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9
다른 누구도 아닌 크리스티나여야 했다. 괴물을 무찌를 수 있는 결정적인 역할은 그녀의 것이었다. 서준의 거침없는 대꾸에 요한의 양쪽 눈썹 끝이 축 내려갔다. 그는 다소 의기소침하게 입 속에서 웅얼거렸다.
“서준아, 그걸 맹신이라고 해. 너는 크리스트교가 아니라 크리스티나교를 믿어?”
서준은 반박하고 싶었으나 인생의 지침이 크리스티나라는 사실이 썩 틀리지도 않아 할 말이 없었다. 그는 괜히 인상을 썼다. 우미하고 음울한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크리스티나 정도면 훌륭하지 않던가? 바른 인성, 나무랄 데 없는 인품. 7월 4일의 하몽 캠프장에서 크리스티나만 한 사람은 찾기도 어려웠다.
“잠깐, 나는 어디로 가라고? 너희 멋대로 정하면 다냐?”
그때 대화에서 소외당했던 골든이 당황스러워하며 끼어들었다. 서준은 오징어구이 운운 후에는 까맣게 잊었던 골든을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는 의외로 크게 다친 부분이 없었다. 가스마스크에게 얻어터지느라 코피를 조금 흘리기는 했지만 피가 난 곳은 그게 전부였다. 멍이야 이곳저곳 들었지만 출혈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지금까지의 판단으로 따지면 그도 식당 조로 투입하는 게 옳았다.
‘나도 못 가는 좋은 자리를 이 자식한테 줘야 한다니….’
서준이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골든은 이를 악물고 나지막하게 씨근덕거렸다.
“난 무조건 저 점쟁이와 함께 움직일 거야. 내 결정을 바꿀 생각은 말라고.”
놀랍게도 골든은 유인 조에 포함되길 희망했다. 서준은 늘어난 미끼에 만족하며 퉁명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까지나 네가 원한 결과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어쨌든 미끼는 하나라도 많은 편이 이득이었다.
각각 해야 할 일이 생기자 일행은 서둘러 갈라졌다. 우선 크리스티나와 에어리가 풀숲으로 조심스럽게 몸을 숨겼다. 긴장한 크리스티나의 등에 견갑골의 윤곽이 뚜렷하게 떠올랐다. 서준은 그것을 바라보다 무심코 말을 걸었다.
“크리스티나.”
“응? 왜, 서준.”
크리스티나는 목을 반쯤 돌려 서준과 눈을 마주쳤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긴 그녀의 하얀 얼굴과 길게 이어지는 목선은 땀조차 말라붙어 약간의 소금기만을 남겼다. 매서운 추위와 그보다 더한 열기가 공존하는 기묘한 밤이었다. 지난한 고난과 역경조차 크리스티나의 아름다움을 훼손하지 못했다.
그것이 꼭 그녀가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여자라고 증명하는 듯해, 서준은 버티지 못하고 애원했다.
“우릴 구해 줘.”
그녀보다 나이도 많은 주제에 부끄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서준에게 크리스티나는 무엇보다 확실한 지표였다. 그의 신앙이 입술을 꾹 깨물고는 숨을 들이쉬었다.
“응, 힘낼게.”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가 풀숲 속으로 잦아들었다.
예비 방화범들이 떠나간 자리를 보며 서준은 깔깔한 목구멍으로 침을 삼켰다. 억지로 넘긴 타액은 산처럼 뜨겁고 쓰라렸다. 크리스티나라는 표상이 눈에서 멀어지자 기껏 짜냈던 용기가 태풍 앞의 촛불처럼 흔들거렸다. 사부작사부작 바람결에 부대끼는 나뭇잎은 또 어찌나 어수선한지 사람 심장이 다 요동쳤다.
하지만 서준은 한심한 인간의 표본답지 않게 굴었다. 그는 샘솟는 공포를 좌심방 아랫부분에 잘 수납한 뒤 그림자에 숨어 얼굴을 내밀었다.
서준의 태도에 요한이며 윌리엄, 골든도 그를 따라 괴물의 동향을 살폈다. 그들이 계획을 세우는 동안 흙바닥에 근육과 지방이 붙은 뼈가 툭 툭 떨어졌다. 가스마스크는 절명했는지 더는 비명조차 들리지 않았다.
“저 괴물, 깨끗하게 먹지 않는걸….”
요한이 바닥에 널브러진 뼈다귀를 보며 걱정스러운 말투로 중얼거렸다. 서준은 제 정수리에 슬며시 얹힌 턱을 밀어 내며 입을 열었다.
“밥상머리 예절에 민감한 성격이야?”
“아무래도 그런 편이지.”
쉽게 밀려난 하악이 슬금슬금 돌아왔다. 지저분한 잔해에 설핏 눈살을 찌푸리고는 헛구역질하는 흉내를 내던 골든이 이번에는 콧잔등을 씰룩거렸다. 언뜻 듣기로는 태평한 대화에 그가 질색하며 목을 울렸다.
“지금 그게 문제냐? 어!”
“아무렴. 문제고말고.”
요한은 선선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서준의 정수리 부근 머리카락이 부스스 일어났다. 요한은 피가 묻어 굳은 머리카락 끝부분의 냄새를 잠깐 맡고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골든, 너도 가끔은 생각이라는 걸 하면 뇌혈관에 길도 뚫리고 좋지 않을까? 저 괴물이 배가 부르면 미끼인 우리를 제대로 쫓지 않을 가능성도 있어. 계획이 무산될 수가 있다는 뜻이지. 음, 네가 이해하지 못했다면 한 번 더 말해 줄까?”
친절한 제안에도 불구하고 골든의 얼굴이 시시각각 구겨졌다. 요한의 정상적인 대답에 그는 혼란스러워하며 서준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이상한 거야? 점쟁아, 분명히 이 자식이 미친놈처럼 말했잖아. 정신 나간 이중인격자처럼 굴었다고!”
솔직히 말하자면 서준도 골든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 요한은 때때로 해괴한 언동으로 사람을 놀라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끈질기게 자신을 점쟁이라 부르는 놈의 의견에 맞장구를 치고 싶지도 않았다. 적어도 요한은 망측한 언어로 자신을 비하하는 경우는 없었다.
“골든, 무슨 소리야? 요한은 정말 이성적이고 올바른 판단을 하고 있어.”
그는 시치미를 뚝 떼고 요한의 편을 들었다. 그러자 서준이 몸을 반쯤 기대고 있던 흉부가 들썩거렸다.
곧 두꺼운 팔이 뼈가 도드라진 어깨를 감싸 안았다. 활짝 웃는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햇볕처럼 강렬했다. 그러나 달빛이 내리쬐는 한밤중과는 어울리지 않는 기묘함이 있었다. 요한은 부조화를 뽐내며 흥얼거렸다.
“난 어렸을 적부터 감수성이 남다르다고 들었는데 우린 잘 맞는 편인가 봐. 준아.”
‘좋냐.’
창백한 뺨에 언뜻 홍조가 떠오른 모습에 서준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작금의 상황은 기뻐하는 요한을 타박하며 여유나 부릴 때가 아니었다. 서준은 목을 슬며시 빼 괴물의 식사를 확인했다.
괴물의 거대한 입 구멍으로 보이는 곳…에서 이번에는 갈비뼈 같은 것…이 톡톡 튀어나왔다. 하는 꼴이 마치 생선 가시를 발라내며 먹는 듯했다. 새삼스럽게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괴물의 시선을 잡아끄는 일이었다. 괴물은 가스마스크로 거의 배를 채워 나가는 중이었다. 서준은 어두운 바닥을 눈으로 훑었다.
불행히도 그에게는 선택의 폭이 몹시 좁았다. 가스마스크와 사투를 벌이고 괴생명체 X의 습격으로부터 도주하느라 손에 남은 것이 없었다. 서준은 불우한 자신의 현실을 느리게 곱씹었다. 억지로 받아들인 현실에서는 쓴맛이 났다.
그가 무릎을 굽혀 반으로 쪼개져 날카로운 돌을 집어 들자 골든이 비아냥거렸다.
“아, 그걸 던져서 괴물의 이목을 끌려고? 정말 올바른 판단이고 참 대단한 계획이야. 과연 나는 못 따라가겠는걸!”
“아니? 이걸로 네 주둥이를 찢어서 괴물에게 던져 줄까 해.”
날카로운 대꾸에 골든이 몸을 움찔 떨었다. 그는 돌과 서준의 새까만 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골든은 진심으로 서준이 난폭한 행동을 저지를까 봐 우려하는 눈치였다.
“그것도 나쁜 방법은 아니야.”
썩 첨예하지 못한 대립을 앞에 둔 요한이 부채질하자 당황하던 골든도 가만있지 않고 이마를 시뻘겋게 물들이며 버럭 성을 냈다.
“요한 젠틸, 이 자식이, 웁!”
“큰 소리 내지 마라. 괴물에게 들키고 싶어?”
그때 숨을 고르던 윌리엄이 재빨리 골든의 입을 막았다. 그는 가능한 한 대화를 줄여 체력을 보존 중이었으나 골든이 목청을 높이자 순간적으로 손이 나가 버렸다.
비등한 몸집의 사내끼리 부대끼자 더운 열기가 훅 끼쳤다. 서준은 골든을 한심하게 내려다보며 돌멩이의 흙을 털었다. 그는 입으로 바람을 후 불기도 하고, 옷에 문지르기도 하며 최대한 돌을 깨끗이 닦았다.
깨어진 부분이 날카롭게 윤곽을 드러내자 골든은 입이 막힌 상태에서 불안스레 숨을 헐떡거렸다. 서준은 괜히 손목을 이리저리 돌려 가며 골든에게 위협을 가했다. 가장 매력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걱정하지 마. 골든 케이시. 네 주둥이는 멀쩡할 거야.”
“준아?”
“뛸 준비들 해. 캠프파이어장까지 가는 길이 어렵진 않지?”
요한은 무언가 불길한 기분이라도 들었는지 가느다란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나 서준은 이미 충분히 망설였으므로, 더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돌멩이의 뾰족한 모서리로 자신의 팔을 죽 긁어내렸다.
“으….”
“서준!”
서준의 돌발 행동에 눈썹만 깜짝한 건 윌리엄뿐이었다. 요한과 골든이 놀라 다급히 그를 살폈다. 서준도 벌렁거리는 심장에 입술을 꾹 눌렀다.
자해는 상상 이상으로 아프고 괴로웠다. 억지로 파헤친 선을 따라 느릿하게 살갗이 벌어지고 붉은 피가 뭉글뭉글 흐르기 시작했다. 문득 서준은 생살을 찢은 고통과 더불어 세균 감염의 가능성을 떠올리고 더럭 겁이 났다.
하지만 상처가 썩는 것에도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그리고 시간은 오늘을 살아남아야 거머쥘 수 있었다.
“준아,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
요한이 서둘러 돌을 빼앗았다. 용도를 다한 돌에 미련 둘 일도 아닌지라 서준은 순순히 그에게 내주었다. 피가 묻은 돌을 받아 든 요한은 환하게 웃었던 게 거짓인 양 입매를 굳혔다.
다양한 감정을 거리낌 없이 표현하던 요한의 낯이 무감정해지자 서준의 가슴속이 서늘해졌다. 피로 젖은 사나운 육체를 지닌 청년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나 생소한 얼굴은 금세 울상으로 바뀌었다. 요한은 눈썹을 축 늘어뜨리더니 서준의 목덜미에 머리를 비볐다. 그는 어리광을 부리듯, 혹은 위로하듯 말했다.
“네가 다치면 나도 아파. 응?”
“요한….”
서준은 요한의 어깨를 부여잡고 침을 삼켰다. 자해는 상상 이상으로 아프고 괴로웠다. 그리고, 효과가 확실했다!
“얼빠져 있지 말고 달려!”
식사를 마친 괴생명체 X가 신선한 피의 향기를 맡고 거대한 몸체를 꿈틀거렸다. 이제 미끼의 본분을 다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