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7
1. 살인 허수아비
모래와 먼지 냄새가 가라앉은 직선 도로에 트럭 하나가 매연을 뿜으며 지나갔다. 새파란 방수포로 화물칸을 덮어 놓은 보닛 형식 트럭의 운전석 창문은 반쯤 내려가, 안쪽에서부터 경쾌한 컨트리 음악이 새어 나왔다. 기타와 벤조, 바이올린 등 현악기 특유의 시원스러운 울림이 가수의 목소리와 뒤섞여 쨍그랑했다. 높게 올라가는 고음은 곧 클라이맥스에 다다를 듯했다. 마침내 고지를 앞둔 기타의 줄이 길게 떨렸다.
그러나 절정은 끝내 찾아오지 않았다. 라텍스 장갑을 낀 손이 무정하게도 라디오 채널을 아무렇게나 돌렸다. 기계음이 섞인 음악은 귀에 거슬리는 소음으로 변했다. 하지만 차의 주인은 자신이 돌린 게 볼륨 버튼인지 채널 버튼인지조차 구분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음울한 얼굴로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온갖 고뇌와 번뇌로 뭉쳐진 숨이 멀리 가지도 못하고 가슴께에서 흩어졌다.
아아, 생각을 멈춰야 한다. 하지만 하지 말라고 하면 더욱더 하게 되는 것이 두뇌라는 장기였다. 영사기가 돌아가듯 천천히 기억이 되살아났다.
“나와 섹스하려고 하기만 해 봐! 네 면상을 갈겨 버리겠어, 요한!”
“씨발…….”
자신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딴 헛소리를 지껄였던 걸까? 서준이 운전대에 이마를 찧으며 몸부림쳤다. 빠앙- 텅텅 빈 도로에 클랙슨이 길게 울렸다. 홧홧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차마 들기도 싫었다. 룸 미러에 비친 뺨과 귀가 새빨갛게 물들어 우스꽝스러웠다.
안대를 끼지 않은 왼쪽 눈의 시선이 방황하듯 이리저리 흔들렸다. 한쪽 눈은 이제 태어났을 때부터 함께한 사랑스러운 유리체가 아니었다. 그의 귀엽게 물컹거리는 젤 덩어리는 터져 나간 지 오래였다.
빈 곳을 차지한 의안의 촉감은 때때로 무척 차갑고, 어느 때는 너무 뜨겁게 느껴졌다. 아무리 성능이 뛰어나도 온도를 자체적으로 조절할 정도는 아니었으니 단순히 기분 문제였다. 그의 오감은 가끔 이런 착각을 하고는 했다.
서준은 왼손을 들어 같은 쪽 눈꺼풀을 가볍게 두드렸다. 안경도, 렌즈도 끼지 않았으나 보이는 모든 것이 선명했다. 선명하다 못해 본디 몰라야 할 것까지 비쳤다. 예를 들면 사랑에 빠진 청년의 소박한 모습 등이다.
“으그극….”
운전석에 앉아 배가 터진 개구리처럼 괴로워하며 몸을 비틀자 트럭 뒷바퀴가 튀며 덜컹거렸다. 엄지손톱만 한 자갈이 사방팔방 튕겼다. 서준은 의식적으로 생각을 돌렸다.
보라, 이 지저분한 도로를. 작은 돌멩이며 바람에 떠밀려 굴러다니는 회전초까지 입이 찢어져도 깨끗하다 말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재작년 개통한 주간 고속 도로 제 4-4-4호선은 사소한 일에 신경을 쓰다가는 통행이 불가능했다. 4-4-4호선은 정부의 주도하에 연결된 고속 도로로, 44호선이나 44호선의 보조선인 444호선과는 달랐다. 말이 개통이지, 새롭게 길을 터 낸 게 아니라 기존에 방치되었던 도로를 정비해 연결했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그래서인지 길마다 편차가 심한 편이었다.
특히 서준의 오랜 드림 카가 지나는 오리건주와 네바다주 사이는 편도 2차선 도로인 의미가 있나 싶어질 정도로 너저분하고 한산했다. 얕은 지식과 헛된 안목으로 평가를 하자면 4-4-4호선은 제정하기 이전이나 이후나 엇비슷하게 사람들의 외면을 받을 터였다. 애초에 서준도 톰팃톳에서 가깝고 미국 횡단에 편리하지 않았다면 선택하지 않았을 길이었다.
낡아 빠진 트럭이 비틀거리건 말건 넓게 펼쳐진 옥수수밭을 낀 도로는 쓸쓸할 만치 적막했다. 간신히 법정 규범을 지키는 수준의 미숙한 실력을 욕할 사람이 없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고요했다. 그리고 상념은 이럴 때 끼어들기 마련이다. 수치스러운 역사는 혼자일 때 더욱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서준은 요한의 입술이 인화지에 닿던 순간을 수도 없이 반복해서 떠올렸다. 신비로운 초능력의 발화는 갑작스러웠다.
쟁반을 들고 서 있던 요한의 멍청하게 굳은 얼굴과 손가락 사이로 비벼지던 사진의 맨들맨들한 감촉, 괴성을 지르며 집까지 뛰어갔던 그날.
요한이 바라는 게 고작해야 소박한 입맞춤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의 부끄러움이란!
뇌의 주름을 박박 문대고 깨끗하게 펴 기억에서 지워 버리고 싶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동시에 자신이 새까만 밤에 무작정 내뱉은 말이 귓가에 달라붙었다. 풀벌레가 피부를 깨물었던가? 혹은 차가운 밤바람이 이성을 얼렸었나? 도대체 왜 하필 그 순간에 그토록 상스러운 언어를 사용했을까? 아마 제정신이 아니었겠지?
무수한 의문이 거품처럼 떠올랐다. 안구가 하나 빈 자리만큼 늘어난 공간에 부말이 가득 채워졌다. 그리고 마지막에 부풀어 오른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인생이란 이런 부끄러움을 껴안고 살아야 하나? 짧은 고민이었고, 결론은 그보다 더욱 짧았다.
그래서 탈주했다.
톰팃톳이라는 동네에서, 요한이라는 남자에게서.
서준은 사유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를 행동하게 만드는 건 단편적인 사고방식이었다. 공포 영화의 세상에 빙의했다 믿으며 크리스티나와 거리를 둔 맹목이 그것을 증명했다.
약간은 더운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고 사라졌다. 모래 섞인 미풍은 염료가 벗겨지기 시작한 트럭에 한 줄기 정취를 더할 터였다. 서준은 운전대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부모님의 도움으로 마련한 트럭은 그가 상상 속에서나 몰던 것과 완벽하게 같았다. 얄궂게도 서준이 떠나자고 마음먹자 모든 준비가 손쉽게 이루어졌다.
언제나 톰팃톳을 벗어나 멀리 사라지겠다는 바람을 가슴 한편에 고이 간직하고 살았다. 봄날 흐드러지게 핀 꽃의 냄새를 맡을 때에도, 여름철 뙤약볕을 피해 나무 그늘로 기어들어 갈 때에도, 가을의 낙엽을 밟을 때에도, 겨울밤 소복이 쌓인 눈에 난 철새의 발자국을 볼 때에도.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해 그간 적어 둔 101가지 이유는 다섯 번째 이유를 말하기도 전에 허락이 떨어졌다. 그가 짐작하기로는 시기적절하게 유괴범의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것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인 듯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안전을 위해 숨어 들어온 톰팃톳에서 서준이 살해당할 뻔했다는 경악스러운 현실 또한 등을 떠밀었을 터이다. 그리하여 서준은 오랜 시간 꿈꾸었던 드림 카와 통장, 약간의 현금과 곱게 포장한 소포를 지니고 여행길에 올랐다.
글로브 박스에서 사탕을 한 움큼 꺼낸 그가 현란한 손놀림으로 껍질을 까 혓바닥 위로 퉁겼다.
“사탕보다 달콤한 이름, 그건 바로 자유라네.”
안정적으로 착지한 사탕을 한쪽 볼이 불룩해지도록 넣은 서준이 세기말의 청춘스타처럼 한껏 흥에 취해 구시렁거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제법 즐겁고 상쾌해졌다. 비록 블루종 재킷에 물 빠진 청바지, 목덜미가 늘어난 티셔츠에 앞코의 본래 색이 어떠했는지 이제 알 길조차 없는 운동화는 봄날의 새순보다는 차라리 마른 검불이 굴러다니는 가을이 어울렸으나 마음만은 방년이었다.
씰룩거리며 입꼬리를 올리자 룸 미러에 가식적인 면상이 비쳤다. 올라갔던 입 끝이 빠르게 내려왔다. 변덕이 죽 끓듯 기분 또한 그러했다. 유쾌함의 끄트머리에 찝찝한 감정이 따라붙었다.
‘적어도 그 발언…. 그게 기억에서 휘발되기 전까지는 돌아가지 말아야지.’
거울을 본 김에 건치를 꼼꼼히 확인하던 서준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얼굴을 굳히고 결심했다. 이 사이로 스며든 과즙의 들쩍지근함처럼 징글맞게 들러붙은 기억 따위 근성으로 이겨 내야 옳았다. 이왕 해방을 즐기자 마음먹었는데 깊이 생각할수록 손해 아닌가?
‘믿으면 우주가 도와준다. 나의 회색 뇌세포야, 힘을 내.’
자기 세뇌를 빠르게 끝마친 서준이 라디오 버튼을 다시금 돌렸다. 하지만 오디오에서 흘러나온 것은 남자 가수의 경쾌한 비브라토가 아니었다. 삐이이이익-! 고막을 잡아 뜯듯 난폭한 잡음이 수챗구멍처럼 작은 스피커에서 울렸다.
“크윽!”
트럭이 직각으로 꺾이며 갓길에서 멈추어 섰다. 울퉁불퉁한 도로 탓에 차 뒷바퀴가 거칠게 튀었다. 서준은 왼쪽 눈을 연신 깜빡거리며 스피커를 보았다. 그곳에서 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말소리가 드문드문 흘러나왔다.
- “도와주…요…여기…나가고……가…옥수수밭…제발…아아악!”
앳된 소녀의 목소리와 기계음이 섞인 비명이 오디오와 창 바깥에서 동시에 울리다가 뚝 끊겼다.
옥수수밭. 멍하니 라디오를 바라보던 서준이 퍼뜩 고개를 들어 창 바깥을 응시했다. 마른 입술이 옥수수밭, 하고 중얼거렸다.
도로의 오른쪽 옆으로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밭의 싱그러운 향기가 창문으로 불어왔다. 왼쪽 길가에는 너른 벌판이 있었고, 서준의 트럭 앞에는 낡은 봉고차가 서 있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길게 자라난 옥수숫대의 녹색 이파리가 눈이 부시도록 선명했다. 멀리서 사락사락 풀잎 부대끼는 소리가 몹시 한가로이 느껴졌다. 한낮이라 전등을 따로 켜지 않은 트럭의 운전석에는 자연스레 그늘이 져 높이 솟아오른 태양광이 더없이 찬란했다. 새 울음조차 없는, 평화로운 풍경이 따가운 햇볕 아래 끝없이 퍼져 있었다. 잘못 맞춘 주파수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었다. 뚜렷하게 들렸던 비명이 의심스러워질 정도로.
어쩌면, 영화의 광고일지도 몰랐다.
사실, 어느 아이의 장난일지도 몰랐다.
혹은, 한낮의 착각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서준은 새된 비명에서 이미 크리스티나를 떠올리고 말았다. 평소에도 말을 안 듣던 골통이 멋대로 의지로 가득 차 있던 눈빛을 되살렸다.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타인의 목숨을 구하려 들던 그녀의 피로하고 결연하던 얼굴은 왼쪽 망막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그는 이제 수치가 무엇인지 안다. 거룩한 행위를 코앞에서 목격했으니 모른다면 세상에 다시 없을 천치이거나, 정신머리에 문제가 있는 놈이 틀림없었다.
물론 서준은 스스로 이기적으로 살아왔고, 그러한 성미가 뼛속 깊이 스며들었음을 알았다. 감히 크리스티나의 고결한 영혼을 무작정 따라 하겠다는 마음은 언감생심 품지도 않았다. 마땅히 숭배, 찬양, 칭송해야 마땅할 성현을 어찌 범인에 불과한 제가 함부로 모사하려 들까?
다만 도움을 구하는 아이를 이끄는 정도는 저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어려운 일을 하려는 게 아니었다. 서준은 휴대 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차에서 내렸다. 오후의 열기를 품은 아스팔트 바닥에서 알알한 열기가 올라왔다. 후덥지근한 공기와 밝은 햇볕이 눈꺼풀 위를 덥혔다.
가볍게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옥수수밭을 지키는 건 저 멀찍이 머리통만 보이는 허수아비가 전부였다. 아니, 전부라 부르기에는 눈길을 끄는 물건이 하나 있었다. 녹이 슨 새빨간 경고판이 도로와 옥수수밭의 경계선에 아무렇게나 꽂혀 있었다. 흰 페인트로 적은 글자는 형편없이 흘러내려 뜻을 알아내기조차 몹시 힘들었다.
블루종 재킷을 벗어 팔뚝에 둘둘 감던 서준의 다리가 멈칫 굳었다. 그는 메마른 입술에 침을 묻히며 중얼거렸다.
“경고, 들어가지 마시오….”
끝내주게 불길한 징조 같았다. 하지만 서준은 곧 고개를 흔들며 예감 따위를 머리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이제 그는 미래를 알지 못한다. 더군다나 서준에게는 저런 형식의 철판에 얽힌 불우한 기억이 있었다. 부정적인 방향으로 생각이 흐르는 것이야 자연스러웠다. 그렇게 자신을 북돋우며 침을 꼴깍 삼켰다.
환한 대낮이었다. 운동화가 옥수수밭의 흙 땅을 밟았다. 이윽고 길쭉한 몸뚱이가 무성한 잎새 사이로 사라졌다.
새 울음이나 풀벌레 우는 소리는 여전히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쯤 시간이 흐른 뒤, 주인 없는 트럭의 라디오에서 명랑한 컨트리 음악이 미끄러지듯 새어 나왔다. 반쯤 열린 창문 틈으로 나온 가수의 발랄한 노랫소리가 더운 피비린내를 품은 바람과 뒤섞였다. 텁텁한 바람결에 운전석 룸 미러의 열쇠고리가 달랑달랑 흔들렸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귀여운 곰 인형이 달린 열쇠고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