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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44)화 (44/156)

#044

태어나길 그런 사람이 있다. 오른손잡이인 사람, 키가 큰 사람, 머리숱이 많은 사람, 눈 색이 초록인 사람, 감수성이 유별난 사람, 타인보다 이기적인 사람.

요한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보편적인 사람이었다. 좋아하는 것에 순서가 있으며 사랑에 설레하고 휴일에는 건실한 취미를 즐기는. 그렇기에 그는 자신만만하게 운을 뗐다. 바다처럼 짙푸른 눈이 수많은 감정을 품고 부드럽게 일렁거렸다.

“네가 톰팃톳에 온 첫날, 우리가 처음 마주친 그 순간부터 나는 너에게 반했어. 준아.”

“뭐? 거짓말하지 마. 그날은 나도 뚜렷하게 기억해. 내 인생에서 오늘을 제외하고 가장 절망스러운 날이었거든. 이사 온 기념으로 우리 집에서 파티를 했고, 넌 너희 부모님을 따라 들어왔지. 날씨는 좋았어. 정원에 길게 놓인 식탁보의 무늬가 햇빛에 희게 비쳐 잘 보이지 않을 만큼. 그 위에는 아이싱이 끝내주게 단 컵케이크가 있었지. 나는 내 방에서 곰 인형을 껴안고 몸을 공벌레처럼 구기고 있었어. 그리고 너와 눈이 마주쳤지. 그래, 그때 말이야. 넌 보타이를 맸었지?”

서준의 눈이 과거를 반추하며 가늘어졌다. 그는 미래를 예언할 때보다 명징한 시선으로 추억을 더듬어 나갔다.

서준은 그리 어렵지 않게 요한의 보드라운 정수리와 작고 앙증맞은 나비넥타이를 머릿속에서 건져 냈다. 연속된 기억은 당연하다는 듯 잇따라 떠올랐다. 두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있던 자신이 코를 훌쩍거리며 창문턱에 얼굴을 내밀었다. 지루함을 못 이겨 하품하던 요한과 눈이 마주친 건 우연에 불과했다. 여섯 살과 여덟 살은 서로를 보았다. 짧은 시간이었다.

“그때, 네 시선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자면, 너는 나를 무슨 말하는 개구리처럼 봤어. 그러고는 흥미를 잃었지.”

양서류 같은 꼬마는 그리 인상 깊은 존재가 아니었다. 대신 요한은 더 가까이에 있는 컵케이크에 관심을 돌렸다. 그는 컵케이크의 냄새를 슬쩍 맡았다. 물론 요한은 당분과 탄수화물이 폭발적인 구성의 간식에 손을 뻗는 대신 고개를 살래살래 저은 뒤 멀찍이 떨어졌다. 어린 요한은 흰 뺨 위에 무료를 설탕처럼 뿌린 소년이었다.

서준은 요한을 응시했다. 이제 어리지 않은 청년이 난처한 기색으로 모호한 웃음을 흘렸다.

“아하…. 우리 준이는 기억력이 비상하구나….”

그는 가슴팍의 주머니를 톡톡 두드렸다. 의미 없는 손짓이었다. 첫마디부터 믿음과 신뢰가 박살 났다. 과거를 날조하려던 요한에게는 안타깝게도 톰팃톳에 온 첫날의 기억은 서준에게도 선명했다.

다시 말하자면 요한은 보편하고 보통인 사람답게 진실을 다소 왜곡할 줄 아는 편이었다. 그는 들통난 거짓말에 미련 두지 않고 재빨리 다음 수를 두었다.

“우리의 미시적 첫 만남을 기억해 줘서 고마워. 참 기뻐, 준아.”

“그럴 때 쓰는 단어가 아니지 않아?”

서준은 미심쩍게 요한을 바라보았다. 손등에 앉은 모기처럼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든 성적 긴장감은 다행히 사그라들었으나, 요한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여전히 알아듣기 어려웠다. 물론 서준의 몰이해는 요한에게 큰 장해가 아니었다. 그는 서준만 허락한다면 사흘 밤낮을 앉은 자리에서 떠들어 댈 수 있었다.

“아니긴, 준아, 나는 우리의 관계에 있어 중요하지 않은 건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이번만큼은 거시적 관점이 필요해.”

“거시적 관점…?”

도대체 어린 시절 서로 잠깐 안면 익혔다는 단순한 현상에 있어 다른 관점이 왜 필요하단 말인가? 서준은 혼란스러웠다. 요한은 빙긋 웃으며 서준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우리의 진정한 만남은 그날 밤이었어. 유성우가 쏟아졌잖아. 다들 떨어지는 별을 구경하러 나왔지. 나도 부모님 손을 잡고 깜깜한 밤하늘을 목이 빠져라 올려다봤어. 그런데 나는 어린 시절에는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성격이었거든. 금세 지루해져서 부모님과 거리를 뒀어. 그리고 너를 만난 거야. 준아.”

요한은 다리가 길어 보폭 또한 컸다. 서준은 활짝 웃는 그의 얼굴이 너무 가깝다고 느꼈다. 핏자국을 전부 닦아 내지 못한 피부의 체취가 새삼스럽게 코를 찔렀다.

“너는 쏟아지는 별을 보면서 울고 고함쳤어.”

집 뒤편의 그늘지고 축축한 이끼 냄새가 남아 있는 소외된 정원이었다. 낭만을 말하는 사람들을 지척에 두고 어린 서준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악을 썼다. 밤하늘을 길게 수놓은 아름다운 별의 꼬리에 손가락질하며 타인은 이해 못 할 분노와 서러움, 공포를 게워 냈다.

“그게 시작이었어. 준아, 나는 너한테 시선을 빼앗겼어.”

요한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고, 빠르게 이어 말했다. 목소리에 어딘가 조급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서준은 요한을 기이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과 요한이 낮에 만났건 밤에 만났건 별 대단한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심지어 그는 해가 떠 있을 시간에도 울었고, 달이 뜬 시간에도 울었다. 그저 시곗바늘이 몇 바퀴 더 돌아갔을 뿐이다. 그러나 요한은 마치 중대한 간극이 있다는 양 굴었다. 그 눈빛은 몹시 간절하고 더없이 진실했다.

절실하기까지 한 요한의 태도에 서준은 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는 마침내 자신이 고백받았다는 사실을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하지만 요한 젠틸의 언어를 받아들이기는 부족했다.

요한이 말하는 사랑에는 맥락이 부족했다. 근거가 부족했다. 개연성이 부족했다. 거절을 말하기 이전에 이해를 동반하지 못했다.

“왜?”

버석하게 마른 입술이 의문을 담았다. 서준은 기이한 열기를 품은 차가운 색의 눈동자 대신 모양 좋은 귓불을 흘겨보았다.

“요한, 네가 고백해야 할 사람은 크리스티나잖아.”

“응? 어, 내가? 크리스티나를?”

잠긴 목소리가 반문했다. 요한은 눈을 느릿하게 깜빡거렸다. 그는 잠시 바닥을 보더니 다시 턱을 들었다.

“내가 왜?”

단순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서준의 말문을 막아 버리기는 충분했다. 서준은 꽉 잠긴 목구멍에 침을 삼키고 억지로 입을 열었다.

“왜냐니, 크리스티나가 주인공이잖아….”

세상의 진리를 담은 혓바닥치고는 참으로 볼품없었다.

“음, 그렇지. 크리스티나가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긴 하지.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고, 네 인생의 주인공은 준이 너고. 아, 아니야. 내 인생의 주인공도 너야, 준아.”

요한이 발그레하게 볼을 붉혔다. 그는 공동 주연은 어떻냐며 서준의 의견을 물어보기까지 했다. 혼돈이 서준의 뇌를 구불구불하게 꼬기 시작했다. 그러잖아도 복잡하게 주름진 덩어리에 혼란이 일자 언어 기능의 질이 순식간에 곤두박질쳤다. 서준이 뻣뻣해진 혀를 겨우겨우 움직였다.

“하, 하지만 우리는 둘 다 남자고.”

“준아, 세기말도 아니고 21세기야. 21세기.”

요한은 은근슬쩍 성애적 혼란을 세기로 구분해 무마하려는 수작을 부렸다. 서준은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되고 어지러운 와중에도 간신히 반론을 꺼냈다.

“그래도 어릴 때 처음, 그래. 네 말대로 그날 밤이 우리의 첫 만남이라고 치자. 그렇게 따져도 이상하잖아. 고작 내 우는 얼굴에 네가 반했다 이 말이야? 너 변태냐?”

“당연히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 시작이 그랬다는 말이야. 준아, 내 사랑의 역사는 길어.”

요한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더니 피와 수상쩍은 액체로 젖은 손을 들어 올렸다. 늠름하게 든 것치고는 꼴이 아주 엉망이었다. 하지만 요한의 태도는 몹시 기세등등했으며 그는 일견 여유롭게 검지를 세웠다. 손톱만 붙어 있었어도 제법 그럴듯한 자세가 나왔을 것이다.

“모든 사랑에는 시작이 있어. 그리고 내가 너한테 두 번째로 반한 건 내가 열네 살 때의 일이야.”

“열넷?”

요한이 14살일 때, 서준은 12살이었다. 이번에는 썩 대단한 게 생각나지 않았다. 서준은 요한을 흘깃거렸다. 하고픈 말이 많은 요한은 무언의 권유를 거절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젠틸, 그 나무는 안 타는 게 좋을 거야. 넌 그렇게 말했어. 나는 나무를 탈까 말까 고민 중이었고, 넌 불쑥 나타나서 권유했지. 두꺼운 떡갈나무였고. 참고로 그때 너는 두꺼운 안경을 쓰고 품이 넉넉한 스웨터를 입고 있었어.”

“나무? 아.”

흐릿한 잔상이 눈꺼풀 안쪽을 파고들었다. 휘청거리는 나뭇가지와 떨어지는 소년의 비전이었다. 어렴풋한 장면으로는 정확한 대화가 생각나지 않았다. 오직 한 문장만이 귓가에서 생생하게 들려왔다.

‘요한이라고 불러. 우리가 한두 해 아는 사이도 아니잖아.’

그러고 보면 그때부터 서준은 ‘요한 젠틸’을 요한이라고 불렀다. 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멍청하게 나무에 올랐고 떨어졌어. 준이 네가 말해 준 예언 중 가장 가까운 게 실현된 날이었지.”

“잠깐,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응. 그리고 준이 네가 운전하는 트럭 앞 유리창에 내가 달라붙어 있을 거란 말도 했었어.”

“…….”

서준은 자신이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헛소리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어떤 상황이 오면 자신이 모는 트럭 앞 유리에 요한이 달라붙는단 말인가? 그는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건조한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그래서, 그게 다야?”

“아니. 그다음 해에 했던 백설 공주 연극 기억나?”

“아, 그거.”

이번에는 정확하게 기억났다. 학교에서 학년을 가리지 않고 크게 열었던 행사였다. 크리스티나가 왕비, 요한이 왕자였는데 무려 서준이 백설 공주 역할이었다. 별반 중요하지는 않으나 보비는 난쟁이였다.

당시 서준은 나무 1을 노렸으나 치열한 접전 끝에 패배했다. 그리고 백설 공주 역을 맡게 된 이유는 놀랍게도 민주주의적인 방식, 즉 투표였다.

당연하게도 요한이 왕자였던 만큼 백설 공주 역할을 노리는 소녀는 무수히 많았다. 그러나 가장 유력한 후보였던 크리스티나가 냉큼 왕비 역할을 고르자 백설 공주는 지망자가 너무 많아졌다. 백설 공주 입후보는 차례대로 에이미, 벨라, 신시아, 디미트리스, 에리카, 플로렌스, 길, 헤더, 이사벨라, 제시카, 래리, 마틸다, 니나, 올리브, 페이지, 퀴니, 로즈, 서준, 타일러, 유미, 브렌, 웨이드, 제니아, 야니크, 지나였다. 보비가 추천한 서준을 제외하면 모두 스스로 자처한 후보였다.

결과적으로 고작 세 표를 얻은 서준이 백설 공주가 되었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연극에서 내가 너를 껴안고 빙글빙글 돌았잖아.”

열다섯의 요한은 그때부터 키가 크고 뼈대가 단단한 소년이었다. 하지만 즐거운 추억을 말하는 요한과 달리 서준에게는 그리 밝은 기억이 아니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끔찍하고 처참한 연기력은 물론이고 함께 벌어졌던 독극물 상해 사건과 플로렌스-길버트-제니아 치정 사건까지 뒤얽혀 연극은 아주 엉망이었다.

그날 서준은 백설 공주의 유리관 속에서 깜빡 잠이 들어 환시를 본 뒤, 현실과 헷갈려 길버트가 플로렌스와 제니아 사이에서 성공적으로 양다리를 걸치던 속임수의 비밀을 만천하에 실토했다. 관객석에서 터지던 환호성이 아직도 귀에 선했다. 이후 길버트가 야밤에 정체 미상의 괴인에게 뒤통수가 깨지기 전까지는 참으로 고된 시간이 이어졌다….

어쩐지 이 사랑의 역사라는 놈은 들으면 들을수록 신빙성이 떨어졌다. 서준은 어깨를 늘어뜨리고는 천천히 말했다.

“내가 이상한 말을 많이 했다는 건 인정해. 그래도 그것밖에 없잖아. 우리가 둘만의 특별한 추억을 공유한 것도 아니고. 요한, 너와 내가 오래 알긴 했지만, 고작 그게 다라고. 대체 어느 지점에서 사랑에 빠졌다는 거야?”

“십오 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야. 물론….”

요한은 느릿하게 한숨을 내쉬며 서준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서준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애꿎은 입술을 깨물었다. 입가에 부드럽게 미소를 띤 요한은 땀으로 젖은 손바닥을 바지에 슬쩍 문질렀다.

“한 사람을 오래 봤다고 전부 안다고 자신하는 건 오만이지. 그래. 알아. 그래도, 준아. 너와 마주친 이후로 흐른 시간은 사랑에 빠지기에 충분했어.”

요한은 서준에게 첫눈에 반하지 않았다. 별이 가득한 밤하늘이 비친 풍경을 사랑이라 부르기는 모자랐다. 그러나 폭우도 쏟아지기 전 첫 번째 빗방울이 내리듯 모든 일에는 시작하는 순간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그날, 요한의 심장에는 씨앗이 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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