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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53)화 (53/156)

#053

10. not episode one

허겁지겁 달려온 크리스티나의 안색이 눈알 하나 터진 서준과 비슷해졌다. 그녀는 머뭇거리며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목덜미와 이마가 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크리스티나의 두 뺨은 불긋하게 열이 올라 몹시 고단해 보였다.

서준은 기적의 현신에게 불초 인간의 걱정 따위를 끼치고 싶지 않았으나 자비로운 크리스티나는 마음을 정한 듯 애써 프레드의 시신에서 시선을 돌리며 슬금슬금 다가왔다.

프레드였던 시체의 꼴은 그가 생산해 낸 하몽에 비하면야 멀쩡했지만, 목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머리 뚜껑이 열린 모습은 빈말로도 괜찮다고 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크리스티나는 몇 번이나 침을 삼키고 겨우 말을 꺼냈다.

“어, 어떡하지. 너, 너어 눈이….”

거칠게 쉰 목소리를 듣자니 지독하도록 현실적인 감각이 몰려왔다. 서준은 제대로 된 대꾸를 할 기운도 없어 바닥에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그의 등 뒤로 단단한 나무 기둥이 느껴졌다.

서준은 이제 크리스티나가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며, 무조건 살아남는 파이널 걸이 아니란 것을 안다. 그러나 세상의 진실을 깨달았다는 게 곧 크리스티나의 말을 무시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남은 온 힘을 끌어모아 주둥이를 달싹거렸다.

“어어…. 어, 맞아. 난 이제 눈이 없어.”

물론 구멍이 날 뻔한 뇌가 갑자기 명민하게 돌아갈 리 없었다. 서준은 스스로 생각해도 멍청한 대꾸를 내뱉었다. 그가 연체동물처럼 흐물거리자 요한이 만지작거리던 촉수를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미끄러지듯 달려왔다. 요한은 철퍼덕 주저앉으며 절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준아. 우리가 이럴 때가 아니야. 차 열쇠도 찾았으니까 얼른 병원에 가자.”

푸른 눈동자는 물기로 젖어 평소보다 깊은 빛깔로 일렁거렸다. 안구가 두 개나 있기 때문일까? 사람의 마음을 어수선하게 만드는 색이었다. 서준은 부족한 자의 설움을 실감하며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알았어, 알았어. 골 울리니까 작게 말해. 속이 메스껍고 머리 아파….”

비록 말하는 꼴은 숙취에 시달리는 주정뱅이에 불과했으나 서준의 몰골은 그야말로 살아 있는 넝마나 다름없었다.

요한이 서준을 살피는 사이, 크리스티나는 외로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보비를 도와주는 중이었다. 그는 몹시 서글피 울며 자신의 체액으로 땅을 적셨다.

평소라면 이 불쾌한 소음을 유발하며 동시에 자연 파괴 행동까지 일삼는 보비에게 대단히 불쾌감을 느꼈을 터이다. 하지만 서준은 현재 대단히 고단했다. 근성으로 끌어 올렸던 모든 기력이 물에 녹은 소금처럼 사라져 갔다.

잠도 자지 않고 종일 움직이는 건 정말이지 못 할 짓이었다. 유산소 운동과 무산소 운동, 아무튼 숨을 쉬든지 말든지 둘 중 하나는 해야 했는데…. 머리통이 요한의 어깨로 사르륵 미끄러졌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바닷속 해초처럼 기이하게 흐트러졌다.

요한은 천천히 서준의 뒤통수와 목을 쓰다듬었다. 상처를 건들지 않도록 노력하는 손길은 무척 조심스럽고 따뜻했다.

욱신거리는 고통이 끊임없이 밀려오며 온종일 바랐던 기절이 점차 찾아오는 듯했다. 완전히 정신을 놓기 전 눈꺼풀을 내린 서준의 귓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일정한 박자로 치는, 마치 행진용 음악대가 치는 북소리처럼…. 아니, 북소리가 아니다. 진동이었다! 서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덕분에 가만히 있던 요한의 턱이 단단한 머리뼈와 부딪혔다. 잇새 사이로 끙끙 앓는 소리가 작게 새어 나왔다.

서준은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한쪽 눈으로 힐긋거렸다. 더한 덩치들 사이에서 날아다니던 놈이 고작 이 정도로 아파할 리가 없으니 엄살이 분명했다. 그러니 지금 중요한 건 요한의 애교 따위가 아니라 점차 다가오는 발소리였다. 심지어 한 명도 아닌, 여러 명의.

그들은 아침 햇살과 함께 찾아들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어림짐작해도 스무 명이 넘었다.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검은 방탄복에 고글과 마스크를 쓴 차림새였다. 눈과 입이 모두 가려져 그들이 대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요한은 서준을 자신의 등 뒤로 가리고는 차분하게 그들을 응시했다. 구멍이 난 손으로 어느새 도끼를 꼬나 쥐고 있었다. 도끼의 날에서는 프레드의 액체가 흘렀다. 그러나 상대방은 전부 기관 단총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군홧발이 풀을 매섭게 짓밟는 소리가 지진처럼 울렸다.

서준은 그들의 정체를 느릿하게 깨달았다. 군대였다. 차갑게 식은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았다. 나라를 위해 희생하라며 짹짹거리던 미치광이 군인이 떠올랐다.

보비가 다시금 바짓단을 적시려 할 때였다. 중무장한 사람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얼굴을 가리지 않은 남자가 한 명 불쑥 튀어나왔다. 그는 부스스한 머릿결에 눈 밑이 검었다. 몇 날 며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듯 초췌한 안색이었다. 새하얀 가운을 걸친 남자는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더니 목청 높여 외쳤다.

“생존자 발견!”

발견, 발견, 발겨언! 캠프장 전체에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한 목소리였다. 그는 한껏 자애로운 표정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이제 괜찮단다. 안심하렴.”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어색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목젖까지 덜덜 흔들렸다. 남자를 믿을 이유는 하나도 없고 믿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차고 넘쳤다. 그러나 서준은 너무나 피곤했다. 그는 크리스티나를 부축하는 군인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뒤 요한의 품에 고개를 파묻었다.

“널 믿을게, 요한.”

네가 어떻게든 해 봐…. 서준은 웅얼거리며 무책임하게 정신을 잃었다. 세상에 다시 없을 달콤한 기절이었다.

***

사족으로, 이 사건 ─ 하몽 캠프장에서 벌어진 ‘블랙 레이크의 놀라운 진실과 거짓 그리고 살인마와 미녀’ 모방 살인 사건 및 우주에서 날아온 괴생명체 X의 난동 ─ 과 별로 상관없는 진실이 하나 더 밝혀졌다.

서준은 그간 자신이 톰팃톳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이유를 공포 영화의 규칙, 혹은 대단히 외면하고 싶은 가설이지만 부모님이 저지른 미지의 범죄 탓이라 여겼다. 그러나 프레드 프랭크의 정수리를 쪼개며 확인 사살을 끝낸 뒤 병실에서 정신을 차린 그는 부모님에게 놀라운 소식을 전달받았다.

“네? 저한테 스토커가 있고 그 스토커가 잡히기 직전에 절벽에서 차와 함께 떨어져서 죽었다고요?”

바로 존재조차 몰랐던 스토커가 사망했다는 것이다. 서준은 당연히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는 침대에 반쯤 드러누워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는 부친과 코를 풀던 모친에게서 사연을 듣기 시작했다.

언젠가 귀동냥으로 들었던 뉴욕 유아 납치 사건과 서준이 연관 있던 것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서준은 유괴를 당하지는 않았다. 다만 범인은 그를 노렸고 집으로 불쾌한 편지를 몇 통 보냈다.

신문 글자를 오려 만든 일종의 범행 예고장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물건이었는데, 서준의 부모는 이에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 조잡스러운 편지 이후 사라진 아이가 다섯 명을 넘어섰다.

후에 밝혀지기를 다섯 명 중 둘은 모방범에 의한 납치로 그 아이들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다른 세 명의 아이는 끝끝내 행방을 찾지 못했다. 오랜 기간 범인의 정체 또한 오리무중이었다.

서준의 부모는 공포에 떨었다. 언제 아이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스트레스가 그들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리하여 그들은 톰팃톳에 숨어들기로 했다. 야반도주하듯 삶의 터전을 떠나왔다. 외부와의 연락은 험블비 부부의 자식을 통해 은밀히 주고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찾아왔다. 유괴범을 집요하게 쫓은 연방 경찰이 마침내 그의 꼬리를 잡아챘다. 유괴범은 사고로 자식을 잃은 부부였다고 한다. 그들은 경찰의 추적을 피하다 끝내 절벽에서 추락했다.

일련의 이야기를 들은 서준의 감상을 말하자면 마치 타인의 경험을 듣는 듯 현실감이 부족했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 어릴 적의 일이었다.

전생의 기억을 되찾기 전의 그는 그저 코흘리개 꼬마에 불과했다. 어린아이답게 기억이 흐릿했으며 덜 자란 뇌는 어려운 글자와 단어를 오래 기억하는 데 특화된 단백질이 아니었다. 현실은 때때로 픽션보다 놀라운 법이다. 서준은 새삼스러운 명제를 떠올리며 혀를 찼다.

‘보비가 하찮은 인성을 가진 건 그런 배역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사람 자체가 배포가 작아서 그런 거였군.’

정말 놀랍지 않은 사실이었다.

“잠깐만요. 어머니, 아버지. 그러면 어제…. 어제가 어제가 맞나요?”

“어제는 늘 어제였지만, 넌 일주일 만에 정신을 차렸단다. 아가야.”

서준은 망연하게 부모님을 올려다보았다. 속이 터질 정도로 물어볼 것이 많았으나, 막상 나온 건 한마디에 불과했다.

“아, 그럼 제가 캠프장으로 쫓긴 날 험블비 부부 댁에 저녁 식사 하러 갔던 건 정보 교환의 일부였던 건가요?”

자신이 공포 영화 운운하고 돌아다닐 때 부모님은 스파이 영화를 찍고 있던 셈이다. 세상에 별일이 다 있었다. 서준이 입을 헤벌리고 있자 모친이 손사래를 쳤다.

“얘는, 넌 무슨 엄마랑 아빠를 그렇게 계산적인 사람으로 보니? 그날은 정말 식사하러 갔던 거야. 다리도 불편하시고 도와줄 겸. 그런데 험블비 부인이 쓰러져서…. 마침 운전할 사람이 우리밖에 없었잖니. 그래서 같이 병원에 갔는데 네가 실려 오는 거 보고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애써 웃으며 말하던 모친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부친은 옆에서 이미 축축하게 젖은 손수건을 내밀었다. 하기야 그의 꼴이 얼마나 참담한 모습이었겠는가?

침상 위에서 손가락을 꿈질거리며 머뭇거리던 서준이 그들을 달래기 위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러나 상반신을 움직이기 무섭게 전신에서 통증이 올라왔다. 근육이 비명을 지르듯 욱신거렸다.

“크으….”

그가 나직하게 신음을 삼키자 부모는 어깨를 붙잡고 조심스레 뒤로 눕혔다. 초자연적인 힘에 의하거나 범죄를 저지른 손이 아니었다. 그저 자식을 연민하고 아끼는 다정한 온기에 불과했다.

서준의 심장이 죄책감으로 따끔거렸다. 일가는 잠시 아무런 말도 없이 서로를 도닥거렸다. 그러나 이런 안온한 시간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조용하던 병실에 불쑥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그는 부스스한 머릿결의 남자였다. 남자는 자라처럼 길게 목을 빼고는 부산스럽게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옷은 또 어찌나 얌전하질 못한지, 양말은 짝짝이에, 목 부근을 채운 단추는 하나씩 밀려 있으며 바지 안쪽으로 집어넣은 셔츠 자락이 비죽 튀어나왔다.

이 어수선한 태도에 서준의 붕대로 감기지 않은 한쪽 눈이 슬그머니 찌푸려졌다. 비록 그라고 정리 정돈의 화신은 아니지만 저렇게까지 난잡한 복장은 병문안과 어울리지 않았다.

혼자 언짢아하던 서준의 시선이 부자연스럽게 멈췄다. 애당초 저 남자는 누구란 말인가? 순간적으로 의사인가 싶었지만 서준은 곧바로 자기 생각을 부정했다. 옷의 추레함은 둘째 치고 의사가 저토록 불안정한 느낌으로 환자를 보러 오지는 않을 터였다.

서준의 눈빛을 알아챈 부모가 덩달아 뒤를 보았다. 그들은 서준처럼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낯선 이를 응대했다. 남자는 잰걸음으로 다가와 부모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쑥덕거리는 소리가 무척 낮았다.

문득 요한이 생각났다. 저 낯선 사람과 요한의 공통점이라고는 낮은 목소리뿐이 없었다. 갑작스레 떠오른, 목젖이 울리며 우렁우렁하게 나오는 목소리. 마지막으로 귀에 감겨들었던 그 목소리가 구멍이 뚫린 피투성이 손을 연상시켰다.

병원에서 막 정신을 차렸을 때는 기억나지 않았던 것이 거짓말처럼 그의 편린이 속속들이 솟아올랐다. 서준은 불현듯 다급한 기분이 들었다. 손바닥 안쪽으로 땀이 고이고 발가락이 가만히 있지 못했다. 초조함이 등을 떠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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