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
8. 순결 청년 요한 젠틸 사랑의 역사
서준은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꽃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그를 비롯한 일행은 피부를 달구는 열기에도 쉽사리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고열은 괴물의 괴성까지 먹어 치웠다. 우주에서 온 생명체는 몸부림치며 불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몸에 끼얹어진 레몬즙이 힘을 빼앗은 게 분명했다. 촉수를 마구 내둘러도 불은 더욱 거세게 휘날릴 뿐 쉬이 꺼지지 않았다.
곧이어 희고 매끄러운 살덩이가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촉수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타들어 갔다. 끝이 둥글게 말리기까지 해 괴물은 마음껏 활개를 치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윽고 괴생명체 X의 몸뚱이를 연료 삼아 타오르던 불이 사그라들었다. 하몽 캠프장을 전부 밝히기라도 할 듯 대단하던 기세에 비하면 의외로 빠른 소진이었다.
‘물가를 기준으로 이동하던 건 단순히 호수나 늪이 좋아서가 아니라 수분이 필요해서 그런 건가?’
서준은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겨우 움직여 탄내 나는 장작더미를 향해 걸어갔다. 그를 붙들고 있던 요한의 손이 움찔 떨렸지만 서준의 눈은 오로지 괴물을 향해 못 박혔다.
볼품없는 몰골이었다. 오묘한 빛깔의 광택이 흐르던 외피는 쪼글쪼글하게 주름이 잡히고 표면에 검은 잿가루와 피가 엉겼다. 전체적인 부피 또한 크게 줄어들었다. 비참한 꼴을 보자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는 귀에서 울리는 이명을 애써 무시하고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괴물은 요란을 떤 게 언제였냐는 듯 잠잠했다. 서준은 눈에 들어오는 모든 정보가 어처구니없었다. 반평생도 아니다. 거의 일생을 지배해 온 두 축 중 하나가 무너진 광경이었다.
어수선한 그의 속내와 달리 세상은 고요했다. 괴물을 처치했다고 웅장한 음악이 흐르거나 멀리 지평선에서 동이 터 오지도 않았다.
문득 의심이 들었다. 사실은 죽은 척하는 게 아닐까…. 혹여 연쇄 살인마가 괴물의 배를 가르고 튀어나오려는 건 아닐까….
‘아까 본 뼈다귀는 사실 숨겨 둔 다른 시체였다거나.’
서준은 가스마스크가 정신 나간 군인처럼 괴생명체 X의 위장 속에서 살아 있을까 봐 잠시 우려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가 씹어 먹힌 건 둘째 치고, 이 엄청난 고열 속에서는 죽어도 다시 한번 죽을 정도였다. 아마 가스마스크의 살점은 백숙 속 찹쌀처럼 흐물흐물하게 뭉그러지지 않았을까.
괴물은 그가 가까이 다가가도 미동 없이 잠잠했다. 반면 서준의 심장은 시끄럽게 뛰다 못해 입 바깥으로 튀어나올 정도였다. 스스로 내놓은 의혹이 하나하나 걷히자 폭풍처럼 이는 감정이 혈관을 짓눌렀다.
‘지금 이게….’
생각조차 길게 이어지지 않고 뚝 끊겼다. 서준은 아랫입술을 질겅질겅 깨물었다. 얼떨떨한 심경이 도무지 떠나질 않았다. 곧 눈앞이 맑아졌다. 가슴 아래 얄팍한 가죽 밑에서 환희가 부글부글 끓었다.
드디어 모든 고난이 끝나고 더는 공포에 떨지 않아도 되는 날이 왔단 말인가? 꽉 죄었던 목구멍에서 치솟듯 환성이 터져 나오려 했다. 그는 벅차오르는 가슴을 억누르고 크리스티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서준은 기쁨을 쏟아 내지 못했는데, 그 이유로 말할 것 같으면 크리스티나의 비명 같은 목소리가 먼저 나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찬란한 미소를 머금고 승리에 취하는 대신 친구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에어리!”
괴생명체 X가 실시간으로 불타는 장면은 그녀의 발목 또한 붙잡고 늘어졌다. 하지만 괴물에 온통 정신이 쏠린 서준과 달리 크리스티나는 금방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성실하게도 토치를 갈무리한 다음 장작더미의 뒤편으로 달음박질쳤다. 서준도 눈치를 챙겨 요한과 함께 뒤따라 달려갔다. 괴물의 돌돌 말린 촉수를 곁눈질하던 골든도 뒤늦게 그의 꽁무니에 붙었다. 서준이 알 바 아니었다.
그러나 이 세 마리 오리는 가장 앞서가던 요한이 방향을 바꾸자 영문도 모른 채 그를 쫓아갔다. 서준은 입꼬리가 올라간 옆모습을 가볍게 자꾸 흘겨보았다. 그는 걷는 자세가 곧고 다리에 힘이 있어 보폭이 큼직했다. 애초에 목적지가 멀리 있지는 않았으므로 따라잡기 벅찬 일은 아니었다.
요한은 까맣게 탄 괴물의 몸뚱이 앞에 멈췄다. 그리고 주저앉아 잿더미와 녹아내린 살덩이 속에 손을 집어넣어 뒤적거렸다. 서준은 입과 코를 막고 그에게서 조금 떨어졌다.
“요한, 뭐 하는 거야?”
“아, 준아. 별건 아니고…. 이것 좀 확인해 줄래?”
그가 정성스럽게 주둥이를 나불거리며 촉수 하나를 들어 올렸다. 쭈글쭈글하게 말라붙은 가죽은 마치 고무호스처럼 수축한 상태였다. 그것은 다른 촉수와 비교해도 크기가 현저히 작은 편이었다.
그때 뒤에서 목이 졸린 듯 고통스럽게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서준이 돌아보자 마지막 오리가 끔찍한 표정으로 삿대질을 하는 중이었다.
“미친, 그 흉물에서 당장 손 떼!”
골든의 기겁하는 몰골에 서서히 깨달음이 찾아왔다. 요한이 든 고무호스의 정체는 리처드의 내장을 빨아 먹고 제 내부까지 탐험한 그 촉수였다.
괜히 속이 울렁거려 서준은 입을 틀어막은 손에 힘을 주었다. 수분이 죄 빠져나가 초라한 모양새였지만 자세히 보니 특유의 입구 부분이 눈에 띄었다. 불쾌한 기억이 뇌 주름 사이를 돌아다녔다…. 초점이 흐릿해진 서준을 꼼꼼히 뜯어보던 요한이 활짝 웃었다.
“역시 이게 맞구나?”
서준은 평생의 시간보다 오늘 하루 동안 요한에 관해 더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중 하나는 요한의 몸놀림이 무척 빠르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이 쥔 촉수의 이력을 확인하자 망설이지 않고 돌로 내리쳤다.
원체 관리가 미흡한 숲속 캠프장이라 큼직한 돌덩이를 손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실상 몇 가지로 요한의 행동 원리를 추측하기란 대단히 어려웠다. 서준은 결국 게처럼 옆으로 걸으며 요한의 곁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대체 뭘 하는 거야?”
불에 탔어도 촉수의 가죽은 질기기 짝이 없었다. 요한의 승모근과 팔뚝 근육에 힘이 들어간 꼴을 보며 서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촉수가 점차 뜯기는 모습이 기가 막혔다.
요한은 손톱이 사라진 손으로 이마의 땀을 가볍게 닦더니 서준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아무리 야멸차고 인색한 서준이라도 이 손을 거절하기는 거북했다. 그는 순순히 요한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어째서인지 괴물이 무섭지 않았다.
요한은 서준의 어깨가 제게 살짝 부딪힌 다음에야 이유를 설명했다.
“준이 네 비좁은 구멍을 억지로 파헤치고 들어가서 불쾌한 액체를 흘렸잖아. 다른 건 몰라도 이 촉수만은 완전히 다지고 으깨 버릴 거야.”
물론 설명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서준은 기가 막혀 요한과 두 발자국 거리만큼 멀어졌다. 요한이 서준의 허리를 끌고 제 옆으로 당겼기에 별 소용은 없었다. 서준은 그의 팔뚝을 가볍게 때리며 입을 열었다.
“요한. 네 어휘력하고 취향이 다소 부도덕하게 들린다는 걸 내가 우정의 이름으로 알려 줄게.”
서준은 제 나름대로 크게 인심을 썼다. 하지만 요한은 무엇이 재밌는지 배를 울려 가며 우렁우렁 웃더니 기어코 촉수를 완전히 결딴냈다. 그는 쪼그라든 촉수를 줄자처럼 둘둘 감아 주머니에 넣었다. 꼭 뱀의 허물을 챙기는 소년 같아 서준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요한은 서준의 마른 배와 등을 부드럽게 감싸 일으켜 세우고는 심심한 낯으로 대답했다.
“이건 취향의 문제가 아니야. 관용의 문제지.”
***
“에어리, 괜찮아? 에어리!”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놀랍게도 에어리는 살아 있었다. 요한과 서준, 골든이 늑장을 부리다 갔을 때, 그녀는 흙바닥에 엎어져 손과 발을 꿈틀거리고 신음을 흘리며 바르작거렸다.
“끄으윽….”
괴생명체 X의 촉수에 맞아 모기처럼 나가떨어진 것에 비하면 대단히 양호한 상태였다. 에어리의 손가락이 비실비실 나무를 가리킨 다음 바닥을 꾹 찔렀다. 그녀는 그것만으로도 힘이 다했는지 팔을 툭 떨어뜨렸다. 손톱 안쪽으로 흙이 끼었다. 크리스티나는 에어리의 손을 감싸 쥐고는 감탄하며 입을 열었다.
“에어리, 나무에 부딪히고 땅에 떨어졌다는 뜻이야?”
“끄어억….”
사람의 언어로는 조금 부족한 신음이 힘없이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에어리의 팔과 다리를 조심스럽게 만지던 윌리엄이 힘겹게 말했다.
“다행히 잔가지와 나뭇잎이 쿠션 역할을 해 줬어. 하지만 저 빌어먹을 괴물이….”
입 속이 바짝 말랐는지 그는 침을 억지로 삼켰다. 피로로 인해 실핏줄이 터진 눈이 희미하게 떨렸다.
“에어리의 옆구리를 때렸는데, 아무래도 그때 늑골이 부러진 것 같다.”
“늑골이면, 갈비뼈가? 괘, 괜찮은 거야?”
크리스티나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밀가루를 뒤집어쓴 양 창백했는데 서준은 그보다 더한 단계가 있다는 사실에 남몰래 감탄했다. 다행히 이곳에는 그의 경망스러운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초능력자가 없었다. 에어리가 친구를 향해 다시금 무어라 웅얼거렸다.
“꾸어억….”
“미안해, 에어리. 네가 하는 말을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크리스티나가 눈물을 훔치며 대꾸하자 인간 번역기가 대신 설명했다.
“장기를 찔린 것 같지는 않다는군.”
“그래도 이대로 움직일 수는 없지? 꼴이 말이 아니야.”
에어리의 옆구리를 유심히 살피던 요한이 덧붙였다. 윌리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미간을 엄지와 검지로 주무르며 노쇠한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도 어린 인상이 아니었으나 오늘따라 한층 더 나이 들어 보였다.
“이런 상태로 걷는 건 말도 안 돼. 업는 것도 불안하고. 하다못해 들 것이라도 만들어야 할 지경이라고. 요한.”
“구급차를 부르는 게 가장 좋겠지만 어렵겠지?”
이런저런 대화가 오갔지만 뾰족한 수는 나오지 않고 에어리의 상태는 시시각각 나빠져 갔다. 서준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 보비를 찾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