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8
찔끔 나오려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보비는 흐억흐억 울부짖으며 제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못해 안달이었다. 덕분에 감성적으로 젖어 들었던 기분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허으으, 허윽, 으우….”
눈물과 콧물, 침, 약간의 코피를 흘리는 보비의 얼굴은 엉망으로 젖어 있었다. 하지만 보비는 다시금 비명을 지를 기세였다. 입은 또 어찌나 크게 벌렸는지 달랑달랑 흔들리는 목젖이 어둠 속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어휴.”
요한이 꾸며 낸 듯한 한숨을 내쉬며 서준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단단한 어깨와 가슴팍이 사라지자 서준의 몸뚱이가 휘청거렸다. 요한은 허리를 숙여 보비의 발치에 구겨진 양말을 들었다. 새끼발가락 부근이 약간 해진 양말이 누구의 물건인지는 뻔했다.
파운드 밀크에서 사은품으로 준 빨간 헝겊을 신을 사람은 톰팃톳을 전부 뒤져도 보비밖에 없었다. 서준은 보비의 더러운 양말을 집어 드는 요한의 행동을 잠시 이해하지 못했다.
“우웁!”
요한은 양말을 보비의 주둥이에 둥글게 뭉쳐 틀어막은 뒤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는 넘어졌던 서준의 옷을 손으로 털어 주었다.
“여기 좀 지저분하다. 그치?”
“어….”
서준이 얼빠진 표정으로 요한의 슬쩍 구겨진 눈썹 사이를 보다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부옇게 흐리던 초점이 점차 보비에게 또렷하게 맞춰졌다.
꼼지락거리는 발가락은 잔뜩 긴장한 듯 구부러졌고 발목 또한 가만히 놔두질 못하고 밧줄을 꼬듯 이리저리 움직였다. 보비는 의자에 묶여 일어서지도 못하고 애벌레처럼 어깨를 꿈틀거렸다. 콧구멍에서는 거친 바람이 새어 나왔다.
하몽 생산지에서 마주한 보비는 마치 초현실주의 작품과 비슷했다. 존재만으로도 충격적이고 난해했다. 그러나 보비라는 인간은 몹시 다면적이어서, 자신이 얼마나 실재적인 인물인지 나타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일례로 그의 가랑이는 축축하게 젖어 기묘한 냄새를 풍겼는데, 이보다 더 현실적일 수가 없었다. 불규칙하던 호흡이 낮게 가라앉고 당혹스러운 기분이 씻기듯 가셨다.
보비는, 그냥 보비였다. 못되고 멍청한 눈초리를 했지만, 악마적으로 사악하진 않은. 서준은 손목을 털어 머리통을 던져 버린 다음 코를 감싸 쥐었다.
“세상에, 맙소사, 보비! 이 나이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넌 방광에 힘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 인내심이나 끈기 같은 덕목을 갖추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냔 말이야.”
비록 인생 대부분을 촌 동네에 살았어도 마음씨만은 각박한 도시 사람 못잖기 때문인지, 그는 자신도 오줌을 쌀 뻔한 주제에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기는커녕 보비를 마구잡이로 타박했다.
코를 막아 평소보다 한층 더 맹맹한 목소리가 닥치는 대로 비난을 쏟아 내자 입이 틀어막힌 보비가 애처로운 눈빛으로 버둥거렸다. 철제 의자를 바닥에 어찌나 잘 고정했는지 들썩거리는 건 가엾은 보비의 몸뚱이뿐이었다.
“우우웁!”
“물론 네 고추는 그런 걸 담기에는 너무 짧았겠지. 하지만 고환을 자르면 그럭저럭 공간이 남을 거라고 봐. 아, 좋은 의견이라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보비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눈치였으나 입이 단단히 봉해져 불가능했다. 서준이 혀를 차면서 보비의 몸을 뒤졌다.
“요한, 내가 이 자식 상의를 살필 테니까 너는 바지 주머니 좀 찾아봐.”
“어? 어…. 준아, 우리 그냥 보비를 풀어 주고 스스로 찾으라고 하자.”
우주에서 날아온 괴물의 사체와 죽은 사람의 가죽도 선뜻 만지던 요한도 보비의 얼룩진 바지에 손대는 일만은 주저했다. 서준은 서늘한 시선으로 요한을 응시했다.
열렬히 고백한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건만, 이 모가지가 뻣뻣한 태도는 대체 뭐란 말인가? 살면서 고백을 처음 들어 본 서준은 자신이야말로 방자하게 군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그의 매서운 눈초리에 굴복한 요한은 요령 좋게 보비의 바지 주머니를 헤집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보비의 주머니에는 차 열쇠가 있었다.
‘가장 운이 좋은 건 이게 안 젖었다는 거지.’
차가운 쇠의 촉감을 느끼며 열쇠를 손바닥 안쪽에서 굴리던 서준은 불현듯 분기가 치솟았다. 이미 오늘치 자제심을 모조리 쏟아부은 그는 서슴없이 본능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보비의 정수리에 꿀밤을 먹이자 딱, 하는 소리가 크게 났다.
“웁! 웁!”
난데없이 재난을 당한 보비는 대단히 억울하다는 듯 서준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돌아온 건 판결을 내리는 재판관처럼 냉엄한 대꾸였다.
“왜 눈이 그렇게 세모꼴이야, 보비? 애초에 평소 네 행실이 똑발랐다면 이런 일이 생겼을까? 예를 들면, 연쇄 살인마한테 잡혀갈 때는 무소유의 마음으로 가진 걸 죄 내놓았다던가….”
보비의 발악이 한층 거세졌다. 물론 별 반향은 없었다. 그는 서준이 정말 자신을 내버려 두고 갈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발광에 가까운 몸부림은 차라리 절박하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아무리 이곳이 끔찍하다고는 하지만, 이미 괴생물체 X도 가스마스크도 없는 판국이었다. 보비의 과한 태도에 서준과 요한이 서로를 멀뚱히 마주 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보비는 가스마스크가 죽은 걸 모르는구나.’
정보의 불균형이었다. 크리스티나를 비롯한 일행이 온갖 고생을 할 동안 보비는 이곳에 얌전히 갇혀 있었으니 상황 돌아가는 꼴을 알 리가 만무했다.
서준은 아주 잠깐 요한의 손을 흘깃거렸다. 피로 젖은 손끝이 왜인지 눈에 박혔다. 가뭄에 시달리는 논처럼 메마른 심장이 또 심술을 비죽 내비치려 했다. 서준은 근 십 년 치의 자비를 사용해 간신히 악독한 심보를 가라앉혔다.
“우리는 누구처럼 친구를 살인마한테 팔지 않으니까 보비도 챙기도록 하자.”
“준아, 늘 생각하지만 넌 정말 됨됨이가 고와.”
“당연한 말을?”
요한이 서준의 공명정대한 성품에 감탄했다. 보비는 이 촌극에 할 말이 몹시 많아 보였으나 입이 막힌 관계로 그저 눈만 사정없이 깜빡거렸다.
어차피 차 열쇠도 찾은 마당에 보비를 남겨 둘 이유도 없었다. 물론 좌석이 부족하다면 트렁크에 들어갈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요한은 보비의 양 볼을 누른 다음 가능한 접촉 부분을 최소화해 양말을 다시 끄집어냈다.
“흐뵷,”
서준은 보비가 흘리는 괴상망측한 신음에 어깨를 떨었다. 덩어리는 질척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침으로 축축하게 젖은 양말이 떨어지는 소리와 보비의 콧소리는 정말이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끔찍했다.
“구하러, 크흥. 와 줄 줄 알았어, 요한.”
보비가 콧물을 훌쩍거리며 눈물을 줄줄 쏟아 냈다. 그는 자신의 입을 비인도적으로 막은 사람 또한 요한이라는 것을 외면하려는 듯했다. 서준은 요한의 가슴팍에 머리를 들이미는 보비에게 그 사실을 일깨워 줄까 잠시 고민했다.
“이거 상당히 고전적인걸?”
어렵지 않게 보비의 두상적 포옹을 피한 요한은 의자 뒤편으로 갔다. 보비의 손목과 발목은 거슬거슬한 밧줄에 묶여 있어 풀기 어려운 편은 아니었다. 서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 취향이야 여기 널린 것만 봐도 알 만하지.”
오두막에 즐비한 가스마스크의 전리품은 손수 손질한 기색이 역력했다. 참으로 역겨운 취미였다. 요한이 작업대 안쪽에 상체를 쑥 내밀고 언제 씻었는지 모를 칼을 집어 드는 사이 서준은 보비에게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보비, 손목 안 따가워?”
“당연히 따갑지! 쓸려서 엄청 아파! 그만 떠들고 빨리 풀어 달라고. 응? 그, 그 미치광이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잖아. 너흰 왜 그렇게 여유로운 거야!”
“아, 그 살인마 말인데 죽었거든. 왜, 너하고 좋아 죽던 괴물 있잖아. 그게 잡아먹었어.”
“내가 언제 그 괴물하고 좋아 죽었다는 거야!”
“보비…. 난 네 은밀하고 불쾌하고 반사회적인 취미에 왈가왈부할 마음은 없으니 안심해.”
서준의 격려 덕분인지 희게 질려 있던 보비의 안색에 혈색이 돌아왔다. 서준은 보비의 웃옷에 오른손을 문지르며 괜스레 그를 구속한 밧줄을 만지는 척했다.
오리주둥이처럼 비죽 나온 보비의 입술이 또 무어라 대거리를 하려 했으나, 그는 갑작스레 몸을 굳히고는 침을 꼴깍 삼켰다.
보비는 아무래도 인간적인 한계가 있어 자신의 목을 한 바퀴 돌리지는 못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등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예사롭지 않은 소리를 들으며 불길한 상상을 켜켜이 쌓아 갔다.
“요, 요한. 지금 내 뒤에서 뭘 하는 거야?”
“뭘 하다니, 보비. 널 풀어 주려고 노력 중이야.”
“그건, 고맙지만. 소리가 이상하지 않아? 왜 쓱싹거려? 이건 마치….”
요한의 자못 유쾌한 대답도 보비의 불안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보비의 거뭇한 눈가가 바르르 떨리자 서준은 얼씨구나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혓바닥을 움직였다.
“보비, 요한은 널 위해서 손톱이 죄 빠진 손으로 노력하고 있어. 그런데 넌 편하게 앉아 있기만 하면서 불평하는 거야? 네 안면 가죽은 도대체 몇 센티야? 도대체 사회에 나가서 어떻게 행동하려고 그래?”
“시, 시끄러워! 으힉! 요, 요한! 내 손목에 뭔가 차가운 게 닿았어!”
“아, 조금 실수했어. 괜찮아. 보비, 아무 일도 없어. 나만 믿어. 그런데 혹시나 해서 묻는데 파상풍 주사는 맞았지? 정말 그냥, 갑자기, 어쩌다 생각나서 하는 말이야.”
“…….”
이제 보비는 자신의 운명에 순응한 듯 얌전히 눈물만 흘렸다. 다행히 그가 몸부림치지 않을수록 요한의 칼질도 능숙해져 빠르게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의자에서 일어난 보비는 태어나서 처음 걷는 병아리처럼 다리를 바들바들 떨었다. 겨우 자유로워진 손으로 보비는 제 얼굴을 더듬거리며 흐느꼈다. 비틀거리는 발걸음이 요한을 향했다. 보비는 비록 제 손목까지 썰어 버릴 뻔했지만 어쨌든 밧줄을 풀어 준 요한이 서준보다는 낫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죽는 줄 알았어. 죽어 버리는 줄 알았다구! 저, 저 브래스처럼!”
크게 뜨인 눈동자와 떨리는 손끝이 오두막의 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브래스가 등을 보인 채 누워 있었다. 손목과 발목이 묶여 온몸이 뻣뻣했다. 신기하게도 그의 공허한 눈빛 또한 천장을 향했다.
혀를 빼물고, 눈조차 감지 못한 시신은 보비와 달리 사람을 벗어난 자태였다. 사인은 명백했다. 목이 돌아가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있던 거야?”
서준은 저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혼잣말했다. 그야 가스마스크한테 잡혀갔으리라 여기긴 했으나 토막 난 살점과 보비의 존재가 발하는 충격이 너무 커 순간적으로 잊고 있었다.
“너희가 이곳에 들어올 때부터 있었다고! 왜 몰랐던 거야? 내가 계속 무서워했는데 이상한 말이나 하고!”
“시체가 너무 많아서 이렇게 사지 멀쩡하면 존재감이 부족하다고.”
“미, 미친 소리를!”
보비가 기겁하며 양팔을 퍼덕거렸다.
“나보다 먼저 잡혀 있었어. 그놈이 나를 이곳으로 끌고 왔는데, 이, 이 개자식이, 그러니까, 브래스가 나를 대신 죽이라고 애원했어.”
울음이 섞인 목소리가 더듬더듬 상황을 설명했다. 가스마스크에게 끌려온 보비를 맞이한 건 이 끔찍한 오두막과 브래스였다. 그 또한 잡혀 온 몰골이었으나 브래스는 새로운 제물을 바치고 자신의 목숨을 온존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가스마스크는 브래스의 제안이 썩 달갑지 않았던 듯했다. 보비가 철제 의자에 꼼짝없이 붙들리는 동안 브래스는 처절하게 애원했다.
“모든 걸 말했으니 도와 달라는 둥, 훌륭하신 형님이라는 둥! 나를 머저리라고 부르면서 원한다면 한 손 거든다고, 우윽….”
보비는 끝까지 말하는 대신 고개를 저었다. 그가 알려 주지 않아도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는 일목요연했다. 서준은 브래스의 눈꺼풀을 덮어 주는 대신 보비에게 다가갔다.
“그다음은, 보비? 무슨 일이 있었어?”
“그다음….”
몽롱한 시선이 서준의 창백한 뺨 언저리를 훑었다. 정확하게는 초점이 바로잡히지 않았다고 해야 옳았다. 보비는 주눅이 들어 웅얼웅얼 혼잣말처럼 말했다.
“날 감금하고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캐물었어. 말할 수밖에 없잖아! 여긴 정말 미친 곳인걸. 하지만 내 말을 들어도 믿는 것 같지는 않았어. 꼭 내가 약에 취해 헛소리라도 하는 것처럼 어깨를 추켜올리고, 그러다가 무슨 벨 소리 같은 게 나더니 나갔어. 그리고 너희가 왔지. 나는 정말 무서웠다고. 여긴 너무 어둡고, 깜깜하고, 옆에는 브래스가 죽어 있고….”
미쳐 버리는 줄 알았다며 보비가 가슴을 부여잡았다. 서준은 느릿하게 오두막을 둘러보았다. 브래스의 시체와 보비의 지린내, 숱한 죽음이 머무르는 곳이었다. 수많은 상념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마지막에 와서 느껴지는 감정은 싫증이었다. 진절머리가 났다. 브래스의 인생이 애달파진 게 아니다. 모든 게 지긋지긋했다. 새삼스럽게 이곳이 역겨워졌다. 그리고 서준은 원흉을 알았다. 딱 한 번 들었을 뿐이지만, 결코 잊지 못한 이름이었다.
“좆같은 톰 조지….”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거칠게 목을 긁으며 나왔다. 그는 따끔거리는 눈가를 매만지며 분기를 삭였다. 그때였다. 그 나름대로 충격을 갈무리하던 보비가 돌연 목청 높여 소리쳤다.
“위대한 명감독을 비하하지 마! 나쁜 건 어디까지나 현실과 창작물을 구분하지 못하는 놈들이라고! 이, 이래서 타지에서 온 놈들은 안 돼. 톰팃톳이 배출한 최고의 거장에게 무슨 말버릇이야!”
“뭐?”
서준은 기가 막혀 보비를 내려다보았다. 보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그의 가슴팍이 크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요한도 어처구니없어하며 보비의 정수리를 꾹 눌렀다. 금방이라도 총탄처럼 튀어 나갈 것 같던 보비가 점점 낮아졌다.
“보비, 네가 그 감독을 좋아하는 건 알지만 생각을 해 봐. 우리가 오늘 한 고생이 얼만데 욕이 안 나올 수가 없잖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이러는 건 너무 부당해! 톰 조지가, 조 룸펠슈틸츠헨 감독이 얼마나 훌륭한 영화를 찍었는데 사람들은 한나 오 랜턴과 친분이 있었다는 걸 빌미로 헛소문이나 퍼뜨리고! 물론 룸펠슈틸츠헨 감독이 한나와 동향에, 영향을 받은 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래서 더욱 훌륭하게 고증을 지켰잖아. 합숙소야 워낙 말이 많아서 세트장에서 찍었지만 그런 건 이해를 해 줘야지. 요한, 너도 그래! 너도 룸펠슈틸츠헨 베이비잖아!”
“글쎄, 그거야 부모님들이 좋아하는 거고…. 솔직히 그 감독은 여기 배경으로 찍은 거 말고는 줄줄이 말아먹었다며? 내 생각에는 그게 실력이야. 네 눈에 낀 걸 한국말로는 콩깍지라고 해.”
서준은 보비와 요한의 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대수롭지 않게 쏟아지는 말의 소용돌이 속에서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던 입술이 달싹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너희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당연히 ‘블랙 레이크의 놀라운 진실과 거짓, 그리고 살인마와 미녀’ 말하는 거지! 크리스티나네 할머니가 찍은 영화!”
보비가 콧김을 뿜으며 버럭 외쳤다. 처음 듣는 제목이었다. 그러나 벼락같은 깨달음이 정수리를 쪼개듯 찾아왔다.
한국 비디오 번안명 《피 흘리는 호수의 살인마》의 원제는 《블랙 레이크의 놀라운 진실과 거짓, 그리고 살인마와 미녀》였다. 유명하지 않은 영화의 제목이 번역 과정에서 본래의 이름과 달라지는 경우는 드문 일이 아니다.
하몽 캠프장에서 보내게 된 7월 4일이 영화와 다른 건 당연했다. 서준의 삶은 세트장 위에 세워지지 않았다. 그는 빙의자가 아니었다.
환생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