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6
“이 공구함을 받을 때도 나는 우리가 무슨 스파이 영화 찍는 줄 알았어. 그래도 요즘은 시들해진 모양이지만.”
크리스티나를 향한 주목은 어마어마했다. 만약 리처드의 시신이 어떤 모습인지 누군가 언론에 흘리지 않았다면 더한 일이 생겼을지도 몰랐다. 참혹하고도 괴이쩍은 형상의 시체는 살아 있는 미녀보다 더욱 빠르게 시선을 사로잡았다. 슬슬 창 바깥으로 낯익은 지붕이 스쳐 지나갔다.
“리처드 장례식을 늦게 했어. 브래스는 그래도 목만 돌리면 괜찮은데, 리처드는 이것저것 채울 게 많아서 복원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장의사가 제대로 문단속을 안 했는지 기자가 멋대로 들어왔대. 아주 열정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이었나 봐.”
요한이 비꼬듯 말했다. 안타깝게도 기자의 윤리 의식과 정열은 고르게 분포하지 않았다. 그는 몰래 찍은 사진 수십 장 중 엄선한 사진 다섯 장을 공개했다. 파란이 일기에 충분한 개수였다.
“그래서, 이런….”
혀를 찬 그는 속도를 줄였다. 주택 앞 도로에 사람이 몰려 있었다. 서준의 하나뿐인 눈이 둥그레졌다. 그는 톰팃톳에서 살아오며 이렇게 왁자지껄한 인파를 본 적이 손에 꼽았다. 요한은 질린다는 표정으로 내뱉듯 말했다.
“새로운 이웃과 드디어 만날 걸 환영해, 준아. 전국의 음모론자, 인터넷 방송인, 조 룸펠슈틸츠헨 감독의 얼마 없는 팬이야.”
“이야….”
직접 챙겨 온 카메라를 보고 진짜 기자라도 되는 양 익살스럽게 행동하는 사람, 피켓을 들고 아우성치는 사람, 크리스티나와 리처드의 집 앞은 아주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이게 한풀 꺾인 거라고?”
“어제까진 그랬는데, 오늘 토요일이라고 또 몰려왔나 봐.”
“휴일이면 집에서 발이나 닦고 잠이나 잘 것이지.”
남의 일처럼 혀를 내두르던 서준은 더럭 겁이 났다. 자신의 집 앞에도 장사통이 펼쳐진 게 아닐까? 부모님이나 요한이 별말 없는 걸 보면 괜찮을 듯싶었지만 한번 생긴 불안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때 요한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맞다. 준아,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 집에서 저녁 먹고 가. 너희 부모님이 집에 챙겨 둔 게 없다고 고민하시더라.”
네 밥까지 챙기겠다고 말씀드렸어. 푸른 눈이 옆자리를 힐끔거렸다. 수줍어하면서도 기대에 찬 기색이 역력했다.
서준은 일순 타산적인 마음을 품었던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허기와 안락함, 안전까지 보장하는 요한의 제안을 거절하기란 어려웠다. 그는 일부러 딴청을 부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뭐어.”
“정말?”
요한이 빠르게 기뻐했다. 그의 희희낙락하는 모습에 문득 서준은 요한의 집에 들어간 적이 없다는 걸 새삼스럽게 자각했다. 크리스티나와 그녀의 친구들에게 가능한 한 거리를 두려 했던 탓이다. 되새겨 보면 멍청한 짓거리였다.
“…….”
갑작스럽게 부끄러움이 몰려와 서준은 입술을 비죽거리며 자동차 바깥을 기웃거렸다. 괜히 외지인의 얼굴을 기억이라도 할 듯이 남은 눈을 부릅떠 노려보았다. 사실 그들의 생김새는 머릿속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지만, 적어도 겉보기로는 그러했다. 그리고 그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톰팃톳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를 물어본다면 누구나 크리스티나 툴박스를, 제일 잘생긴 청년이라면 요한 젠틸을 꼽을 터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여쁜 소년을 고르라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헨리 실버를 택할 것이다.
성숙하지 못한 육체는 부드럽고 탄력적인 지방과 근육이 조화로웠고 작은 얼굴에 들어간 이목구비는 하나하나 심혈을 기울여 깎아 낸 조각처럼 훌륭했다. 갸름한 턱과 선홍빛 입술, 유려한 곡선으로 이어지는 인중과 날렵한 콧대, 비취색의 투명하고 아름다운 눈동자, 그리고 윤기 흐르는 피부와 달빛을 쏟아부은 듯 산들거리는 머리카락.
기묘한 출생에도 그의 미모는 가려지지 않았다. 서준은 우연히 마주친 헨리와 잠시 눈을 맞췄다.
야구 모자를 깊이 눌러 쓴 소년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소녀처럼 보드라운 입술은 저의 집 앞에 모인 군중에게 욕설을 내뱉지도, 소문처럼 섬뜩한 웃음을 짓지도 않았다.
그는 다만 자신의 어머니를 부축했다. 팔과 다리가 가느다란 미인으로 소문 난 실버 부인은 초췌한 안색으로 둘째 아들에게 몸을 반쯤 기댄 채 서 있었다. 그녀 또한 얼굴을 가리기 위함인지 챙이 넓은 모자를 썼다.
이윽고 차가 움직여 그들을 지나쳤다. 서준은 한참이 지나서야 헨리가 가볍게 눈인사를 했구나, 하고 깨달았다. 뒤를 돌아봐도 작은 인영이 흐릿하게 보일 뿐 인사를 돌려주기에는 늦은 후였다.
요한의 집은 대단한 것도 없었다. 서준은 가슬가슬한 융단을 밟으며 거실을 둘러보았다. 가구의 위치는 다르지만, 전체적인 얼개는 새롭지 않았다.
“우리 집하고 구조는 비슷하구나.”
“크리스티나네 집도 비슷해. 이 구역 집이 다 엇비슷할걸? 아, 우리 부모님은 크리스티나 보러 가셨어. 아무래도 상황이 가장 심각하니까 상의할 게 있다나 봐. 내가 어제 잠깐 들었는데 고소할 거 같아.”
“으음.”
차고에 자동차를 주차한 뒤 그들은 요한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준은 매번 바깥만 슬쩍슬쩍 쳐다보던 집에 들어간다는 사실에 약간 가슴이 뛰었으나, 기대감인지 뭔지 모를 감정은 금방 가라앉았다. 서준의 가방을 대신 든 요한은 그대로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가 냉장고를 열며 외쳤다.
“준아, 저녁 먹기 전에 간단하게 단백질셰이크 한잔할래?”
두리번거리며 집안을 구경하던 서준의 표정이 대번에 구겨졌다. 질색하는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고개를 돌리자 요한이 아일랜드 탁자에 몸을 기대고는 짓궂게 웃고 있었다.
“장난이야. 물론 나는 네가 이 맛을 알아주면 좋겠지만…. 오렌지주스는 괜찮지? 천연-유기농-무설탕-과즙-백 퍼센트야.”
“좋아.”
“일단 저녁 먹으려면 시간 좀 남았으니까 간식거리 챙겨서 갈게. 먼저 내 방에 가 있어, 준아. 계단 올라가서 오른쪽 방이야.”
“내가 멋대로 들어가도 괜찮겠어?”
“응. 난 맨날 상상했는걸. 있지, 준아. 네가 우리 집에 와서 나는 정말 좋아.”
고른 이를 드러내고 씩 웃는 요한은 정말 기뻐 보였다. 순수한 애정의 표시에 서준은 목구멍 안쪽의 살이 익어 버릴 듯 뜨거워졌다. 그는 허둥지둥 계단을 뛰듯이 올라갔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시야 탓에 구를 뻔한 몸뚱이를 겨우 2층으로 옮겼다.
요한의 방은 평범했다. 책상과 침대, 책장과 옷장 등의 가구가 있었고 그들 또래의 학생이 가질 법한 물건이 적당히 정돈되어 있었다. 서준은 자신의 너저분한 방을 떠올리다가 그만뒀다. 심지어 요한은 침대의 이불도 깔끔하게 개어 놓았다.
“어?”
그런데 단정하게 접어 포갠 이불 아래에 비죽 튀어나온 모서리가 보였다. 무심코 끄집어내자 곧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앨범이었다.
서준은 침대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주저앉아 앨범을 펼쳤다. 요한을 위주로 찍은 사진이 빼곡히 들어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단정한 외모였던 요한은 지금과는 달리 의젓한 표정이 대부분이라 귀여우면서 우스웠다.
아주 가까이 있으면서 알지 못했던 요한의 다양한 모습이 이 속에 있었다. 핼러윈 분장을 한 요한, 크리스티나와 머리를 맞대고 잠든 요한, 터진 인형을 꿰매는 요한, 윌리엄과 어깨동무를 하고 환하게 웃는 요한, 손에 페인트 통과 벽돌을 든 요한…. 점차 성장하는 요한의 사진을 넘기던 손이 멈칫 굳었다. 백설 공주 역의 서준과 왕자 요한의 사진이었다.
함께 빙글빙글 돌던 도중 찍혔는지 사진의 초점이 살짝 흐렸다. 손때가 탄 듯 아래쪽의 색이 바래 있었다. 입 안의 침이 바짝 말랐다. 투명한 비닐 안쪽에 있는 사진 한 장이 갑자기 너무나 신경 쓰였다. 손가락이 비닐을 벌리고 사진을 잡았다. 비닐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고막을 시끄럽게 때렸다. 마침내 사진을 꺼냈을 때였다.
“헉!”
쿵, 쿵, 쿵. 심장이 입 바깥으로 튀어나올 듯 거세게 박동했다. 이마에서, 목에서, 등에서, 전신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손과 발이 떨리고 감각이 뒤죽박죽 뒤섞였다. 시각과 미각이 바뀌고, 후각과 청각이 교체되고, 촉각과 시각이 다시 치환됐다. 끔찍한 격통조차 다른 감각으로 분산되었다가 합쳐졌다. 그리고 모든 고통이 머리로 모여들었다. 머리에서 뇌로, 뇌에서 눈으로….
몸이 옆으로 쓰러졌으나 자각하지 못했다. 이미 시야는 새까맣게 물들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죽는 걸까? 이렇게나 갑작스럽게?
온몸이 뜨겁고 차가웠다. 체온이 오르내리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던 서준의 눈앞이 난데없이 밝아졌다. 멀쩡한 왼쪽 눈만이 아니었다. 이제 보이지 않아야 타당한 오른쪽 시야 또한 넓게 퍼졌다. 빛이 번지듯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방. 방이다. 깔끔하게 정돈된 요한의 방. 그곳에 요한이 들어왔다. 지금보다 앳된 얼굴이었다. 그는 책장에서 익숙하게 앨범을 뽑아 들었다. 요한의 손은 목표가 뚜렷했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눈 한번 돌리지 않고 단 한 장의 사진을 꺼냈다. 요한의 뺨에 붉은 기가 더해졌다. 요한은 주변을 잠시 둘러보더니, 사진에 천천히 입술을….
“준아! 무슨 일이야!”
문이 거세게 열리면서 요한이 뛰어 들어왔다. 서준은 눈을 깜빡거렸다. 여전히 왼쪽 눈밖에 움직이지 않았다. 누워서 보는 요한은 무척 거대했다. 그는 오렌지주스가 담긴 유리컵과 롤케이크가 담긴 쟁반을 들고 숨을 내뱉었다. 서준은 그의 입술만 빤히 바라보았다.
“너, 너어.”
“어, 응. 준아, 왜? 쓰러진 거야? 어디 아파? 다시 병원 갈래?”
“너! 너! 요한!”
“응? 나?”
“요한 젠틸!”
서준의 비명 같은 고함이 온 집 안을 울렸다. 그의 삶은 온통 이상한 일투성이였다. 하지만 서준에게 중요한 건 이미 죽어 버린 괴생명체 X나 가스마스크, 정부의 음모 따위가 아니었다. 지금 그에게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오직 요한의 입술이었다.
***
달조차 숨어 버린 밤이었다. 하몽 캠프장은 군인의 엄중한 감시하에 허락받지 않은 사람은 그 누구도 들어오지 못했다. 기자며 음모론자에게 훌륭한 소재를 던져 주는 셈이었으나 군대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나 끔찍한 사건이 연달아 벌어진 이곳에 그림자처럼 스며든 존재가 있었다.
별처럼 반짝이는 미소년 헨리였다. 그가 걸을 때마다 군인이 하나둘 쓰러지고 기계가 망가졌다. 기니피그를 품에 안은 헨리는 옅게 미소 지으며 그들을 지나쳤다.
그의 모양 좋은 발이 풀을 밟았다. 사람의 무게만큼 짓눌려야 할 흙과 생초는 밟기 전과 똑같았다. 헨리는 사뿐하게 호수로 걸어갔다. 어두운 밤의 호수는 새까만 기름처럼 보였다.
헨리는 호수 속을 들여다보듯 허리를 숙였다. 가슴팍에 눌린 기니피그가 키익 울었다. 곧 쪼그라든 촉수 하나가 힘겹게 호숫가로 기어 나왔다. 거대한 몸뚱이를 잃어버린 촉수는 초라하고 변변찮았다. 특히 기름기가 번들거리던 표면은 검게 탄 자국이 군데군데 남아 엉망이었다.
헨리의 고운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그는 촉수를 내려다보며 탓하듯 말했다.
“지금 그게 할 말이에요? 식사에 초대받았는데 감금당하고, 겨우 탈출했는데 번식 상대를 발견해서 구애했다고요? 정신 차려요. 그는 당신의 번식 대상이 아니에요.”
헨리의 발이 촉수를 꾹 짓눌렀다. 새하얀 얼굴과 찬란한 미모는 낮의 소년과 동일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그의 눈은 기이하게도 여러 빛깔로 변화했다. 그는 새치름하게 말을 이었다.
“내 냄새가 묻은 형을 동류로 착각하질 않나, 멋대로 먹어 버리지 않나…. 당신의 정소관이 도둑맞은 걸 나한테 칭얼거리지 말아요. 대체 나이가 몇이에요? 부모님이 걱정도 안 하시던가요? 우리 엄마는 내가 조금만 늦게 돌아다녀도 무척 염려하신다고요. 이번에 형도 없어져서 마음고생이 심하신데.”
키익! 기니피그가 맞장구치듯 사납게 울자 애써 부풀었던 촉수가 도로 쪼그라들었다.
“자, 서준을 건드리지 말고 인제 그만 돌아가요.”
촉수가 시무룩하게 기울어졌다. 헨리는 묘한 미소를 걸치고는 하늘을 보았다. 달은 구름에 가려졌으나 무수히 빛나는 별이 있었다.
분명 정부는 1964년, 레드 레이크 캠프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안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들조차 모르는 신비가 별의 수만큼 존재했다.
〈2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