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낡은 청바지를 짙은 색으로 물들이는 일 없이 체면을 지킬 수 있었다. 이유는 명확했다.
서준은 눈꺼풀 안쪽으로 넘어가려는 시선을 겨우 멈추고 눈을 홉떴다. 여전히 시야는 불명확하고 불편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촉수의 섬뜩한 손길이 지나고도 내장이 멀쩡했다. 목구멍에서 부대끼는 통증 외에는 괴로움을 느끼지 않았으며, 심장과 간, 폐, 위장 따위가 한데 뒤섞여 불투명한 관에 흡수되는 일도 없었다. 이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명확했다.
괴생명체가 서준을 살렸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어폐가 있다. 괴물이 한 행동은 ‘살렸다’보다는 ‘죽이지 않았다’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게 어딘가? 서준은 당장 마음 같아서는 우주에서 강림하신 괴생명체 교를 세워 하루에 두 번씩 절도 할 수 있었다.
괴생명체의 이상 행동을 알아차린 사람은 서준만이 아니었다. 요한이 바닥에 피가래가 섞인 침을 퉤 뱉고는 벌떡 일어났다. 그는 빠르게 주변을 훑어보았다. 시퍼런 눈동자가 번뜩번뜩 빛났다. 뜯겨 나간 구 합숙소의 외벽, 군인의 시체, 바닥을 구르는 골든, 피 흘리는 가스마스크….
결정은 신속했다. 요한은 시간을 더 지체하지 않고 가스마스크에게 달려들었다. 억지로 몸을 틀어 발목이 꺾였으나 무시했다. 이어 어깨에 온 무게를 실은 충돌이 이어졌다.
뻐억, 검은 우비로 가려진 명치 부근에서 살가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끅!]
갑작스러운 습격으로 인해 가스마스크의 입 속에 고여 있던 침과 공기가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튀어나왔다. 요한은 큰 키에 걸맞은 체중을 지녔다. 당연하게도 그의 육체는 지방보다 근육의 비중이 높았다. 만약 보호구가 없다면 내장쯤은 거뜬히 파괴할 힘이었다.
다만 가스마스크는 자기 본위만큼이나 자신의 안위를 열심히 챙기는 모양인지 피를 토하고 바닥에 쓰러지는 대신 신경질적으로 손을 뻗었다. 요한을 밀어 내려는 손짓이었다.
물론 그조차 쉽지 않았다. 요한은 단단한 어깨와 핏줄이 도드라진 팔뚝을 이용해 가스마스크의 저항을 간단하게 무시했다. 손에 힘을 주었는지 제대로 지혈하지 못한 손가락에서 붉은 선혈이 다시금 세차게 분출되었다. 요한은 기꺼이 그 손가락의 단면에 제 손끝을 박아 넣었다.
소리 없는 비명이 허공을 갈랐다. 벌겋게 드러난 피부와 근육층, 핏줄을 우악스레 짓누르는 잔인한 고통을 가스마스크는 참아 내지 못했다.
[이, 빌어먹을 자식!]
둔중한 외침이 방독면 안쪽에서 울렸다. 귀에 벼락처럼 내리꽂히는 목소리에 요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끝이 명료하지 못하고 뭉그러지는 음성은 냉혹하게 사람을 살육하던 이의 것치고는 변변찮았다.
게다가 저 끄트머리가 독특하게 내려가는 어투는 크리스티나가 캠프장을 예약하던 당시 언뜻 들었던 관리인의 말버릇과 제법 비슷했다. 서준이 수없이 주장하던 가설이 마침내 힘을 얻었다.
하지만 연쇄 살인마의 정체가 정말 관리인인들 무슨 상관일까? 요한은 그의 이름도, 이력도, 하다못해 살인을 저지르는 이유조차 궁금하지 않았다.
당장 그에게 필요한 건 피를 흘리는 가스마스크의 몸뚱이뿐이었다. 요한은 숨을 한번 들이쉬었다. 자신의 등 뒤에서 괴물에게 무력하게 붙잡힌 서준의 존재감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고민은 짧았다. 버석하게 마른 입술이 찢어져 풍기는 피 냄새를 맡으며 요한은 맨손으로 가스마스크의 상처를 파헤쳤다. 가스마스크와 요한은 바닥을 구르며 개처럼 뒤엉켰다. 요한은 필사적으로 그를 붙들고 늘어졌다. 안구의 핏줄이 터졌는지 붉게 물든 시야에서 가스마스크의 검은 우비가 휘날렸다.
요한은 거침없이 팔을 뻗었다. 지성과 이성 따위는 포기했다. 지금 그가 바라는 건 오로지 원시적인 폭력이었다. 손톱이 빠져 벌겋게 살이 드러난 손가락이 가스마스크의 상처 난 다리 속으로 사납게 비집고 들어갔다.
[아아악!]
과도의 날이 박힌 상흔의 면적은 따지자면 폭이 좁고 깊었다. 그러나 요한은 제 손이 망가져도 괘념치 않는다는 듯 조그만 틈을 벌리고 다섯 개의 살덩이를 욱여넣었다.
그가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가스마스크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요한은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날붙이를 잡아챘다. 가스마스크의 발버둥이 더욱 심해졌다.
이성이 마비된 건 요한만이 아니었다. 가스마스크 또한 말 그대로 혈관을 잡아 뜯는 손길에 괴로워하며 온 힘을 다해 저항했다. 그는 뼈가 도드라진 팔꿈치를 세워 요한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찍었다.
바람을 가르는 매서운 소리에 요한은 반사적으로 머리를 옆으로 기울였다. 가스마스크의 팔꿈치가 요한의 어깨를 얕게 스쳤다.
“큭!”
묵직한 둔통이 요한의 신음을 끌어냈다. 만약 제대로 맞았다면 안구가 튀어나왔을지도 모를 괴력이었다.
하지만 가스마스크는 실패했고 요한은 두 번이나 그에게 기회를 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제 손바닥을 파고드는 칼날을 붙잡고 그대로 손을 빼냈다.
[끄으으으윽!]
혈관을 짓뭉개듯 잘라 낸 덕에 가스마스크의 다리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끔찍할 정도로 피를 흘린 연쇄 살인마의 허벅지는 마치 다진 고기처럼 변했다. 그는 고통이 너무 심한지 일어서지 못하고 몸을 움찔움찔 떨었다.
“후우….”
요한은 피로 푹 젖은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려다가 혀를 찼다. 그는 피로한 낯으로 옷에 손을 대강 닦고는 그나마 멀쩡한 다리로 가스마스크의 등을 차 굴렸다.
새빨간 피가 가스마스크의 행로를 고스란히 가리켰다. 목적지는 괴물의 코앞이었다. 늪과 호수 깊은 곳의 냄새가 나는 괴생명체 앞에서 요한이 상냥하게 웃었다.
“괴물아, 네가 좋아하는 먹이야.”
침을 몇 번이나 삼킨 끝에야 제대로 된 말이 나왔다. 그는 일부러 서준을 바라보지 않았다. 대신 요한은 쪼그려 앉아 가스마스크의 상처를 짓이겼다. 신선한 피가 다시 쭉 새어 나왔다.
그는 생각했다.
왜 이곳까지 온 괴물은 건물 속 군인을 끄집어냈을까? 따지자면 군인은 괴물에게 있어서는 가장 안전한 장소에 숨어 있었다. 비록 그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은 꼴이었으나 일단 위치상으로는 그러했다.
하지만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 괴수는 가장 가까이서 뒹구는 서준이나 요한, 가스마스크, 보비를 우선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붕 위에 올라가 있던 에어리와 크리스티나에게 신경 쓴 것도 아니었다. 윌리엄 또한 마찬가지로 괴물의 인식 범위에서 앞서지 않고 밀려났다. 그렇다면 왜 군인이었을까?
요한은 기억력이 좋은 편이었다. 그는 자신이 군인에게 한 짓거리를 되새겼다. 바비큐 꼬챙이로 옆구리를 꿴 덕에 내장 일부와 피가 나왔다. 제대로 된 지혈조차 하지 않았으니 구멍에서 피가 계속 흘렀을 것이다.
괴물을 잡을 미끼로 그들을 사용하겠다고 군인이 스스로 말하지 않았던가. 그는 딱 한마디를 덜 했을 뿐이다. 괴물은 살아 있는 동시에 피를 흘리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계산을 끝낸 요한은 새로운 미끼를 만들어 냈다. 아직 살아 있으며, 싱싱한 피를 흘리고, 먹을 부분도 많은 훌륭한 인간이었다. 요한은 가스마스크의 몸을 데굴데굴 굴려 괴물 앞까지 친절하게 배달해 주었다.
지금 이곳에서 가장 피를 많이 흘리는 사람은 알맞게도 연쇄 살인마였다. 청년의 입가에 소년다운 미소가 걸렸다.
“맛있게 먹어.”
요한은 피로 젖은 양손을 등 뒤로 숨겼다. 희미하게 올라간 입꼬리와 부드럽게 접힌 눈매는 평소와 같이 느긋했다. 하지만 그의 등 뒤로 가린 손은 우스꽝스럽도록 덜덜 떨렸다.
그러므로 요한은 볼 안쪽의 살을 깨물며 씩 웃었다. 그는 능란한 선수였다. 운동 시합이라는 것은 단순한 피지컬의 싸움이 아니었다. 정교한 계획과 알맞은 배치가 그들에게 승리를 안겨 주었다.
애초에 삶의 모든 일에 진심을 내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요한은 피로 젖은 손을 내보이는 대신 느릿하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서준이 당장 죽지 않아 보일 수 있는 여유를 마음껏 드러냈다.
그는 가스마스크의 목을 밟아 고정한 채 괴물을 바라보았다. 시선은 괴물의 몸뚱이에 기묘하게 갈라진 틈을 향했다. 안구의 위치를 알지 못하니 어쩔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눈이 있기는 할까? 요한은 사소한 궁금증을 갈무리하며 피비린내 섞인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포장까지 벗겨 주길 바라는 건 아니지? 손이야 많잖아.”
그가 바라는 건 오로지 한 가지였다. 저 먼 우주에서 찾아온 불청객의 시선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일순이라 해도 좋았다. 가녀린 허리를 우악스레 조이는 촉수에서 힘이 빠지고 요한조차 닿지 못한 내장에서 불쾌한 돌기를 빼내기를 바랐다.
으득, 하는 소리는 그의 귀에만 들렸다. 입 속에서 차가운 쇠 맛이 퍼져 나갔다. 요한은 이에 물어뜯긴 상처를 혀로 훑었다. 그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타인을 함부로 상처를 주고, 야만스럽게 먹어 치우는 그들의 잔혹한 심성이라니! 이윽고 가스마스크의 관자놀이 부근을 가볍게 발로 차며 혀를 찼다.
그의 발길질 때문인지 가스마스크의 방독면이 조금 삐뚤어졌다. 운동화 앞코에 걸리는 감촉에 요한이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로 그 순간, 요한의 소원이 이루어졌다.
욕심 많은 괴물은 달콤한 미끼에 관심을 보였다. 일전 에어리를 붙잡았던 촉수와 비슷하게 생긴 말단 조직이 길게 뻗어 나왔다. 기름기 있는 광택이 도는 촉수는 소리 없이 기어 와 가스마스크의 종아리를 붙잡았다.
그것을 악력이라 불러야 할지,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확신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괴물의 촉수가 가진 힘은 대단했다. 그 때문에 가스마스크의 무릎 아래가 으스러지는 데에 나온 소음은 그의 비명이 전부였다.
“으윽, 으아! 아아악! 안 돼! 안 돼!”
방독면이 조금이나마 비뚤어진 탓인지 가스마스크가 내지르는 비명은 선명하게 귀에 꽂혀 들었다. 그는 흙바닥을 부여잡으며 끌려가지 않기 위해 힘껏 버텼다. 그러나 괴물의 무자비한 괴력을 여덟 개의 손가락으로 버티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끄으윽!”
가스마스크의 처절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피로 젖은 손은 속절없이 미끄러졌다. 그때 땅의 흙과 풀을 파헤치던 손은 마지막 희망이라도 되는 양 요한의 운동화를 붙잡았다.
하지만 그들은 친구가 아니었다. 요한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가스마스크를 내려다보며 다리를 가볍게 털었다. 하얀 운동화에 핏자국이 길게 흔적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