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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38)화 (38/156)

#038

‘여러 발이 달린 축축한 것이 다가오면 노란 과실을 던지는 걸 추천해.’

명민한 그녀는 편의점에서 그가 한 불길한 예언을 쉽게 기억해 냈다. 그러나 크리스티나는 서준을 탓하거나 집요하게 캐묻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다소 과격한 대안을 제시했다.

“정문은 막혀 있다고 했지만 우리 차로 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요한, 그 철창이 많이 튼튼해 보였어?”

“뭐, 범퍼 버릴 생각이면 가능하겠지. 그러고 보니 차 열쇠 가지고 있는 사람 누구야? 우선 나는 아니야.”

주먹을 몇 번 쥐던 요한이 친구들을 돌아보았다. 서준은 애초에 차를 타고 오지 않았으니 예외였다. 그런데 하나같이 표정들이 아리송했다. 우선 크리스티나가 에어리를 보았다.

“에어리, 우리 마지막으로 차에 갔던 거 바비큐 할 거 가지러 갔을 때 아니었니?”

에어리는 윌리엄을 눈짓하며 말을 골랐다.

“맞아. 정확하게는 꼬챙이를 가지러 갔었지? 가는 길에 보비하고 난 관리인, 하고 마주쳐서 난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고 빌리가 차로 갔어. 보비는 금방 너희를 따라갔고.”

그녀는 지금 생각하면 소름이 다 돋는다며 팔뚝을 감싸 쥐었다. 윌리엄은 에어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에어리. 그리고 난 요한과 같이 짐을 나누어 들었어.”

입을 다문 윌리엄의 안색이 서서히 굳었다. 요한은 시선만 흘깃거리며 그의 주머니를 확인했다. 허벅지 근처와 달리 호주머니 부근은 납작했다. 요한은 애처로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준아, 나도 정말 차 열쇠를 가진 게 보비라고 믿고 싶지 않았어.”

“…….”

서늘한 침묵이 보비의 빈자리를 채웠다. 윌리엄이 머리를 푹 숙였다.

“운전은 못 해 봤으니 문이라도 잠그게 해 달라고 손을 내밀더군.”

그는 그 손가락을 거꾸로 꺾었어야 했다는 듯 음산하게 이를 갈았다. 서준으로 말할 것 같으면 윌리엄이 보비를 고문할 때 반드시 도울 예정이었다.

대체 운전도 안 한 보비가 왜 문을 잠그겠다고 고집을 부렸던 걸까? 사실 보비는 죽음의 수하가 아닐까? 가스마스크, 혹은 괴생명체 X와 손을 잡은 흑막이었던 게 아닐까? 그때 에어리가 나지막하게 목을 울렸다.

“잠깐, 보비?”

“오, 에어리. 너무 화내지는 마. 이미 죽은 애인 걸 어쩌겠니.”

크리스티나는 서둘러 친구를 달랬다. 하지만 크리스티나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비친 건 분노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아니었다.

“맞아, 보비야. 티나, 해답은 바로 보비였어!”

에어리의 두 눈에서는 광채가 흘렀다. 그녀는 홱 고개를 돌려 서준을 바라보았다. 번쩍거리는 빛을 품은 에어리의 안광에 서준은 기가 다 죽을 지경이었다.

“들어 봐. 보비는 이렇게 말했어. 요리사는 우리에게 걸레 같은 주스를 내줄 거라고!”

에어리는 숫제 생선 가시처럼 씹히는 가스마스크를 가리키며 헐떡거렸다.

“에어리, 아까부터 웬 뚱딴지같은 소리야?”

“아니, 아니. 내 말 좀 들어 봐. 티나. 보비가 왜 그런 말을 했느냐면 관리인하고 한 대화가 그거였어. 내일 우리 식사로 뭐가 나올지! 저 정신 나간 방독면을 쓴 미친놈은 야비한 속내를 숨기고 이렇게 말했어. 뭐, 대단한 건 없고 레모네이드와 버터와 잼을 바른 빵, 베이컨과 달걀프라이 따위죠. 맛은 몰라도 신선함은 보장합니다. 아무래도 갓 짜니까요.”

에어리는 낮은 목소리로 관리인을 흉내 냈다. 그녀의 성대모사는 무척 뛰어나 서준은 들어 본 적도 없는 목소리를 쉽게 상상했다. 약간 기가 죽고 심드렁한 어투의 중년 남자….

‘아니지, 지금 줄기차게 듣고 있기야 하군.’

그보다 지금 중요한 건 가스마스크의 목소리나 말투가 아니었다. 에어리의 말에는 난관을 타개할 비책이 담겨 있었다. 레모네이드의 재료. 그건 다름 아닌 레몬이었다!

서준은 그가 처음 하몽 캠프장에 도착했을 당시 도주로로 사용한 식당을 떠올렸다. 직사각형의 긴 건물은 어둡고 길이 미끄러웠다. 서준은 그곳을 살필 시간도 여유도 부족했다. 하지만 바로 그곳에 저 괴물을 무찌를 방도가 숨어 있었다.

머릿속 영화관에서 흑백 필름이 흐릿하게 돌아갔다. 쓸모없다고 치부한 시퀀스. 치어리더와 근육 덩어리가 식당에서 비비적거리던 바로 그 장면!

비록 이미 진작 개판 난 영화라지만 남은 부분이 있었다. 그걸 기초로 따져 본다면 식사는 준비되었을 터이고, 다섯 명 분량이면 레몬의 양도 충분했다.

더디게 흐르던 피가 세차게 혈관을 타고 흘렀다. 광대뼈 위 차가운 살갗에 붉은 기가 돌았다.

“그 말을 믿어도 될까? 관리인의 정체는 연쇄 살인마였잖아.”

크리스티나가 회의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울적한 낯을 손으로 쓸며 연신 괴물의 동태를 살폈다.

“저 사람이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해. 식당은 건물이 워낙 단순해서 따로 숨기도 어려워. 만일 레몬이 정말 있다고 해도 이렇다 할 무기도 없잖아. 맨손으로 이길 만한 상대가 아니야. 맞서는 건 너무 위험해. 도망칠 수 있으면 도망쳐야지.”

크리스티나의 말은 하나같이 옳았다. 그러나 서준은 그녀의 말에 동의하지 못했다. 그는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에 위축된 상태의 십 대 소녀를 자신의 구원자로 여겼다.

“아니야, 크리스티나. 그렇지 않아….”

그리고 크리스티나가 포기하는 순간을 받아들이지 못한 두뇌는 놀랍게도 평소보다 더한 성능을 발휘했다. 처음에는 아무렇게나 지껄였다. 뇌의 주름이 아닌 혀의 근육이 꿈틀거려 만들어 낸 언어였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도주가 아니야.”

하지만 그의 눈에 박살 나 잔해밖에 남지 않은 라이터가 들어온 순간, 서준의 말은 진실해졌다.

“그게 뭔데?”

크리스티나의 질문에 서준은 살아남은 면면을 둘러보았다. 피로에 지친 그네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방화.”

“지금 방화라고 말한 거야?”

에어리가 떨떠름한 얼굴로 대꾸했다. 난감한 시선이 서준의 말간 눈동자로 향했다. 이 새롭고 놀라운 친구의 안광에서 차라리 자포자기한 빛을 발견했다면 그녀는 오히려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터였다. 그러나 서준의 눈망울은 한없이 맑고 투명했다. 평소의 죽은 생선 같은 눈과 비교한다면 훨씬 생기가 돌았다.

그는 뇌를 찌르듯 지독하던 기름 냄새를 떠올렸다. 비록 경비 초소에서 휘발유 통을 챙기지는 못했지만 아이디어는 얻은 셈이었다.

“불 싸지르자고? 제정신이야? 방화는 농담으로 안 끝나.”

“네 마약, 폭행, 절도도 농담으로 끝날 일은 아니었어.”

아무도 챙기지 않았지만 스스로 숨죽이고 기어 온 골든이 질색하며 끼어들었다. 서준은 파리를 내쫓듯 손사래 쳤다. 발화자가 마약 사범만 아니었다면 보다 진실하게 들렸을 것이다. 그는 조급한 목소리로 닦달해 댔다.

“저만한 덩치를 인화 물질도 없이 불만 놓는다고 오징어구이가 되리라 믿기라도 해?”

“오징어구이라…. 우리 막내 삼촌은 내게 좋은 걸 알려 주셨지. 모든 마법은 부엌에서 시작된다고 말이야.”

“마법?”

과묵하게 있던 윌리엄이 중얼거렸다. 서준은 지친 목을 열심히 끄덕였다.

“화염병을 만들 줄 알아. 화력은 보장할 수 있어.”

“화염병이라면….”

크리스티나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가 눈가를 문지른 뒤 숨을 크게 내쉬자 주근깨가 있는 쪽 볼이 살짝 떨렸다.

“그거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하지만, 크리스티나. 그 화염병이란 거 잘 탈까? 아무리 레모네이드를 부어서 무방비하게 만들어도 저 괴물은 너무 촉촉하고 수중 친화적으로 보여.”

에어리가 잘게 떨리는 팔뚝을 조급한 손길로 쓸었다. 그녀의 걱정은 타당했다. 그들은 괴생명체 X가 호수 속에서 기어 나왔다는 사실을 뼈저리도록 실감한 후였다.

서준은 팔을 뻗어 요한의 목덜미를 와락 끌어당겼다. 그는 자신이 잡아당긴 주제에 요한의 발갛게 젖은 뺨을 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검붉게 물든 흔적이 장미꽃잎처럼 얇게 말라붙은 광경은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감상을 품게 했다.

“유인해야 해. 그러니까,”

“캠프파이어장 말하는구나.”

서준이 외면했던 입술에서 까슬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요한은 눈웃음치며 음색을 낮췄다. 그는 원체 목소리가 우렁우렁하니 큰 편이었으므로 신경을 쓴 티가 여실했다.

“장작도 많고, 구색을 갖추기라도 해 놓았다면 그곳보다 더 잘 탈 장소는 따로 없겠지.”

요한이 친구들을 돌아보며 눈을 맞추자 서준이 말할 때와는 비교하기도 힘든 신뢰와 안정감이 무럭무럭 솟아났다. 비록 요한이 사람 하나둘쯤은 괴물과 연쇄 살인마의 손아귀에 넘겼어도 평소 잘 일구어 둔 인망의 효과가 대단했다.

“정해졌으면 우리 빨리 움직이자. 레몬이나 그, 화염병 재료를 찾고 제조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릴 거 아니야. 괴물이 저 사람을 다 먹어 치우기 전에 여길 벗어나야지.”

에어리가 윌리엄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치며 빠르게 속삭였다. 그녀는 무릎의 통증이 많이 가셨는지 시원스레 움직여 똑바로 섰다. 당장이라도 식당을 향해 뛰어갈 기세였다.

서준은 서둘러 요한을 놓고 에어리의 손목을 붙잡았다. 윌리엄의 두꺼운 눈썹이 매섭게 올라갔다. 하지만 윌리엄의 섬세한 마음씨를 보듬어 줄 시간은 없었다.

“아니, 여기서 한꺼번에 움직이면 더 위험해. 둘로 나뉘자.”

“둘로 나누자니….”

“말 그대로, 양동 작전을 하자고. 한쪽은 계획대로 식당으로 가서 레모네이드를 챙기고 화염병을 만들고, 한쪽은 캠프파이어장으로 괴물을 유인하는 거야. 크리스티나, 에어리, 너희 둘이 식당으로 가.”

서준의 말이 점점 빠르고 격해졌다. 흥분한 탓에 목구멍 안쪽이 뜨거웠고 눈 밑부분은 더더욱 허옇게 들떴다.

크리스티나는 그의 입술 위로 손바닥을 올렸다. 미지근한 온기가 서준의 혓바닥을 굳게 만들었다. 그녀는 서준을 곧게 응시했다.

“안 돼, 서준. 유인하는 쪽이 너무 위험해. 그건 말이 좋아 양동이지 미끼나 다름없잖아.”

‘주인공’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크리스티나는 서준이 말하는 계획의 불안전함을 쉽게 알아차렸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서준은 그 누구보다 식당 조에 끼고 싶은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자비로운 크리스티나의 손을 밀어 냈다.

“크리스티나, 저 괴물은 후각이 굉장히 좋아. 후각이 아닐 수도 있지만, 아무튼 피 냄새를 기가 차게 잘 맡지.”

피에 흠뻑 젖은 요한과 총상을 입은 윌리엄에 더해 서준 자신 또한 만신창이였다. 그러나 에어리와 크리스티나는 달랐다. 이렇다 할 상처가 없는 크리스티나와 타박상과 골절에 가까운 상처만 입은 에어리는 적어도 피 냄새는 풍기지 않았다.

윌리엄은 에어리가 미끼 역보다는 안전한 식당 조에 포함된 것이 만족스러운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모두가 만족한 인선은 아니었다. 요한이 다급하게 서준의 팔뚝을 잡아당겼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준아? 그렇게 따지면 당연히 너도 식당 조에 들어가야지. 네 상처는 닦아 내기만 하면 충분해.”

손바닥이 뚫린 사람에게 요한이 헛소리했다. 서준은 혀를 차며 이제 피가 말라붙은 손을 흔들었다.

“위험을 분산시키면 미끼의 의미가 없다는 걸 알잖아.”

물론 요한은 고작 이 정도의 반항에 쉽게 굴하지 않았다. 그는 흐느적거리는 앙상한 손목을 붙들었다.

“화염병의 제조 방법을 아는 건 너야. 네가 식당으로 가서 만드는 게 확실하잖아.”

“요한. 우리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 이럴 때가 아닌 걸 알잖아.”

“…….”

“화염병의 레시피는 어렵지 않아. 그렇지, 크리스티나?”

갑작스러운 지목에 크리스티나가 잠시 당황했다.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에어리와 윌리엄, 요한을 보았다. 곧 크리스티나가 턱을 올렸다. 은은하게 내리쬐는 달빛 탓일까, 평소 선홍색이던 입술이 푸르게 질려 있었다.

“그렇게까지 믿지 말아 달라고 하는 건 이런 상황에선 어리광에 불과하겠지…. 만약 재료가 부족하면 레시피가 다르더라도 비슷하게는 만들어 볼게. 구조는 이해했어.”

외골수에 내향적인 성격의, 가장 어린 소녀는 가슴 가득 부풀어 오른 부담을 내리눌렀다. 크리스티나는 오로지 책임감 하나로 무겁게 굳은 혀를 움직였다. 서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라면 가능해.”

“왜 그렇게까지 믿어?”

요한이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서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답했다.

“크리스티나가 성공하는 건 운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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