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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33)화 (33/156)

#033

낙하의 순간 서준의 머릿속에서 후회가 짧게 스치고 지나갔다. 인지는 모터 엔진처럼 맹렬하게 돌아가며 가스마스크의 잔상을 그려 냈다.

‘다른 곳을 쐈어야 했나?’

생각은 길게 이어지는 대신 부정으로 수렴됐다.

우선, 서준은 가스마스크가 우비 속에 무엇을 갖추었는지 몰랐다. 그는 가벼운 셔츠를 입었을 수도, 방탄조끼를 입었을 수도 있다. 알지 못한다는 것은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했다. 겨우 한 번의 기회밖에 없는 탄환을 불확실성에 소비하는 건 두려웠다.

그렇다면 머리를 쏴야 했던가?

서준은 제 생각을 다시금 부정했다. 우비 속과 마찬가지로 그는 방독면의 재질을 알지 못했다. 성공한다면 더할 나위 없었으나 실패한다면 이는 제법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리라.

물론 가스마스크의 방독면은 머리 전체에 씌우는 형식이 아니다. 전두부와 두정부는 가려져 있으나 후두부는 드러난 형태이다. 다만 서준의 공격 위치에서 가스마스크의 머리 뒷면을 쏠 기회가 확실하게 올지 알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남은 것이 무기를 든 손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이성적 사고 아래에 깔린 선지자의 본심은 더욱 맹목적인 이유를 포함했다. 가스마스크의 목소리를 듣고 더듬더듬 대비하는 일행을, 크리스티나를 바라보며 서준은 확신했다.

든든하게 친구를 격려하고 떨리는 다리로 일어서는 크리스티나야말로 진정한 주인공이었다. 가스마스크를 죽인다면 그건 그녀여야 옳았다.

서준은 사람의 가죽을 둘둘 말아 옆구리에 끼고 온 요한을 곁눈질로 흘기며 자신의 맹신을 담금질했다. 그렇게 서준은 가스마스크의 손가락을 쏘았다. 비겁하고, 나약하고, 졸렬한 인간성을 지닌 그의 주장은 매끄럽게 받아들여졌다. 서준과 달리 그들은 타인에게 살인을 종용하지 못했다.

결과, 그는 가스마스크와 함께 떨어졌다.

다리를 잡아끄는 무게는 그의 빈약한 머리통을 단단한 흙과 돌에 박아 깨부술 터였다. 짧은 순간, 서준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입 속을 맴도는 피비린내를 느끼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추락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아악!”

비명이 허공을 갈랐지만 손목이 날카롭게 잡아채이며 몸이 더 밑으로 떨어지지 않고 멈췄다. 다급하게 달려온 요한이 서준의 오른쪽 손목을 붙잡은 것이다.

워낙 갑작스러워 서준은 마치 어깨가 뽑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덜걱 잡힌 팔의 살과 근육이 찢어지는 소리를 냈다.

“끄으윽….”

신음과 피 섞인 침이 목구멍을 타고 위장으로 떨어졌다. 요한이라고 쉽게 낚아챈 건 아니었다. 그는 벌겋게 충혈된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이를 악물었다.

지방과 근육의 함량이 부족하고 골밀도만 높은 서준의 몸뚱이라면 끌어 올리기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다리에 가스마스크가 매달려 부담을 얹고 있었다. 요한과 버금가는 중량의 몸뚱이는 늪처럼 끈질겼다.

창문으로 몸을 반쯤 내민 요한은 남은 한 손으로 창틀을 부여잡았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요한의 손목을 긁었다.

“요한, 놓지 마!”

뻔뻔하게 내뱉고 보는 서준의 말에 요한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상황에 맞지 않게 호쾌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그려졌다.

“당연, 하지! 절대로 안 놓쳐….”

요한이 힘을 주어 버틸수록 잘게 부서진 유리 조각이 손바닥 깊숙이 파고들었다. 지붕에 있던 크리스티나와 에어리도 안절부절못하며 도와주려 했지만 위치가 문제였다. 사선으로 기울어진 바닥에서는 힘을 보태기는커녕 자세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서준이 총을 쏠 때는 엎드려 다리를 하나씩 붙잡는 식으로 해결했지만 지금은 요한을 도우려다가 그들이 미끄러져 떨어질 위험이 있었다.

‘이러다가는 요한까지 떨어지겠어.’

서준은 자신이 말 그대로 요한의 발목을 붙잡았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는 제 하체에 매달린 가스마스크의 안면을 향해 발길질했다.

“씨발, 치워!”

그러나 서준의 두 다리에 억센 팔뚝이 휘감겨 소용없었다. 심지어 가스마스크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일부러 몸을 흔들었다. 요한의 몸이 점점 창문 바깥으로 끌려 나왔다.

“큭!”

수려한 이마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핏줄이 불룩 돋았다. 창틀을 붙잡은 손가락이 점점 미끄러졌다.

“으아아아!”

이때 간신히 통증을 가라앉힌 윌리엄이 괴성을 지르며 요한에게 다급히 달려왔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가스마스크가 서준의 허리춤까지 손을 뻗었다. 요한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선택은 빨랐다. 독수리처럼 거대한 그림자가 하늘을 날았다. 요한이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아!”

짧은 비명이 서준의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순간적으로 가벼워진 손끝이 허망했다. 그러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요한이 서준의 등허리에 팔을 감으며 그를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창문을 박차고 뛰어내리는 힘을 이용해 가스마스크의 정수리를 발뒤꿈치로 찍어 내렸다.

뻑, 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리고 마침내 가스마스크가 서준의 다리에서 떨어져 나갔다. 서준의 수수깡이나 다름없는 다리와는 위력이 천지 차이였다.

서준이 자그마한 기쁨을 곱씹을 새도 없이 충격이 그의 생선 가시와 엇비슷한 척추를 강타했다. 놀랍게도 요한이 허공에서 가스마스크를 차는 반동을 이용해 구 합숙소의 건물 외벽에 달라붙은 것이다. 덕분에 서준과 요한은 3층 높이에서 머리부터 박으며 떨어진다는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물론 좋은 일만 연달아 일어나지는 않았다. 아무리 낡았다 해도 건물의 외벽이었다. 친절하게 손잡이가 달리지 않으니 요한은 무작정 홈이 있는 부분에 손가락을 박아 넣었다. 대단한 순발력이었으나 마찰을 이기지 못한 그의 손톱이 여럿 날아갔다.

“…윽!”

짓깨문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오고 콧잔등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하지만 요한은 서준을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줄 뿐 앓는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서준은 자신도 모르게 홀린 듯 요한을 바라보았다. 완고하게 다물린 입술의 아랫부분이 붉게 부풀었다. 짧은 감상이 신열처럼 광대뼈 위를 달구었다. 그러나 그 감정의 깊이를 한가하게 파헤칠 시간은 없었다.

너른 가슴팍이 서준의 얼굴을 감싸기 무섭게 몸이 데굴데굴 굴렀다. 무중력에서 벗어난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더운 땀과 피의 냄새가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으….”

골통이 심하게 흔들렸다. 두어 바퀴를 구른 다음에야 축축한 밤이슬에 젖은 잡초가 등을 찌르는 것을 알았다. 서준은 머저리처럼 눈을 끔뻑거렸다. 단단한 어깨 너머로 보이는 달덩이가 새하얗다. 촘촘한 속눈썹이 느릿하게 흔들렸다. 야속할 정도로 시린 달빛을 깨달은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요한, 일어나!”

현실을 자각하자마자 서준은 요한의 뺨을 거세게 두드렸다. 아무리 초인처럼 구는 쿼터백이라도 반고리관의 기능은 일반인과 비슷한지 영 맥없이 굴었다.

하지만 먼저 정신을 차린 선지자는 가엾은 척추동물이 천천히 정신을 차리도록 기다려 줄 배포가 부족했다. 왜냐하면 그들과 열 걸음 정도 떨어진 위치에서 가스마스크가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준은 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비명을 삼켰다.

‘빌어먹을 연쇄 살인마, 빌어먹을 가스마스크!’

가스마스크는 서준의 다리에 매달려 사실상 3층보다 더 낮은 높이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일반인이라면 모를까, 공포 영화 속 살인마에게 그 정도 위험은 긴장감을 약간 높이려는 애교나 다름없었다.

서준은 튀어나오려는 간을 간신히 수납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라면 요한도 금세 정신을 차린 정도였다.

그는 손톱이 몇 개 날아가 제법 빈궁해진 손가락을 말아 주먹을 쥐었다. 꼬챙이를 3층에 던져두고 온 요한에게는 이렇다 할 무기가 없었다. 그리고 서준은 가스마스크가 요한의 발길질에 순순히 떨어져 나간 진정한 이유를 깨달았다.

가스마스크는 마치 낄낄거리듯 어깨를 으쓱했는데, 손에는 반지르르한 윤기가 흐르는 총이 한 정 있었다. 익숙한 생김새가 꼭 조금 전까지 제 옆구리에 있던 물건 같아 서준은 저도 모르게 허리춤을 뒤적거렸다. 과연 허전했다.

서준은 헛기침을 몇 번 하며 금방이라도 육탄전을 벌일 듯 어깨에 바짝 힘이 들어간 요한의 앞으로 쓱 나섰다.

“잠깐만요, 선생님. 우리 이런 흉흉한 물건은 치우고 대화로 해결합시다. 저희가 비록 첫 만남 이후에도 얼굴을 붉히기야 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로 넘길 수 있지 않을까요? 아, 물론 선생님은 방독면을 써 얼굴이 초록색인지 파란색인지는 모르겠지만….”

서준의 목소리는 앙큼하니 내숭스러운 구석이 있었고 어딘가 진실하기까지 해 참으로 오묘했다. 하지만 서준이 아무리 혓바닥을 놀려도 그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었으니, 가스마스크는 입을 열어 대꾸하는 대신 제 다리를 슬쩍 들어 가리켰다.

서준이 침을 꿀꺽 삼켰다. 모르는 체하기에는 제가 도끼질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사실 하루도 지나지 않은 일이었으니 벌써 잊으면 곤란했다. 그러나 그는 희망을 놓지 않고 열심히 입술에 침을 발랐다.

“돈, 돈을 원하신다면 전 재산을 드릴게요. 오늘 있었던 일도 잊으라면 잊겠습니다. 신고? 저희가 가야 할 곳은 경찰서가 아니라 병원이죠. 아무렴요.”

가스마스크는 서준이 나불대는 소리를 한껏 음미했다. 고약한 취미였다. 그의 손이 천천히 올라갔다. 총구가 서준과 요한을 겨누었다. 일직선에 선 그들이니 누구부터 쏠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방아쇠가 천천히 당겨지고 방독면 속 입꼬리가 잔혹하게 올라갔다.

“미친 새끼야, 살려 줘!”

그리고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이 저들끼리 한쪽으로 쓸리며 맞부딪혔다. 자그마한 과도가 살을 파고드는 기척은 바람 소리에 파묻혔다. 서준이 부러 낸 비명도 한몫했으리라.

가스마스크는 고개를 돌려 제 등 뒤를 보았다. 모근의 색이 진한 금색 머리카락이 팔락 흔들렸다. 괴상망측한 표정의 청년이 그를 올려다보며 턱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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