론 서준 본인은 그렇게까지 청결한 성미가 아니었지만 인제 와서 부정하기도 힘들었다.
만약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부인한다면 장갑은 왜 끼었느냐는 질문에 할 마땅한 변명거리도 준비하지 못했다. 나는 사물을 만져 기억을 읽어 내는 사이코-메트리랍니다. 지금도 장갑을 끼지 않았다면 당신이 오늘 아침에 먹은 식빵과 프림을 넣은 커피, 포도 세 알이 줄줄이 내 뇌를 폭행했겠지요!
심령, 주술, 초능력…. 분명 거짓말은 한 톨도 섞지 않았건만 서준은 상상만으로도 제가 천하의 사기꾼이 된 기분이 들어 어깨를 수그렸다. 너른 어깨가 좁게 모이자 그 품새 한번 참 볼품없었다. 베일리가 가볍게 손을 두어 번 흔들고는 트레이시에게 걸어갔다. 그가 귓속말하자 트레이시가 다가와 입을 열었다.
“우리는 길이 아니라 아이를 잃어버렸어요.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아이가 멀미를 심하게 해서 잠시 멈췄는데 갑자기 옥수수밭에 뛰어들었죠. 그래서 그 애를 찾으러 온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