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54)화 (54/156)

#054

그는 병실 침대의 난간에 어깨를 기울인 뒤 팔을 뻗었다. 붕대에 감긴 손을 허우적거리자 이목을 집중시키기가 무척이나 간단했다. 자식이 뒤집힌 애벌레처럼 바르작거리자 서준의 부모가 황급히 그를 침대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아무래도 불편한 몸으로 움직이려다 실수로 떨어지는 줄 안 모양이었다.

까딱 잘못하면 뭘 말해 보기도 전에 이불에 압사당할 판국이었다. 그가 큰 소리를 내기 전에 낯선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 마침 일어났군요. 잘됐습니다. 그러잖아도 언제쯤 말하나, 예, 그랬거든요. 아무래도 시간이란 게…. 그렇잖습니까?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시간도 마찬가지죠.”

혼자 횡설수설하는데 손이나 팔을 휘두르는 동작이 커 사람이 점잖지 못했다. 게다가 말하는 내용 또한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서준이 눈을 감고 있던 동안 부모는 남자의 태도에 익숙해졌는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들은 서준에게 충고, 혹은 조언하고픈 눈치였지만 남자가 한발 더 빨랐다. 그는 서준의 부모를 밀듯이 방에서 내보냈다.

서준의 하나뿐인 눈초리가 가느스름해졌다. 붕대로 감긴 눈을 차치한다 쳐도 그는 성한 곳을 찾아보기 힘든 환자였다. 더군다나 부모의 말에 따르면, 유년기부터 유괴의 위협에서 시달리기까지 했다. 그런 자식을 두고 나간다는 것은 이 남자가 보기와는 달리 대단한 수완가거나, 위험한 자일 가능성이 컸다….

‘협박당한 표정은 아니긴 했는데.’

갸름한 턱이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서준은 이제 자신의 눈썰미에 썩 신뢰가 가지 않았다. 말해 무엇 하랴? 그는 부끄러울 정도로 한평생 착각에 빠져 살아왔다.

그 때문에 서준은 은근하고도 떨떠름한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불쑥 오른손을 내밀었다. 악수라도 하자는 듯 손바닥을 뻣뻣하게 펼친 채였다. 그는 서준이 미처 그 손을 잡기도 전에 마술처럼 소매에서 명함을 꺼냈다. 신묘한 손놀림이었다.

서준이 그것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희뿌옇게 흐린 시야로는 글자를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깨어나서 별일이 많아 잠시 잊고 있었지만 현재 그는 렌즈는 고사하고 안경조차 쓰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눈알이 하나뿐이었다.

물리적인 의미로 깜깜해진 앞날에 잠시 아득한 기분을 느끼며 지긋하게 명함을 노려보고 있자니 남자가 덥석 손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그 탓에 서준의 방아깨비 같은 몸뚱이가 휘청거렸다.

“봤다시피, 아, 잘 안 보였을 수도 있겠지만. 에리스 에릭이야. 편하게 에리스라고 불러. 난 군인도 아닌 학생한테 계급으로 불리는 건, 뭐랄까, 부끄럽거든. 친구들은 에리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난 솔직히 별로야. 그러면 성을 부르는지 이름을 부르는지 영 헷갈리잖아.”

“아, 예.”

에리스는 수다스러운 남자였다. 그리고 서준은 그의 얼굴에서 차츰 낯익은 점을 발견했다. 힘겹게 자애를 표방하던 표정과 안심하라고 말하지만 막상 끄트머리가 떨리던 목소리. 프레드를 죽인 후 찾아온 군인이었다.

돌연 옆구리에서 내장을 쏟다 끝내 머리가 날아가 죽은 군인이 눈꺼풀 안쪽으로 달라붙었다. 뻐꾸기, 뱁새, 참새를 중얼거리며 동료가 함께 있다고 중얼거리던 군인의 기괴한 미소가 에리스와 겹쳐졌다.

서준의 눈앞에 펼쳐진 정경은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 습한 곰팡이가 피어난 벽, 축축한 비린내가 넘실거리는 먼지투성이 구 합숙소였다. 순간 숨이 턱 막히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간 숱하게 보았던 환상처럼 선명한 색을 지닌 풍경이 그의 망막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서준은 불길한 상상에 오래 잠겨 있지 못했다. 에리스의 태평한 목소리가 그를 현실로 끄집어냈다.

“우리 이제 진지한 이야기를 좀 해 보자. 사실 너 말고는 다 말이 끝났거든.”

“진지한 이야기요?”

“흠.”

숙였던 고개를 들자 깨끗한 병실과 입술이 댓 발은 튀어나온 심술궂은 하악이 눈에 들어왔다. 에리스는 꽤 철없는 사람으로 비쳤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여는 순간 서준은 자신도 모르게 등을 곧게 폈다. 경청하기에 충분히 가치 있는 주제였다.

“우주에서 날아온 우리의 말썽투성이 촉수 덩어리에 관해 의논하자는 거지. 아니면 사람을 난도질하는 고약한 취미를 가진 형제라든가…. 아, 물론 네 눈도 빼놓을 수 없지.”

에리스는 뒤늦게 변명하듯 덧붙였다.

“안타깝지만, 오른쪽 눈을 살리긴 어렵다고 하더구나. 가능한 안구를 살리는 방향이 좋았겠지만 아마 의안을 끼게 될 거야.”

그는 난데없이 애꾸눈이 된 서준이 발작하거나 울음을 터뜨릴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서준의 시각은 타인과 완전히 같은 감각일 수 없었다. 안구와 뇌를 지배하던 환상은 어려서부터 정신 사납게 번쩍거리며 현실에 발붙이기 어렵게 만들었다. 진실과 동시에 잃은 눈 하나는 서준이 느끼기에 정당한 대가나 다름없었다.

다만 서준의 복잡한 사정을 에리스야 알지 못하니 그는 달래듯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뭐, 걱정되겠지만…. 그래도 이 분야에서 제일가는 의사가 네 수술을 집도할 예정이거든. 엄청나게 비싸지만 그만큼 실력은 장담할 만하지.”

“엄청나게 비싸다고요?”

서준의 동공이 사정없이 떨렸다. 이곳은 자본주의의 땅 미국이었다.

‘나 의료 보험 있나? 아니, 있어도 이런 것까지 포함이 되나?’

아무리 생각해도 한국하고는 차원이 다를 게 분명했다. 서준은 겨우 정 붙이게 생긴 집안 기둥이 뽑혀 나갈까 봐 두려움에 떨었다.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서준의 척추를 바로 세웠다. 신체의 불편함 운운하며 늘어져 있던 전신의 관절이 고르게 펴졌다. 안개가 낀 듯 몽롱하고 불분명하던 앞날이 명확해졌다. 불행히도 밝아진 게 아니다. 불에 탄 숯덩이처럼 새까매졌다.

서준은 불길한 상상을 하는 데에 그 누구보다 탁월한 재능을 지녔으나 이번만큼은 부디 자신에게 희망이 함께하길 기도했다. 지금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노동자의 삶이 예지인지 제 착각인지조차 가늠이 되질 않을 지경이었다.

“혹시 제 앞날이 전부 빚 갚는 데 쓰이다가 끝난다는 사실을 통보하러 오신 건가요?”

서준은 목을 가다듬은 후 대단히 공손한 어투로 물어보았다. 그러나 기대를 품었다고 말하기에는 그의 목소리나 내용이 비굴하기 짝이 없었다. 뻣뻣하던 목이 슬금슬금 기울어지고 하나뿐인 눈이 애처롭게 빛났다.

에리스는 서준이 실험실 생쥐처럼 떠는 모습에 눈을 휘둥그레하게 떴다. 하지만 봉송하게 난 머리카락이 눈썹 아래까지 가려 버린 탓에 잘 보이지 않았다. 서준은 한층 더 긴장해 침을 꼴깍 삼켰다. 다행히 에리스는 보비처럼 심성이 막돼먹지 않아 지난하게 시간을 끄는 일 없이 입을 열었다.

“참, 참. 뭘 걱정하나 했더니. 당연히 병원에 입원한 동안 든 비용과 수술비는 우리가 부담할 거야. 너희가 겪은 일에 대한 보상도 충분히 할 거고. 설마 그 정도 편의도 못 봐주겠어?”

“예?”

에리스는 셔츠의 가슴 주머니에서 꺼낸 만년필을 손가락 사이에서 돌렸다. 따로 노트나 종이를 꺼내지 않는 걸 보아하니 단순히 버릇에 불과한 모양이었다.

그는 서준과 눈을 맞추고 차근히 설명했다. 서준과 친구들이 받아야 하는 보상, 우주의 존재와 마주쳤으니 최첨단 장비로 받아야 하는 검사, 서준과 요한이 저지른 살인에 관한 편의….

하나같이 귀가 녹아내릴 정도로 달콤한 이야기였다. 특히 에리스가 알려 준 보상 금액이 대단했다. 그러나 친절한 목소리는 서준의 뇌 주름 사이에서 의심을 끌어 올렸다. 이렇게 형편 좋게 돌아가는 일이 당연한가? 이건 함정이 아닐까? 불쑥 솟아난 불신은 환자가 숨기기에는 너무나 짙은 감정이었다.

손가락 사이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던 만년필이 우뚝 멈췄다. 콧잔등을 찌푸린 에리스가 들쩍지근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그래. 이상하기야 하겠지. 이해해. 원래 재판을 거치지 않는 덜컥 내미는 호의는 미심쩍기 마련이야. 당연하고말고! 그런 태도, 아주 좋아. 오히려 내가 권장하고 싶은걸. 마냥 순진하기만 한 건 열 살 미만의 어린이들한테나 기대하는 덕목이고.”

넌 열 살이라고 하기에는 키가 너무 크구나, 하며 에리스는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자신에게 꿍꿍이가 있다는 걸 전혀 숨기려 들지 않았다. 이에 서준은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그는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등받이에 편하게 누웠다. 서준의 태도가 달라진 걸 깨달은 에리스가 덥수룩한 머리카락을 만년필로 벅벅 긁어 댔다.

“우리가 네게 요구하는 건 간단해. 위험도 저수위 C 등급체, 너희는 괴생명체 X라고 부른다고 했나? 단순한 이름이지만 그 말 그대로야! 너희들 센스가 좋구나. 괴생명체, 괴생명체. 입에 아주 짝짝 붙는걸. 아무튼, 그 괴상한 생명체 말이다. 그놈의 존재에 대해 입을 다무는 것뿐이야. 어때, 정말 쉽지?”

“…….”

서준의 검지가 움찔 떨렸다. 솔직히 에리스, 정확하게는 그의 뒤에 있는 정부가 내민 제안은 놀라울 게 없었다. 괴생명체 X에 대해 침묵하라는 건 충분히 짐작할 만했다. 요컨대 그 엄청난 보상액은 입막음 조의 경비가 포함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서준과 요한, 크리스티나 일행이 겪은 놀라운 경험은 대단하긴 했지만 그만큼 허무맹랑했다. 또한 증거도 없이 떠든다면 허풍쟁이가 될 것이고, 괴생명체 X의 흔적 따위는 이미 이들이 전부 치웠을 터였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지도 않았다. 서준이 울적하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괴물이 먹어 치운 사람이 있잖습니까. 실버, 리처드 말이에요.”

“오, 다행히. 아니, 리처드 군의 길지도 짧지도 않은 삶을 모욕하려는 건 아니야.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마침 적절한 인사가 있지 않니. 그것도 두 명이나 말이야. 리처드 군의 부모도 자식이 네스호의 괴물에게 먹혔다는 연락보다는 여기 용감한 친구들이 자식의 원한을 갚아 주었다는 소식이 더 달가울 거야.”

“음….”

서준은 꺼림칙하게 에리스를 올려다보았다. 한마디로 괴생명체 X가 저지른 식인 행각을 가스 마스크 형제의 짓으로 조작하겠다는 뜻이다.

다소 떨떠름한 기분을 느끼던 서준은 곧 마음을 달리 먹었다. 누명이라면 누명이지만, 어차피 군인들의 죽음이야 묻힐 것이고 리처드의 죽음만이 덤처럼 붙은 셈이다. 그리고 그들 형제가 브래스를 죽인 꼴을 봤을 때, 리처드도 어차피 살아나긴 그른 목숨이었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입매가 서서히 풀어졌다.

‘그만하면 괜찮지 않나? 어차피 난 리처드랑 친하지도 않았고.’

서준은 보비 못잖게 이기적인 인간이었다. 인제 와서 동네 사람들에게 정을 붙인다 한들 얄팍하기가 종잇장과 비슷했다. 그가 납득한 기색을 보이자 에리스가 명랑한 어조로 덧붙였다.

“그래, 말 난 김에 알려 주자면 네가 요한 군과 함께 프레드 프랭크를 죽인 건 걱정하지 마. 누구라도 그 오두막을 본다면 너희를 칭찬할걸? 실종자의 가족들도 너희에게 감사를 표할 거야.”

하릴없이 밝던 목소리가 끝부분에서 낮게 가라앉았다. 서준은 느닷없이 깨달았다. 저것은 인간적인 연민이었다. 시종 가벼운 모양새로 굴던 에리스가 덮지 못하고 새어 나온 그의 진심이었다.

서준은 새삼스럽게 에리스를 응시했다. 너저분한 몰골의 어른을. 그리고 다시금 기억해 냈다. 요한에게 뒷일을 전부 미뤘을 적에 들은 목소리의 주인이 바로 에리스였다. 하몽 캠프장에서 보낸 하루는 고달프고 힘겨웠다. 서준이 그곳에서 만난 어른이라고는 살인에 취한 형제와 애국과 헌신을 부르짖던 정신 이상자밖에 없었다.

믿어도 되는 걸까? 에리스가 제시한 금액을 떠올리면 신뢰가 무럭무럭 솟아나기야 했다. 서준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알겠습니다. 괴물에 관해서는 입을 다물게요. 어차피 다른 사람들한테 말할 생각도 없었으니까….”

“그래? 잘 생각했어. 현명한 판단이야. 아, 숨겨야 하는 건 괴생명체 X에 관련된 이야기만이야. 프랭크 형제의 살인 행각에 대해서는 어차피 크게 말이 나올 거다. 그것도 정리해서 알려 줄 테니 걱정은 마.”

“예에.”

서준은 말끝을 흐리며 하품했다. 그리 오래 떠들지도 않았는데 눈앞이 가물가물했다. 그는 쏟아지는 수마에 외로운 눈꺼풀을 열심히 들어 올리려고 노력했다. 만년필 뒷부분으로 미간을 문지르던 에리스가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였다.

“피곤할 텐데 오래 잡아 둬서 미안하다. 수술 일정도 있으니 몇 번 더 얼굴을 봐야 할 거야. 다음에 또 올게. 이만 쉬어.”

그는 머릿기름이 묻어 번들거리는 만년필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것을 바라보다가 에리스가 어슬렁어슬렁 문가로 다가가자 당황스레 입을 열었다.

“그게 단가요? 저는 더 많은 걸 물어볼 줄 알았는데요.”

서준의 질문에 에리스가 쓰게 웃었다.

“뭐? 괴물을 어떻게 물리쳤는지, 우리의 못된 참새가 얼마나 짹짹거렸는지? 걱정은! 그런 건 이미 네 친구들이 많이 알려 줬단다. 무엇보다 넌 아직 환자잖아. 정양해야지.”

넉살 좋게 덧댄 말에 서준은 기분이 묘해졌다. 이불 속 발가락이 꿈지럭거리는가 하면 등줄기가 간지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친절에 겸양을 떨자니 체력이 부족했다. 서준은 그러잖아도 최소한도에 가깝던 근육이 한층 빈약해진 것에 슬퍼하며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에리스는 창백한 얼굴을 잠시 내려다보더니 몸을 돌렸다. 그의 손이 병실 손잡이에 닿았을 때였다. 앞코가 지저분한 운동화가 멈췄다. 에리스는 마치 바깥의 날씨를 물어보듯 운을 뗐다.

“참, 너희를 공격한 녀석이 누구의 명령으로 그랬는지 혹시 말을 흘리지는 않던?”

그의 질문은 이불속에 파묻힌 서준의 고막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뇌를 지나쳐 반대편 귓구멍으로 빠져나갔다. 서준은 가볍게 숨을 내쉬며 웅얼거렸다.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서준이 돌아누운 탓에 에리스는 점점 느려지는 입술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어렴풋하게 횡설수설하던 군인의 목소리를 들었다. 국가, 애국, 세금, 헌신, 자유, 인권, 비밀, 소대, 박사, 이동, 기니피그, 기니피그, 기니피그 레전드…. 군인뿐 아니라 크리스티나, 에어리, 윌리엄, 보비, 요한의 목소리가 뒤죽박죽으로 섞여 들었다.

‘아, 맞다. 보비는 그때 없었지.’

하필 징징거리는 보비를 떠올리다니, 서준은 문을 닫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후회하며 잠들었다. 어쩐지 악몽을 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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