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
서준은 입을 다물고 요한을 응시했다. 까맣게 타들어 간 머릿속에서 점차 이성이 되살아났다. 비록 서준이 명민하지는 못할망정 이렇게나 많은 단서를 두고 멍청하기란 그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애초에 그가 기억하는 이름은 크리스티나뿐이었다. 파이널 걸을 제외한 이들은 운동계 조연과 그의 치어리더 여자 친구, 얼간이, 마지막으로 잘생겼지만 끝내 생존하지 못하는 남자라는 두루뭉술한 윤곽이 전부였다. 크리스티나의 존재가 너무나 거대하여 다른 것들은 흐릿하게 다가왔다.
거기에 더해 달갑잖게 찾아오는 예지는 자신을 선지자라는 배역이라 믿게 했다. 전생의 서준에게는 그런 기이한 능력이 없었으므로 당연히 선지자로서의 쓸모를 위해 주어진 힘이라 여겼다.
그렇기에 그들의 목숨을 가볍게 생각했다. 선심 쓰듯 경고랍시고 알아먹지도 못할 헛소리를 늘어놓고 레몬 몇 알로 충분히 도움을 주었다고 자찬했다. 인간 방패 운운하며 보신을 위한 장기 말처럼 써먹을 꿍꿍이를 꾸몄다.
“준아, 왜 그래?”
이마에 뜨뜻한 숨결이 닿았다. 열기로 가득한 몸이 부둥켜안고, 뜨거운 손이 서준의 목덜미를 매만졌다. 이제는 도저히 타인이라 여기지 못할 다정한 눈이 그를 꼼꼼히 살폈다.
서준은 인정했다. 이곳은 영화 속 따위가 아니다. 현실이었다.
“아….”
쓴물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막상 입 바깥으로 나온 것은 나약한 신음에 불과했다. 몸이 무거웠다. 공기조차 무게를 가진 듯 피부가 짓눌렸다. 평생토록 외면한 진실이 그를 압박해 왔다. 흐으, 말이 아닌 기이한 허덕임이 입 속에서 맴돌았다. 서준은 도살당하는 개처럼 비틀거리며 요한을 밀쳤다. 한번 깨닫자 도저히 그를 똑바로 응시할 수 없었다.
오두막을 뛰쳐나가자 차가운 공기가 폐부 가득히 들어왔다. 하늘은 검푸른 보랏빛을 띠었고 저 멀리 나무 사이로 붉은색이 감돌았다. 새벽의 서느런 바람이 서준의 뺨을 얼얼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약동하는 심장과 벌떡거리는 혈관 탓에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흐으으….”
달군 돌을 삼킨 듯이 가슴속이 답답하고 괴로웠다. 서준은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나무 사이를 방황했다. 날파리처럼 같은 곳을 맴돌던 그는 다섯 번째 나무 기둥을 지나고서야 걸음을 멈추고 거친 표면에 이마를 박았다.
감은 눈에서 눈물이 찔끔 새어 나왔다. 몸을 달구는 건 공포도 충격도 아니었다. 맹렬한 수치심이었다. 그는 깨달았으되 너무 늦게 깨달았다.
서준은 크리스티나 툴박스라는, 파이널 걸도 뭣도 아닌 평범한 소녀를 사지로 내몰고 선택을 강요했다.
“아, 아악! 악! 흐으, 으, 아악! 씨발!”
머리통을 나무에 처박아 대자 개암 몇 개가 툭 떨어졌다. 오열도 못 되는 꼴사나운 울음이었다. 그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자학을 하며 울부짖었다. 비단 크리스티나를 향한 죄악감만은 아니었다.
“대체 몇 년을…. 대체, 내가, 몇 년을, 이렇게!”
빠악, 이마의 살갗이 찢어져 피가 흘렀다. 하지만 화끈한 고통도 자신을 향한 학대를 멈출 수 없었다. 무려 여섯 살부터였다. 그토록 긴 시간을 아무렇게나 낭비했다. 이 세상이 공포 영화 속이라는 지독한 망상에 빠져 허비한 인생이 아까워 미칠 것만 같았다.
“준아, 그만해!”
오두막에서 나온 요한이 억지로 끌어내지 않았다면 쓸데없는 짓거리를 계속 이어 나갔을 것이다. 애당초 오두막과 몇 걸음 떨어지지도 않은 거리였다.
요한은 서준의 난동에 당황하면서도 그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러나 난데없이 자신의 머리통을 깨부수려고 하자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요한이 허리를 끌어안자 서준은 그를 거부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그럴 힘도 부족했다. 서준의 시선은 공허한 것이 꼭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서준이 코를 훌쩍거리며 웅얼거렸다.
“내가 인생을 허투루 보냈어. 어, 엄청나게 낭비했어. 기껏 얻은 기회였는데 그걸 모르고 세상하고 신을 원망했어. 인생을 헛살았어.”
추한 몸부림은 서준의 빈약한 체력을 끝의 끝까지 긁어냈다. 그러잖아도 피로가 쌓인 몸뚱이는 흐물흐물해져 요한의 단단한 어깨에 수숫대처럼 힘없이 기울었다.
“준아, 인생을 헛살았다니?”
요한은 제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는 걸 알았지만, 서준의 체액은 늘 기꺼웠으므로 상냥하게 되물었다. 서준은 미래를 엿보는 재주는 있었으나 요한의 추잡한 마음을 읽는 능력은 없었으므로 꼼짝도 하지 않고 불분명한 말투로 말했다.
“나는 여기서 나가는 것만 생각했지, 다른 건 아무것도 안 했어. 친구도 없고, 성격은 이기적이기만 하고…. 대체 내 인생은 뭐였던 거지?”
“아무것도 안 했다고?”
요한이 서준의 양 볼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는 부기 있는 눈가를 엄지로 쓸며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준아, 너는 남들이 놀 때 아르바이트 해서 자전거도 샀잖아.”
비록 그 자전거는 두 번 다시 타고 싶지 않은 꼴이 되었으나 요한은 우선 말부터 하고 보았다.
“공부는, 뭐, 사람이 꼭 성적이 좋아야 하나? 그건 아니잖아. 아, 그리고 트럭 타고 여행하고 싶어서 면허도 따겠다며. 그런데 네가 왜 아무것도 안 한 거야? 꿈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잖아.”
서준의 귀가 팔락거렸다. 그는 은근슬쩍 콧물을 요한의 옷에 닦으며 침을 삼켰다. 하지만 서준은 현재 인생 최대의 좌절을 맛보는 중이었으므로 금세 의기소침해졌다.
“그럼 뭐 해? 남들은 나보다 인생을 더 알차게 살았을 텐데. 난 헛짓거리한 거야. 적어도 면허 따는 것보단 더 괜찮은 일들이 많았을 거라고.”
부정적인 감정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서준을 바라보던 요한이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요한은 다시 서준의 머리며 뺨을 쓰다듬었다.
“조금 늦되면 어때? 빠른 사람도 있고 느린 사람도 있는 거잖아. 그리고 느린 게 그렇게 마음에 차지 않으면 내가 같이 갈게. 응?”
그는 잠깐의 틈도 놓치지 않고 열심히 자신을 내세웠다. 요한은 서준을 걱정하면서도 사심을 품었다. 무척이나 투명한 속내였다. 의뭉스러운 태도 따위는 없었다. 그는 솔직하게 제 마음을 드러냈다. 좋아한다고 외치는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하, 하하.”
서준은 그만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을 터뜨렸다. 눈꼬리에 눈물을 대롱대롱 매달고 낄낄거렸다. 무거웠던 몸과 마음이 한순간에 놀라우리만치 가벼워졌다.
눈에 보이는 모든 상황이 우스웠다. 요한은 이런 때에도 수작질을 부렸으며 어느샌가 오두막에서 나온 보비가 어슬렁거리며 주변을 돌아다녔다. 정말 이상한 풍경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서준은 편안한 숨을 내뱉으며 등을 나무에 기댔다. 요한은 서준과 마주 보며 방긋거렸으며, 보비는….
“맙소사! 이건 한나가 의식에 치른 비석!”
늪지 옆에 주저앉아 혼자 호들갑을 떨었다. 그의 낯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이런 끔찍한 날에도 행복한 사람이 한 명은 있었다. 그 대상이 보비라는 것은 썩 기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홀로 감격에 빠진 그의 엉덩이를 뻥 찰 정도도 아니었다. 그때 수풀이 약간 흔들렸다.
‘뭐지?’
요한은 서준을 바라보느라 알아차리지 못했고 서준은 눈물을 쏙 뽑은 탓인지 아직도 시야가 흐릿했다. 청설모일까? 서준은 요한의 어깨를 옆으로 밀고 쌍안경을 꺼냈다. 어쩌다 보니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다.
‘이거, 브래스가 꺼냈다고 했나.’
오두막의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을 그를 생각하며 서준은 대수롭지 않게 쌍안경을 눈가에 댔다. 둥그런 시야는 제법 불편했다. 그리고 수풀 속에서 튀어나온 손이 흔들렸다. 마치 인사하듯이.
참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괴물에게 발도 종아리도 무릎도 허벅지도 사타구니도 복부도 가슴도 손도 팔도 어깨도 목도 다 잡아먹혔을 터인데. 남은 부분이라고는 굴러다니던 머리밖에 없어야 하지 않나?
서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일견 장난스러운 태도였다. 다른 손을 보자 그곳에는 하몽 나이프가 아닌 석궁이 들려 있었다.
[빵!]
가스마스크는 제가 총이라도 쏘는 줄 아는지 익살스러운 소리를 내며 손을 움직였다. 황급히 얼굴 위를 방해하던 물건을 치웠다. 하지만 이미 알아차린 시점에서 늦은 셈이다. 처음에 그것은 점으로 보였다. 아주 약간의 시간이 지나 그것은 조금 더 큰 점이 되었고, 느릿한 인지 속에서 서준은 그것이 선이라는 불행을 알아차렸다.
볼트는 과격하게 공기를 가르며 날아왔다. 요한이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시야가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도 이미 발사된 흉기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이윽고 푸욱, 살을 꿰뚫는 고통이 골통을 흔들었다. 머리가 쪼개질 듯 뇌가 흔들리고 이마 중앙에서부터 뼈가 부수어 파헤쳐지는 착각이 일었다.
“크흑!”
요한의 손바닥을 뚫은 볼트는 멈추지 않고 서준의 오른쪽 안구에 박혔다.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이 고통을 서준은 이미 겪은 적이 있었다. 바로 오늘, 시간으로 따지자면 어제였을 적에.
“준, 아!”
대신 목청이 찢어지듯 소리를 높인 것은 요한이었다. 그는 입술을 짓씹으며 서준과 제 손에서 솟아나듯 박힌 볼트를 빼내려 했다. 하지만 살인자는 요한에게 시간을 주지 않았다. 두 번째 볼트가 날아왔다. 요한은 서준의 안구를 함부로 뽑아내지 못한 탓에 기민하게 움직이지 못했다. 피하지 못한 대가는 참혹했다. 그것은 정확하게 요한의 가슴팍에 꽂혔다. 터엉, 하고 요한의 몸이 흔들렸다.
왜 보기 싫은 광경은 느리고, 길게 보일까. 한쪽밖에 남지 않은 눈으로 서준은 그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아….”
바람이 빠지듯 요한의 입술 사이로 숨이 새어 나왔다. 그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쓰러졌다. 보비의 비명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