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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49)화 (49/156)

#049

어려서부터 특출나게 깜찍하고 귀여운 크리스티나의 얼굴은 여섯 살 서준에게 크나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크리스티나가 덧니를 보이며 헤 웃을 때면 숨이 막혔다. 크리스티나가 알파벳을 배우자 호흡이 가빠졌다. 크리스티나가 숫자를 배우고 시계 읽는 법을 터득하자 눈앞이 노래졌다. 이윽고 충격은 공포로, 공포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톰팃톳이 공포 영화 속, 정확하게는 《피 흘리는 호수의 살인마》의 세계라는 걸 깨달았을 때 서준은 그 나름대로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어떤 방식을 이용해서든 부정의 증거를 원했다.

첫 번째 시도는 기도였다. 꿈이길 바라며 두 손을 맞잡고 연거푸 하늘을 향해 빌고, 절하고…. 하지만 신은 무정하셔서 무신론자의 애걸 따위에 답하지 아니하셨다.

두 번째 시도는 자해였다. 꿈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못한 서준은 제 허벅지며 볼살을 마구잡이로 꼬집었다. 물론 살갗에 무수하게 찍힌 눌린 손톱자국 외에는 이렇다 할 소득이 전무했다.

저차원적인 현실 도피가 실패하자 서준은 다음 수를 강구했다. 하지만 그가 무언가를 실천할수록 애로 사항은 끝도 없이 증식했다.

우선 서준의 나이가 문제였다. 아무리 전생을 자각한 그가 제법 의젓한 소년인 척 굴어도 겉모습은 팔과 다리가 짧은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걸을 때마다 귀여운 소리가 나는 운동화를 신은 아이에게 탐사는 어려웠다. 바람 새는 발음으로 웅얼거려 봤자 사탕이나 두어 개 얻으면 소득이 있는 편이었다.

여기에 더해 서준의 부모는 그가 인터넷에 접속하는 티만 내어도 한쪽 뺨이 뻣뻣하게 굳었다. 웃음은 괴괴하게 일그러지고 눈 아래쪽의 살이 경련하듯 떨렸다.

아주 어릴 적에는 전자 기기에서는 나쁜 전자파가 나온다며 겁을 주었고, 그보다 더 자라자 교육을 운운했다. 하지만 가면을 쓴 듯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면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는 노릇이다. 서준은 긴장과 불신이 녹아내린 침을 삼키며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회는 어느 순간 찾아왔다. 텅 빈 서재, 복잡한 무늬의 융단, 검붉은 책상, 쇠의 촉감이 느껴지는 차가운 덮개…. 서준은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노트북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검색하기 위해 키보드 위로 얹은 손가락 사이에서 땀이 줄줄 흘렀다. 알 수 없는 거부감 속에서도 손가락은 충실하게 뇌의 명령을 따랐다.

그리하여 서준을 맞이한 건 희고 텅 빈 페이지였다. 《피 흘리는 호수의 살인마》에 관한 결괏값이었다. 옅은 푸른빛을 발하는 화면을 바라보며 서준은 발밑이 꺼지는 아득한 감각을 느꼈다. 참담한 진실이 온몸을 바늘처럼 찔렀다. 온갖 부정적인 상념이 휘몰아치고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휘청거리는 다리와 부들부들 떨리는 어깨를 주체하지 못했다. 발바닥에 닿는 부드러운 털조차 피부를 베는 듯 고통스러웠다.

수많은 이름의 후보군 속에서 서준이 택한 것은 도피였다. 그는 서재를 빠져나와 계단을 올랐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이불속에 머리를 묻었다. 멍청한 타조처럼 굴며 눈을 감았다. 그날 밤에는 아주 어릴 적에나 껴안았던 곰 인형을 찾았다. 다음 날 곰 인형의 배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서준은 동트는 하늘을 초점 없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이후 그는 온순한 아이가 되어 부모의 뜻을 따랐다. 인터넷과 거리가 먼 생활을 고수하고 두 번 다시 같은 글자를 검색하지 않았다.

다행히 친구가 없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서준은 겉보기로는 그럴싸한 문화를 즐기는 청렴한 삶을 살게 된 것이었다….

비록 나이가 들수록 부모님의 제재가 옅어지고 게임 따위에 몰두한 적이 있을지언정 《피 흘리는 호수의 살인마》라는 글자만큼은 절대로 찾아보지 않았다.

‘그런데 인제 와서, 이 모든 게….’

서준의 의식은 잘게 쪼개졌고 생각조차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어수선한 머리를 정돈하지 못하고 간신히 입을 열었을 때 나온 말 또한 더듬거리기만 했다.

“블랙 레이크의, 블랙 레이크의 뭐?”

보비는 서준의 질문에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뜨거운 콧김을 뿜었다. 곧 터지기라도 할 듯 열기가 대단했다.

“블랙 레이크의 놀라운 진실과 거짓 그리고 살인마와 미녀!”

그는 길디긴 제목을 말하며 단 한 번도 혀가 꼬이지 않는 재주를 발휘했다. 하지만 보비가 앞구르기와 뒤구르기를 동시에 성공시켜도 감탄할 마음이 없는 서준은 목도리도마뱀 같은 목을 잡고 흔들어 댔다. 이성은 이미 증발한 알코올처럼 흔적조차 찾기 힘들었다.

“그러니까 그게 대체 뭔데? 조 룸펠슈틸츠헨이 누군데!”

“조 룸펜슈틸츠헨!”

목이 졸려 꽥꽥거리던 보비는 조 룸펠슈틸츠헨의 이름을 비명처럼 토해 냈다. 서두를 위해 꺼낸 단어인지, 아니면 단순히 서준의 마지막 말을 따라 했을 뿐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보비의 발악은 소용이 있어서 서준의 손아귀가 느슨해졌다.

겨우 생명의 위기에서 벗어난 보비는 벌겋게 부푼 안구에서 습기를 짜내며 열변했다.

“톰팃톳의 명감독, 룸펠슈틸츠헨 베이비의 탄생을 만들어 낸 톰 조지 말이야! 조 룸펠슈틸츠헨의 본명이 톰 조지라고!”

빼쭉한 눈초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한 번 더 보비를 괴롭히려던 서준의 손가락이 멈칫 굳었다. 대신 그는 자신의 귓구멍이 막혔는지 확인을 해 보기 위해 한번 쑤석였다. 걸리는 것 없이 깨끗하게 뚫려 있었다. 즉, 보비의 목소리가 뇌까지 잘 전달이 되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서준의 머리뼈 속 단백질은 이해를 포기하고 반문을 시도했다. 영화의 등장인물이 감독을 안다니, 이 무슨 해괴한 일이란 말인가?

“아니, 아니야. 보비. 네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거야. 응? 그렇지?”

광인처럼 중얼거리는 서준의 몰골에 보비가 겁을 먹고 뒷걸음질 쳤다. 덕분에 그는 브래스의 몸을 발로 밟고 말았다.

“히익!”

발바닥에서 올라오는 뚜렷한 감촉에 보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차갑고, 물컹거리고, 단단한, 모순적인 자극이 그의 가슴속 울화를 건드렸다. 제 나름대로 꾹꾹 눌러두었다고는 하지만 양초의 심지보다 짧은 인내심이었다.

“이, 이런 너무한 대우를 내가 너한테 받아야 할 이유가 없어! 이건 너무 부조리한 일이야. 대체 왜 나한테 화를 내는 건데?”

“네가 살아 숨 쉬는 것보다 부조리한 일은 없어, 보비.”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서준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요한, 뭐라고 말 좀 해 봐! 이 미치광이를 나한테서 좀 떨어지게 해 줘!”

보비는 눈물과 콧물을 쏟아 내며 요한에게 보챘다. 우정의 힘이 통했는지, 요한은 부드럽게 서준의 어깨를 껴안았다. 등과 배가 맞닿았고 이제는 익숙한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그는 서준의 배를 도닥거렸다. 배앓이를 하는 아이를 달래듯 가만가만한 손길이었다. 서준은 고개를 숙여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거칠고 탁한 목소리가 바짝 마른 목구멍을 비집고 나왔다.

“너도 알아? 요한, 너도 조 룸펠슈틸츠헨을 알아?”

“준아, 몰라도 상관없어. 솔직히 그렇게 유명한 감독도 아니고…. 우리 또래 중에 진심으로 좋아하는 건 보비로 끝일걸?”

뒤에서부터 안긴 덕에 서준은 요한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가 어떤 표정으로 대꾸하는지, 푸른 시선은 어디로 향할지. 그러나 서준은 뒤를 돌아보는 대신 슬며시 벌렸던 입을 닫고 까칠한 입술 표면을 핥았다.

“크리스티나는 크리스티나잖아.”

그는 매달리듯이 크리스티나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것은 서준에게 결정적인 확신을 선사한 이름이었다.

늘 그녀의 존재가 버거웠다. 양어깨가 돌에 짓눌리듯 무겁고 척추가 휘어질 듯 되알졌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크리스티나가 크리스티나라는 사실이 세상을 받치는 기둥이었다.

서준은 실핏줄이 터져 벌건 눈으로 요한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은 곤충의 등딱지처럼 번들거렸고 눈매는 축축했다. 공포와 광신, 그리고 혼란으로 얼룩진 눈동자였다.

순간 요한은 치미는 욕망을 참지 못하고 그의 눈꺼풀에 가볍게 입술을 눌렀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온기에 서준의 몸이 움찔 떨렸다. 요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서준을 꽉 껴안았다. 그는 불현듯 솟아나는 애정을 참을 이유를 찾지 못했다.

보비의 경악을 배경음 삼아 요한은 땀과 먼지, 피로 엉킨 머리카락에 코를 비비며 살갑게 대답했다.

“크리스티나의 이름을 크리스티나가 스스로 지었겠어? 크리스티나의 이름은 말이지, 크리스티나의 할머니가 배우셨거든. 왜, 돌리 할머니. 크리스티나한테 직접 뜬 스웨터를 보내 주시곤 하잖아. 그 돌리 할머니가 찍었던 영화를 보고 크리스티나네 어머니가 등장인물과 같은 이름을 붙인 거야.”

“크리스티나의 할머니?”

“응. 젊으셨을 적 찍은 사진 보면 너도 놀랄걸? 크리스티나하고 빼닮았어. 머리카락이 밝은 갈색인 것만 빼면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거야.”

크리스티나의 주근깨도 할머님의 유전이 틀림없다고 다들 놀랐지, 하면서 부연하는 말이 귓구멍에 들어오지 못하고 허무하게 사라졌다.

서준이 본 영화는 컬러가 아닌 흑백 영화였다. 그는 어둡지 않은 색의 머리카락이 금발이려니 막연하게 믿어 왔다. 멍한 시선이 요한과 마주쳤다. 요한은 다소 민망하다는 듯이 웃었다.

“이 동네에서는 제법 유명한데…. 우리 준이는 이런 거 말할 친구가 별로 없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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