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
얼굴이 서준과 정면으로 마주친 요한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아리송한 눈빛을 했다. 서준은 낯짝에 가죽 대신 철판을 깔았다는 양 뻔뻔스레 걸어갔다. 그는 자신은 도망친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산책을 했다는 듯 턱을 가볍게 치켜들고 다리와 팔을 흔들었다. 그 꼴이 마치 목각인형처럼 뻣뻣하고 볼품없었다. 약간 볼긋한 눈가가 아니라면 제법 그럴싸한 모양이었을 터이다.
서준은 열 걸음 남짓한 탈선을 무마하려는 듯 애써 태연하게 굴었다.
“어, 음. 맞아. 내 희망 사항이 그거야. 재밌게 사는 거. 잘 먹고, 돌아다니고. 그런 거.”
서늘한 공기에 차게 식었던 목덜미에서 어느새 식은땀이 흘렀다. 기이한 언어를 쏟아 내던 주둥이는 접착제를 바르기라도 했는지 딱 붙어 벌어지지도 않았다. 할 말이 없어 갈팡질팡하는 서준에게 요한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엄선한 우리의 추억들은 어땠어?”
“…….”
심지어 그는 대놓고 감상까지 원하고 있었다. 기대로 번뜩거리는 눈빛에 서준은 혓바닥에서 떫은맛을 느꼈다. 어떻냐고 물어도 대꾸할 거리가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그가 추억이라 우기는 삶의 파편은 하나같이 선지자로서 괴로웠던 나날을 되살렸을 뿐이다. 서준이야말로 그 보잘것없는 하루하루 어디에서 사랑을 느꼈는지 되묻고 싶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몸은 가스마스크에게 쫓길 때보다 더한 탈력에 짓눌렸다. 서준은 답답하게 조여드는 목구멍에 부러 크게 공기를 넣었다. 그는 요한의 손목을 가볍게 건드린 후 한 걸음 멀어졌다.
적어도 요한은 제 마음이 진실이라 여기고 있으며, 오늘 그가 보인 헌신은 서준처럼 이기적이고 자신만 아는 비열한 종자에게도 어설픈 감상을 뽑아냈다. 서준은 메마른 뺨이며 콧등을 연거푸 쓸어내리며 간신히 대꾸했다.
“그래, 네가 나하고 이성적….”
그런데 말이 좀 이상했다. 서준은 얼른 단어를 바꾸었다.
“동성적 접촉을 원하는 건….”
빠르게 달싹거리던 입술이 서서히 느려졌다. 서준의 시선이 흔들거렸다. 아무래도 이것도 잘못된 선택 같았다. 그는 서둘러 말을 정돈했다. 말을 세 번쯤 고치니 이쯤 되면 입에서 나오는 대로 이야기하는 감이 있었다.
“성적인 접촉을 바라는 건 이해했어.”
“준아. 마음이야, 마음. 티끌 없이 깨끗하고 새하얀 마음.”
요한이 재빨리 정정했다. 그의 눈초리가 순간 여우처럼 가늘어져 교활한 빛을 띠었다. 그러나 서준이 눈을 깜빡거리는 사이 간교한 눈빛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양순한 표정만이 남았다. 서준은 요한을 의심스럽게 흘겨보며 입술을 비죽거렸다.
“그래, 그 마음. 우선 확실하게 말하는데 나는 누굴 사귀고 그럴 마음이 없어.”
당장 제 코가 석 자인데 누가 누굴 책임지고 사랑 같은 위험한 감정을 나눌까? 서준의 어조가 점점 심드렁해지자 요한이 맹금류처럼 날카롭게 질문했다.
“평생 그럴 거야? 독거노인이 될 생각이야? 인생의 말년을 혼자 즐겁게 보내 버릴 작정이야, 준아?”
“뭐? 평생은, 아니. 평생까지는….”
서준은 말꼬리를 붙들고 늘어지는 요한의 태도에 눈썹을 찌푸렸다. 당연하지만 명확한 청사진을 그리지는 않아도 그 나름대로 행복한 가정을 꿈꾸었다.
비록 서준의 모친과 부친이 때때로 미치광이처럼 행동할지라도 사이좋은 부부이자 부모였다. 서준은 아버지가 어머니의 귓가에 큼직한 꽃송이의 리시안서스를 꽂아 드리며 청춘을 만끽하는 연인처럼 굴 때, 어머니가 아버지의 홍차에 각설탕을 단번에 다섯 개나 떨어뜨리고는 소녀처럼 웃을 때 메마른 논밭처럼 버석한 가슴 언저리가 축축하니 젖어 들어 기쁘고도 수줍은 기분이 들었다. 온화한 가족이었다.
물론 이도 저도 저주받은 톰팃톳에서 벗어난 뒤의 일이다. 고립무원의 무인도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니 최소한의 인간관계야 있지만, 그는 결코 이곳의 주민과 사사로운 관계를 맺을 생각이 없었다.
서준의 빈약한 인연으로 말할 것 같으면 태어나서 줄곧 함께 살아 온 부모님, 금·은·동 트리오에게 찍힌 동병상련의 우애로 이어진 스테판 오, 콧수염이 멋진 점주 프레드, 왜인지 종종 입술을 핥으며 바라보던 브렌, 길버트와 헤어진 후 대화를 나눈 플로렌스, 유독 친근하게 구는 리처드의 동생 헨리,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오던 보비….
‘이거 생각보다 많은데?’
서준은 손가락을 하나씩 곱다가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나 더욱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제 보비는 죽었으니 제외해도 될 성싶었다. 서준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요한에게 당부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겨울철의 나뭇가지처럼 마른 손가락이 호선을 그리는 입술을 툭 두드렸다. 바다처럼 짙은 색의 눈동자는 눈앞의 광경을 선명하게 투사했다.
“평생 혼자 살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것도 여길 나간 다음의 일이야. 내 말 이해하지, 요한? 사람의 일에는 순서란 게 있잖아.”
속이 후련해진 탓인지 그의 목소리는 나긋하기까지 했다. 말끝은 둥글어 억세게 내뱉는 예언과는 천지 차이였다. 요한은 잔상처와 땀, 굳은 핏자국으로 지저분하고도 섬뜩한 아름다움을 풍기는 서준을 눈에 담았다.
여윈 팔과 다리, 날렵한 턱선과 희게 질린 피부는 불길한 미모를 돋보이게 하는 요소였다. 죽음이 두렵다고 말하지만 역설적으로 서준의 외모는 밀랍을 덧바른 송장처럼 덧없고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요한 자신도 이 가느다란 몸뚱이를 품에 안고 도드라진 뼈마디를 일일이 훑고픈 욕구를 알았다. 하지만 그는 인내 또한 무엇인지 아는 남자였다.
“그건 다시 말해 지금은 아니어도 나중에는 사귈 마음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
“어, 그렇지.”
꺼림칙한 기분이 목덜미를 스쳤다. 하지만 이미 엉겁결에 대답을 해 버린 뒤였다. 서준의 왼쪽 눈 밑부분 살이 움찔 떨렸다. 요한이 환하게 웃으며 냉큼 말했다.
“그때까지 기다릴게. 준아, 좋아하는 사람 있어?”
“아니, 없는데….”
거구의 남자가 온몸을 들이미는 것은 제법 박력 있었다. 서준은 빈약한 진실을 토해 냈다.
“그럼 괜찮네. 네가 마음 아파 할 일도 없고. 우리가 서로 같이 다니고 알아 가면서 준아, 너는 그동안 연애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되는 거야.”
“뭐? 내 의견은 어쩌고?”
“물론 네 의견이 들어간 결론이지. 우리 모두 행복해지기 위해 취합한 거야.”
서준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요한은 마치 젖은 걸레처럼 질척거렸다. 차라리 으름장을 놓았다면 서준도 거세게 반발했겠지만 그의 어조는 비굴한 애원에 가까웠다. 결국 서준은 새끼손가락을 걸고 손을 흔들었다. 이 모든 게 순식간에 벌어졌다….
황당한 시선으로 요한을 올려다보자 그는 방긋방긋 입꼬리를 올리며 눈을 곱게 접었다. 만약 장소가 하몽 캠프장이 아니고 음울한 달빛이 아닌 한낮의 태양이 비쳤다면 근사한 광경이었으리라. 하지만 요한의 몸 곳곳에는 검붉게 말라붙은 피와 체액, 그리고 재가 묻어났다.
서준은 요한의 손을 흘깃 보고는 입 안쪽의 살을 깨물었다. 그를 끝까지 거부하지 않은 것은 어디까지나 전략적인 행동이었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진창이 된 속이 너무 쓰라렸다.
“그런데, 준아. 너희 부모님이 널 찾아오시거나 하지 않을까?”
“응?”
“생각해 보니 우리 부모님이야 캠프장에 간 걸 아니까 연락이 없어도 그러려니 하겠지만 넌 집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 아니야?”
“아….”
서준은 상식적인 질문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는 이토록 부자연스럽게 바깥과 연락이 되지 않는 이유를 알았으나 요한은 공포 영화의 억제력이 작용한다는 진실을 알지 못하니 당연한 궁금증이었다. 서준은 볼을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우리 부모님은 오늘 험블비 부부 댁에서 저녁 식사를 같이하기로 하셨는데.”
“아, 얼마 전에 다리를 다친?”
“어어. 그분들.”
험블비 부부는 이웃에 사는 금실 좋은 노부부였다. 부인은 심장이 좋지 않았고 남편은 얼마 전 계단에서 굴러 한쪽 다리에 깁스했다. 자식 내외는 도시에 살며 종종 연락한다지만 서준은 그들을 본 적이 없었다. 험블비 부인이 그의 외조모와 친하다고 들었으나 막상 서준 본인은 조부모의 얼굴조차 몰랐다. 그는 험블비 부인을 볼 적이면 고작 조연의 설정값치고는 섬세하다고 남몰래 투덜거렸다.
“어쩌면 식사 자리가 길어져서 내가 방에 먼저 들어가서 잔다고 생각하실지도.”
서준은 머리를 요한의 어깨에 살짝 기대며 중얼거렸다.
“운이 나빴던 거지.”
옆에서 숨을 크게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서준이 목을 똑바로 세우면서 고개를 돌리자 요한의 귓불이 어찌나 붉던지 검푸른 시야 속에서도 훤히 보였다.
“응, 운이구나. 그렇구나, 준아.”
그가 유난히 부끄러워하는 꼴을 목격하자 서준도 덩달아 목에 열이 올랐다. 서준은 요한과 아주 약간의 거리를 두고 걸었다.
그들은 가스마스크가 보비를 끌고 갔으리라 추정되는 길을 한참을 걸었다. 덕분에 서준은 요한의 심장 소리가 참으로 크고 건강하게 울린다는 별 시답잖은 사실을 알았고, 괴상한 질문을 듣기도 했다.
“준아. 고무를 끼고 접촉하는 건 어때?”
“내 장갑 물어보는 거야? 필요하니까 끼는 거지. 아무래도 편하진 않아. 가능하면 맨살이 좋지.”
“그렇구나. 고려할게.”
그리고 요한이 아련한 얼굴을 한다면 무척 놀랍게도 제법 우수에 찬 모습이 그럴싸해 보인다는 것까지도. 서준은 목구멍이 갑갑해 괜히 입을 벌려 공기를 받아들였다. 그때 옆에서 요한이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맞아, 준아. 사실 첫눈에 반한 건 아니야.”
“믿지도 않았어.”
너무하네, 하며 요한이 겸연쩍다는 듯 콧등을 긁었다.
“그냥 보다 보니 좋아졌어. 볼수록 좋았어.”
깊은 색의 눈동자가 눈꺼풀 안쪽으로 사라졌다. 가볍기 짝이 없는 눈웃음과 그만큼이나 무게감이 부족한 고백의 연장이었다. 하지만 서준은 웃지 못했다. 덜컹 흔들린 심장이 갈비뼈를 때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의 발이 무심결에 멈췄다. 그리고 서준이 입을 열기도 전에 무언가 밟혔다.
따닥!
발뒤꿈치를 내려다보자 바닥에 으깨진 개암이 보였다. 딱딱한 껍데기가 깨지며 난 소리는 대화 외에는 정적으로 가득하던 숲에 크게 울렸다. 요한도 더 걸어가지 않고 멈추어 그것을 보았다. 동시에, 그들은 알아차렸다.
하몽 캠프장을 둘러싼 숲 사이에 오두막이 있었다. 주절주절 떠들던 요한과 서준은 입을 다물고 조용히 걸었다. 길도 없이 교묘하게 가려진 그곳으로 들어가자 자그마한 공터가 나왔다.
뾰족뾰족한 가장자리를 가진 둥근 잎사귀가 무성하게 난 대여섯 그루의 나무가 늪지 주변을 장식하듯 솟아났으며, 바람결에 이파리를 흔들었다. 파르르, 파르르 잎이 부딪히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오두막의 반쯤 열린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냄새와 늪의 썩은 내가 섞여 지독한 악취를 풍겼다.
서준은 코가 마비될 듯 고약한 냄새에 눈을 크게 홉떴다. 이곳은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가스마스크의 작업장, 하몽 생산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