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40)화 (40/156)

#040

우르릉, 하는 소리가 들렸다. 크리스티나의 손이 허공을 짚었다.

“크리스티나? 왜 그래?”

“아, 그게….”

에어리의 부름에 크리스티나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냉장고 문을 열어 에어리의 얼굴 윤곽이 하얗게 빛났지만, 그 외에는 깜깜했다. 그녀는 멈추었던 손을 움직이며 말했다.

“아니, 그냥. 아무것도 안 보여서.”

그간 어둠에 익숙해졌다고는 해도 달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식당 안쪽의 부엌은 어두컴컴해 양손의 촉각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에어리가 거칠게 튼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꼬집었다.

“그래도 전등을 켜면 괴물이 혹시라도 이쪽으로 올지도 모르니까 어쩔 수 없지. 손전등이 있으면 편할 텐데.”

“그러게. 아쉽다.”

다행히 괴물은 크리스티나와 에어리가 사라질 때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식사에 열중이었는지, 아니면 미끼 작전이 제대로 들어맞았는지 원인은 모르겠으나…. 어찌 되었건 지금이 기회였다.

에어리와 크리스티나는 식당에 숨어들었다. 엉망진창으로 쓰러진 식탁을 넘어 부엌을 헤집었다.

“하여간, 그 아저씨 마음에 안 들어. 제대로 준비한 게 고작 레모네이드야! 정말이지 이래서 연쇄 살인범들은….”

에어리가 잘린 레몬이 가득한 냄비를 발견하고 명랑하게 조잘거렸다. 크리스티나는 에어리가 괴로움을 덜어 주기 위해 애쓴다는 사실을 알았다. 허벅지와 팔뚝의 근육이 도드라져 그녀 또한 몸에 힘이 들어간 걸 알 수 있었다. 친구의 배려는 그녀의 몸을 따뜻하게 데웠다.

만약 에어리와 함께하지 않았다면 가늘게 마모된 신경 줄이 언제 끊어졌을지 모른다. 조금 전도 그녀가 아니었다면 순간적으로 까무룩 정신을 잃을 뻔했다. 크리스티나는 친구가 걱정하지 않도록 느릿하게 한숨을 쉬었다.

가슴속이 답답하고 고통스러웠다. 마구잡이로 고함을 치며 울고 싶었다. 그래도 그녀는 주먹을 쥐고 눈가를 거칠게 쓸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자신을 믿고 기다리는 친구들이 있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의 심장에 말뚝처럼 박힌 감정은 비단 책임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재료를 모으며 중얼거렸다. 와중에도 손가락은 섬세하게 조합해 나갔다.

“있잖아, 에어리. 나는 외계 괴물이나 연쇄 살인마랑 마주친 게 꼭 내 이름 때문인 것 같아서. 그래서, 무서워.”

“세상에! 티나, 그게 왜 네 탓이야. 이름이야 너희 어머니가 할머님 연기에 너무 감명받으신 거지.”

윗부분을 잘라 낸 페트병으로 레몬을 옮겨 담던 에어리가 정색하며 소리쳤다. 손에 얼마나 힘이 들어갔는지 집게를 쥔 손등 위로 레몬즙이 찍 튀었다. 크리스티나가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하필이면 그런 거에 감명받을 건 또 뭐라니? 할머니 경력 보면 많지는 않아도 멀쩡한 로맨스도 있었는데.”

크리스티나는 조모가 찍은 로맨스 영화가 망했다는 사실을 외면했다. 위험한 조리를 도맡은 친구를 자극할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던 에어리는 자른 페트병 윗부분에 테이프를 두른 뒤 탁 소리가 나도록 쳤다.

“으음, 자기 엄마가 찍은 로맨스 영화는 자식 입장에서 조금 미묘하시지 않았을까? 나도 우리 엄마가, 나는 엄마가 없기는 한데 있다고 치고. 엄마가 젊은 시절에 로맨스 영화의 남자 주인공으로 나왔으면 그걸로 자식 이름 짓기는 좀 그럴 것 같아.”

손이 빠른 그녀는 조잘거리면서도 선반을 뒤적거렸다. 곧 손바닥에 원통형 캔이 잡혔다. 에어리는 냉장고에서 새어 나오는 빛에 의지해 눈으로 캔에 적힌 글자를 읽으며 동시에 말도 하는 재주를 선보였다.

“그리고 구태여 원인을 따지자면 보비가 원인이지. 허구한 날 룸펠슈틸츠헨 베이비니, 톰팃톳 태생이라면 블랙 레이크의 전신이 된 레드 레이크에 꼭 한 번은 와야 한다느니…. 어휴, 아니다. 내가 죽은 애한테 무슨 말을 하겠어.”

서준은 왜 자신이 제 팔을 찢든, 골든의 주둥이를 찢든 뜀박질할 자세를 취하지 않고 방만하게 굴었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초조함이 그의 허파를 가득 채웠던 탓일까?

“허억, 허억, 헉!”

후회는 왜 이토록 빠르게 찾아올까. 서준은 입도 다물지 못하고 밭은 숨을 내쉬며 뛰었다. 그나마 혓바닥을 입 속에 간수한 게 용할 지경이었다. 온 힘을 다한 질주는 그에게 몇 없는 사회적 체면 따위를 포기하게 했다.

“미친, 미친 점쟁이! 돌아 버린 점쟁이!”

다행인 점은 비단 꼴불견으로 달리는 사람이 서준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제 옆에 혀를 빼물고 뛰는 골든의 욕설을 자비롭게 받아들였다.

“준아, 업어 줄까?”

“닥치고 뛰어!”

체력이 남아도는지 요한이 매력적인 제안을 건네 왔다. 그러나 서준은 흘깃 옆을 보았다가 이를 악물고 외쳤다. 덕분에 발음이 썩 좋지 않았다. 그래도 요한은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서준이라고 편한 길을 쉬이 포기한 건 아니었다. 여유를 부리며 요한의 등에 업힐 시간조차 없었다. 뒤에서 괴생명체 X가 우르릉우르릉 소리를 내며 그들을 추격해 오고 있었다. 그나마 식후 운동쯤이라 여기는지 속도가 둔하게 느껴졌으나 저 거대한 몸뚱이를 이끌고 온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 맹렬함이었다.

새하얀 몸뚱이가 달빛을 받아 미끈미끈하게 빛났다. 세계적 거장이 만든 오브제처럼 느껴지는 기이하리만치 압도적이고 비현실적인 존재였다.

만약 쫓기는 처지가 아니었다면 유심히 구경하고픈 생김새였다. 하지만 괴물의 주둥이와 촉수에서 풍기는 시취가 자신은 현실의 물상임을 주장했다. 지독한 냄새는 감각을 강제로 일깨웠다.

“헉, 흐, 흐으아아!”

입 안 가득 느껴지는 단침을 삼키던 서준은 코를 찌르는 악취에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뉘우쳤다. 서준은 괴물의 몸뚱이에 케첩 자국처럼 눌어붙은 내장을 애써 외면했다. 그러나 끔찍한 광경은 망막 위에 잔상을 남기고는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다리 근육을 혹사했다. 다행히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푸르스름한 달빛이 야영지를 비추었다. 낡아 빠진 텐트가 스산하게 흔들리며 서준을 맞이했다.

애초에 거리가 짧았다. 구 합숙소와 캠프파이어장이 있는 야영지는 오고 가는 길도 나름대로 정비된 편이었으며 장애물도 없이 연결된 구역이었다. 목표물인 캠프파이어용 장작더미 근처에는 쓰러진 텐트며 땅에 팬 자국 등이 보였다.

서준은 이곳에서 가스마스크와 혈투를 벌였던 것이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한가로이 감상에 빠지기에 이곳은 아직도 위험했다.

그는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았다. 크리스티나와 에어리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듯, 인기척은 그들뿐이었다. 서준과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요한이 크게 소리쳤다.

“아직 안 왔어!”

“저기로 유인하자!”

흰 뼈처럼 가느다란 손가락이 높게 쌓인 장작더미를 가리켰다. 괴물은 금방이라도 촉수를 뻗을 듯 흐느적거렸다. 서준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저것에 잡히는 감촉은 그야말로 끔찍했다. 두 번 다시 당하고 싶지 않은 괴로운 경험이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가 오기 전까지 약간이나마 승률을 올리기 위해서는 굳은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야 했다.

그는 팔의 상처를 일부러 쥐어짰다. 손바닥이 검붉게 물들고 큼직하게 벌어진 살 사이에서 다시금 피가 흘렀다.

“윽!”

“준아, 그만해!”

요한이 만류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우렁우렁하게 울렸다. 콧물까지 훌쩍거리던 서준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곧 서준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요한의 표정은 서준이 상상한 어떤 표정과도 맞지 않았다. 바다처럼 짙푸르던 눈동자는 마치 심장 안쪽을 송곳으로 깊숙하게 찔린 듯 고통으로 가득했다….

“준아, 내 말은 개가 짖는 소리가 아니야.”

요한의 시선을 받고, 요한의 목소리를 듣자 영문 모를 죄책감이 혀뿌리를 잡아당겼다. 서준은 이미 낸 상처를 벌리는 것은 새로운 자해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었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궤변처럼 여겨졌다. 동시에 심장 구석에서 삐죽 솟아오른 모퉁이가 억울한 마음을 건드렸다.

‘다 우리 같이 살아 보자고 하는 짓인데….’

그는 결코 뭇 변태 성욕자처럼 피학적인 성적 기호를 충족시키고자 제 살을 파헤친 게 아니었다. 분명한 이유와 확고한 목표가 있어 실행했다. 그러나 서준은 요한의 눈을 보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까닭은 모른다. 그저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서준과 요한이 할 말을 찾지 못한 틈을 타 먹음직스러운 미끼에 이끌린 괴물이 달려들었다.

[크르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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