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45)화 (45/156)

#045

요한은 한 걸음 더 다가오며 얼굴을 가깝게 들이밀었다. 코가 가볍게 부딪히며 작은 소리가 났다. 번쩍번쩍한 광채를 품은 눈동자가 말 그대로 코앞에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토로하는 것이 더없이 기쁜 듯 활짝 웃으며 외쳤다.

“몇 번이라도 말할게.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외면조차 불가능한 거리에서 들려오는 고백은 가히 투척에 가까웠다. 이 그악스러운 실토에 서준은 숨을 들이켜고 뒷걸음질 쳤다. 서준이 물러나자 요한은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아무리 움직여도 같은 간격을 유지했다. 요한이 뜨뜻하게 내뱉는 숨결은 서준의 바짝 마른 입술을 간지럽혔다. 고작 한 뼘의 거리나마 벌어져 있건만, 왜 온몸이 이토록 근질근질한지 서준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손바닥과 발바닥에서 올라오는 자리자리한 느낌에 괜스레 입술을 깨물고 피딱지가 인 손바닥을 손톱으로 꾹 눌렀다. 눌린 살갗 아래에서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의 감촉은 이토록 생생한데 지독한 피로만큼은 느껴지지 않았다. 서준은 잇자국이 남은 아랫입술을 질겅이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하지만 그건 이상한걸….”

말을 하면서도 그의 시선은 허공을 맴돌다 바닥으로 향했다. 원체 용기와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생활 습관이 마치 업보처럼 돌아왔다. 주눅 들어 체온이 낮아진 서준의 뺨에 열로 뜨끈한 피부가 슬쩍 닿았다. 마디가 두드러진 손등은 마냥 부드럽기보다는 단단하고 억센 구석이 있었다. 손바닥뼈의 불룩한 부분이 광대 부근을 스쳤다.

“준아, 내가 싫어?”

낮은 목소리에서 어렴풋하게 웃음이 섞였다. 순간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말문이 막혀 가슴이 답답해졌다. 서준은 자신의 눈 아래가 벌겋게 달아오른 줄도 모르고 웅얼거렸다.

“싫은 건 아니야. 그런 건 아니지만, 그렇지만.”

어설피 우물거리던 입술이 더듬더듬 움직였다.

“난 죽고 싶지 않아.”

갈대처럼 흔들리던 목소리가 점차 힘을 얻었다.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다. 온 삶에 걸친 단 하나의 신념이라 해도 좋았다. 아무리 이기적인 마음이라도 평생토록 되뇐 소원이었다.

서준은 목을 빳빳이 세우고는 요한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는 오히려 억울한 눈초리로 요한을 노려보았다. 아랫배를 뜨끈하게 데우던 열기와 괜히 손과 발을 움츠리던 적막한 공기도 사그라들었다. 서준이 눈을 부리부리하게 치뜨고는 이를 악물었다.

“다 잘되고 있었는데 왜 이러는 거야? 요한, 잘 들어. 너 지금 잘못하고 있는 거야. 단단히 착각하고 있다고.”

왜냐하면 그는 크리스티나와 이어질 인연이었고, 그것이 옳았다. 아무리 바뀐 장면이 많다지만 세상에는 근본이라는 것이 있지 않던가? 파이널 걸인 크리스티나가 크리스티나이며, 그녀가 괴물을 무찌른 사실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증명이었다. 평생을 벗어나려 했으나 적어도 오늘 하루가 다 지날 때까지 서준은 이 견고한 설정 놀음에서 벗어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서준은 요한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요한 젠틸이 아닌 《피 흘리는 호수의 살인마》의 남자 주인공을 응시했다.

“아….”

흐릿한 신음이 요한의 입술 틈으로 새어 나왔다. 광인처럼 빛나던 그의 시선이 힘없이 기울어졌다. 화가 났을까, 서준은 의심스럽게 요한을 힐끔거렸다.

하지만 요한은 희끄무레하게 입꼬리를 올리더니 차게 식은 이마를 문질렀다. 다정한 손길이었다. 그는 마치 애걸하듯 물기에 젖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준아, 준아. 나를 봐. 응? 나를 똑바로 보고, 내 목소리를 들어 줘.”

불현듯 치솟은 거부감만 아니었다면 무심코 응석을 부릴 정도로 부드러운 살갗이었다. 그러나 서준은 얼굴을 굳히며 그를 거세게 떠밀었다. 주먹으로 가슴팍을 때리자 둔탁한 소리가 고요한 캠프장에서 둔중하게 울렸다.

물론 살이 거의 없는 호리호리한 몸뚱이가 대단한 일을 벌일 리는 만무했다. 요한의 하체는 땅속에 뿌리 내린 잡초처럼 단단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반면 자신이 밀어 낸 주제에 안색이 파르라니 질린 서준은 입만 벙긋거리다 결국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뻣뻣하던 목도 거북이처럼 굽어졌다. 어디에서 솟아나는지 모를 비참함이 끝없이 밀려왔다.

“아니, 듣고 싶지 않아. 네 말은 하나같이 엉터리야. 이상해. 차라리 흔들다리 효과라고 하는 게 낫지! 솔직히 네가 말한 사랑의 역사니, 뭐니, 운운보다는 그편이 훨씬 타당해.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라고.”

바닥을 기어가는 개미조차 보이지 않는 기괴한 밤이었다. 잔인한 살육이 난무하는 두려운 하루였다. 이제 조금만 더 버티면 끝날 날이었다. 평생을 건 기다림이었다. 아무리 길게 느껴져도 시간은 무정하면서 서늘하게 지날 것이고, 종래에는 다디단 자유가 찾아올 터였다.

“준아….”

애달픈 접촉은 혼란을 가라앉히는 대신, 불안한 마음을 더더욱 완고하게 몰아붙였다. 숨이 차도록 뛰어다닐 때는 되레 느끼지 못했다. 가스마스크의 하몽 나이프와 괴생명체 X의 촉수가 번들거리는 빛을 발할 때는 머리 구석으로 몰아냈던 상념이 스멀스멀 기어 왔다.

본디 우자가 그러하듯 충동은 소신으로 탈바꿈했다. 서준은 마구잡이로 지껄여 댔다.

“이상하게 굴지 마. 그냥 평범하게, 평소처럼 해. 오늘따라 왜 이러는 거야?”

그리고 요한으로 말하자면 통찰력이 있는 청년이었다. 그는 타인과 공감하려는 노력만은 현저히 부족했으나 사랑이란 사람이 평소 안 하던 일도 쉽게 저지르게 만드는 놀라운 동력이었다. 가느스름하게 길어진 푸른 눈초리가 떨리는 손끝과 흐려진 초점 따위에서 기민하게 공포를 짚어 냈다.

사실 서준의 태도는 겁먹은 개가 짖는 것과 비슷했으므로 알아차리기 쉬운 편이었다. 하지만 앎과 실천은 언제나 붙어 다니는 친구가 아니었으며 요한 또한 늘 행동하는 소년이라 불리기에는 팔과 다리가 훌쩍하니 길었다. 다만 그는 사랑을 표현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준아, 뭘 그렇게 무서워하는 거야? 널 두렵게 만드는 게 대체 뭐야?”

“말 못 해. 너, 너희는 이해하지 못해.”

크리스티나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의 아름다운 얼굴, 부모님의 억센 손, 차라리 뇌의 현혹이길 바랐던 예지, 잔혹한 살인마와 우주에서 날아 온 괴물…. 이 수많은 증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요한은 이해할 수 없었다. 서준이 지닌 공포의 근원을 진정한 의미로 헤아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젊은 나이에 트럭에 치여 사망하고 다시 태어난 세상이 누군가 서툰 손길로 만진 곳이라는 걸 경험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이해 못 할 절망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군들 타인은 모르는 절망을 지니기 마련이었다. 서준 또한 에어리가 괴생명체 X에게 붙잡혔을 때 윌리엄이 느낀 절망을 모른다. 보비가 시체와 껴안았을 때의 절망을 모른다. 크리스티나가 총구 앞에서 맛본 절망을 모른다. 요한이 서준이 추락하는 정경을 본 절망을 모른다.

“하지만 준아, 그건 당연한 거야. 나는 너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 그렇지만 그건 너도 그래. 내가 아무리 말해도 네가 내 마음을 전부 아는 건 불가능하겠지. 사람이,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어떻게 다 알겠어. 그러니까 함께 있고 싶은 거야. 가능한 가까이서 이해하고 싶어서.”

이해를 못 하니까… 하며 요한은 말을 끌었다. 그는 일부러 천천히 혀를 움직였다. 숨을 밭게 내쉬는 서준의 귀에 입술을 가까이 붙이고 자신의 언어가 전달되도록.

“준아, 왜 그렇게 죽기 싫어해? 살아서 뭘 하고 싶어? 왜 살고 싶은지, 살아서 뭘 하고 싶은지 알려 줘. 나는 말이야, 널 더 알고 싶어. 네 곁에서 살고 싶어.”

“나는….”

서준은 여전히 시푸른 달을 올려다보았다. 새까맣던 하늘은 언뜻 푸른 색조를 띠었다. 그러나 시야는 여전히 어두워 길잡이라고는 저 먼 곳에 있는 지구의 위성뿐이었다. 깜깜한 밤을 희미하게 비추는 빛을 바라보며 서준이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나는 그냥…. 맛있는 걸 먹거나. 멀리 여행 다니고 싶어. 면허를 따서 트럭을 몰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새로 나온 영화도 보고, 근사한 풍경도 찾아다니고, 새로운 곳에서 살아 보고 싶어. 난 그냥 그런 걸 계속하고 싶어.”

점점 목이 멨다. 서준은 연신 침을 삼키고서야 마침내 말을 끝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초라할 정도로 평범한 소원이었다. 하지만 서준은 이렇게나 빈약한 꿈을 박탈당했다. 당연히 요한은 모른다. 그는 그저 앙상한 어깨를 힘껏 껴안고 다정하게 애원했다.

“할 수 있어. 준아, 나는 널 막으려는 게 아니야. 나는, 나도 그냥 맛있는 걸 먹고 여행 다니고, 새로 나온 영화와 근사한 풍경을 보며 새로운 곳에서 살아가는 네 곁에 있고 싶어. 오직 그것뿐이야.”

요한의 열렬한 고백은 서준의 두 다리에 신묘한 힘을 불어넣었다. 피로가 묵직하게 쌓이고 따끔거리던 발바닥에서 활력이 샘솟았다. 매서운 박동은 서준에게 단 한 가지를 요구했다. 도주였다.

지금 선지자를 지배하는 장기는 선홍색 두뇌가 아닌 붉은 피가 흐르는 심장이었다. 그는 말 그대로 심장이 시키는 대로 행동했다. 말인즉슨 곧장 뒤돌아 줄행랑쳤다.

“준아!”

황망한 표정의 요한이 눈을 크게 뜬 모습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온몸에 열이 오른 서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 나갔다.

딱, 십 보만큼.

“준…아?”

등을 향해 요한의 목소리가 잠시간 파업했던 정신머리와 함께 날아들었다. 서준은 우두커니 멈춰 서 입술을 짓씹었다. 우릿한 고통이 둔하게 굳은 머리를 일깨웠다.

작금의 상황이 어떠한가? 무려 연쇄 살인마와 괴물이 판치는 기기묘묘한 공포 영화 속 세상이었다. 비록 사람 피만 보면 흥분하는 그것들을 위대한 크리스티나가 무찔렀지만, 하몽 캠프장을 완전히 빠져나가지도 못한 마당이다.

그런데 혼자 칠렐레팔렐레 돌아다니려 하다니! 어리석기가 보비보다 더했다. 서준은 속으로 제 쓸모없는 뇌세포를 마구잡이로 욕했다.

‘정신이 빠졌지, 아주.’

사랑 고백과 목숨의 위협 중 두려운 걸 고르라면 정답을 고를 것도 없이 단연 후자였다. 서준은 누구에게 내는지 모를 울분을 뱃속에 꾹꾹 밀어 넣고는 자연스럽게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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