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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32)화 (32/156)

#032

무심결에 뒷걸음질하는 발의 뒷굽이 바닥과 비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손가락 사이로 엉킨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반짝반짝 흐느적거렸다. 록 스타처럼 길게 자란 머리칼은 축축하게 젖어 있어 장갑을 낀 손에 달라붙듯 뒤얽혔다.

가스마스크가 팔을 흔들 때마다 축 늘어진 리처드의 가죽이 짚을 흘리며 꼭두각시 인형처럼 따라왔다. 가스마스크는 기겁하며 뒤로 자빠지는 대신 날벌레를 쫓듯 손을 휘둘렀다.

속이 실하게 들어찬 리처드는 여느 사람이라면 기절해도 놀랍지 않은 몰골이었다. 그러나 가스마스크는 연쇄 살인마답게 손괴된 시신을 함부로 다루는 데 익숙했다. 그는 귀찮게 엉킨 머리카락을 아예 잘라 버릴 요량으로 하몽 나이프를 치켜들었다. 가스마스크에게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괜찮다. 서준이 원하는 것은 바로 이 잠깐의 시간이었다. 찰나의 방심과 부주의하게 흐트러지는 시선을 원했다. 지금 이 순간을.

“흡!”

바깥의 공기가 덥게 열이 오른 목을 차게 식혔다. 허리와 다리를 단단히 붙드는 손을 믿고 서준은 아래로 몸을 수그렸다. 타고난 운동 신경 자체가 썩 좋은 편이 아니라 어깨가 창틀에 요란하게 부딪혔다.

얼얼한 통증을 자각하기도 전에 날 선 시선이 서준을 향해 날아왔다. 여전히 한 손에 리처드를 든 가스마스크가 곤충의 안구 같은 유리알을 번뜩거렸다.

살인자는 열린 창가의 바깥에 거꾸로 매달린 깡마른 청년을 보았다. 희미하게 들어오는 달빛이 박쥐처럼 늘어진 그의 몸을 비췄고 아래로 처진 머리카락이 밤바람에 흔들렸다. 대리석처럼 찬 느낌이 드는 흰 이마에는 푸른 핏줄이 돋았다. 입가에는 피가 말라붙어 검붉은 자국이 남았다. 곧 그곳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서준은 뒤집힌 시계를 만끽했다. 중력을 거스르지 못한 피가 머리로 쏠리고 안압이 올랐다. 하지만 그는 주저하지 않고 의식적으로 팔을 뻗었다. 손바닥의 온기조차 전해지지 않는 무정한 흉기를 믿었다.

가스마스크가 총성을 듣고도 보비를 챙겨 사라진 것이 대단히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알려 줄 때였다.

“흐읍,”

한껏 숨을 들이쉬자 서늘한 공기 덩어리가 폐를 가득 채웠다. 근거리 사격에 유리한 건 비단 군인만이 아니었다. 흉기는 무정했으며 손가락이 달렸다면 누구에게나 공평했다. 대화도 빈정거림도 필요 없었다. 서준과 가스마스크는 태평하게 안부를 물을 사이도 아니었다. 손가락 끝에 걸린 쇠의 촉감이 정신을 밝게 일깨웠다.

상황을 파악한 가스마스크가 곧바로 하몽 나이프를 휘두르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머리카락을 자르기 위해 자세를 잡고 있던 그의 행동은 굼뜰 수밖에 없었다.

가늠자와 가늠쇠가 겹쳐졌다. 슬라이드를 당기고 방아쇠를 당겼다. 지극히 당연한 순서, 지극히 당연한 단계, 지극히 당연한 과정을 거쳐 탄환이 입구를 빠져나갔다.

탕, 소음기를 장착하지 않아 정제되지 못한 충격파가 귀를 얼얼하게 울리고 바르지 못한 자세 때문에 서준의 어깨에는 둔중한 타격을 안겼다.

“큭!”

사람의 손가락 길이만도 못한 작은 폭력은 어긋나는 일 없이 목표에 명중했다. 날카로운 칼날이 가스마스크의 손에서 떨어져 바닥을 여러 차례 굴렀다. 아니, 하몽 나이프만이 아니다. 그것을 잡고 있던 가스마스크의 손가락 두 개가 끊겨 함께 나동그라졌다. 왼손 엄지의 첫 번째 마디와 검지의 두 번째 마디 부근의 혈관이 터지며 피가 분수처럼 솟았다.

[……!]

방독면 바깥으로 새어 나오지 않는 비명이 귀에 들리는 듯 선했다. 고통을 이기지 못한 가스마스크의 자세가 크게 흐트러졌다. 그는 아무런 의미 없이 손가락이 세 개밖에 남지 않은 왼손을 허공에 들어 올렸다. 제법 전위적인 몸짓이었다. 동시에 짚 더미가 크게 들썩이고 날카로운 일격이 날아왔다.

노련한 살인자를 상대하며 함정을 하나만 파는 것은 요한의 성미와 맞지 않았다. 요한은 군인의 몸뚱이 바로 아래에서 숨죽인 채 기다렸다. 자신이 찌른 구멍에서 흐르는 피와 내장의 냄새를 맡았다. 가스마스크의 무장이 해제되고 그의 신경이 다른 곳으로 쏠릴 때까지 인내했다.

요한의 팔은 창을 찌르듯 능란하게 쇄도했다. 짧은 기합조차 없이 냉정하게 꼬챙이를 내찔렀다. 허리, 가능하다면 척주를 노린 일격이었다.

그는 제 거구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잘 알았다. 어깨와 팔의 근육이 팽팽하게 부풀었다. 꼬챙이의 길이에서 점한 우위는 서슴없이 포기했다. 대신 도구가 본래 목적대로 사용될 수 있도록 무게를 실었다. 단단히 부여잡은 손목에 푸른 핏줄이 불뚝 섰다.

마치 포옹하듯 가까워진 거리였다. 가스마스크가 피할 장소는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도 어설프지 않았다. 가스마스크는 휘청이는 몸을 억지로 틀었다. 우비로 감싸인 육체가 앞으로 쏠리고 옷장에 부딪혔다. 낡아 빠진 옷장의 문이 우그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덕분에 꼬챙이는 등 중앙이 아닌 옆구리를 스쳤다.

“이런!”

요한이 치명상을 피한 가스마스크를 보며 혀를 찼다.

그런데 더한 문제가 생겨났다. 가스마스크와의 충돌을 이기지 못한 옷장이 지금까지 올곧게 서 있었다는 것이 기적이었다는 양 앞으로 기울어졌다. 크리스티나와 에어리의 도움을 받아 구 합숙소의 지붕으로 몸을 끌어 올리던 서준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요한, 위험해!”

비록 속은 비어 있으나 옷장의 부피는 무시할 만한 것이 못 된다. 더군다나 옷장에 깔리거나 갇힌다면 옆구리를 찔리고 손가락을 잃은 가스마스크가 가만있을 리 만무했다.

천천히 기울어지는 옷장이 금방이라도 사람을 잡아먹을 듯 쓰러졌다. 그러나 요한은 옷장을 피하는 대신 왼쪽 팔뚝을 들어 막았다.

“하하, 이거 생각보다 무겁네!”

이런 상황에서도 요한은 쾌활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그의 턱 아래는 붉게 달아올라 힘들다는 것을 드러냈다.

‘왜 안 피했지?’

서준은 초조하게 3층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다리에 힘을 주는 가스마스크를 보던 서준은 곧 이유를 깨달았다.

오른쪽에는 가스마스크가, 왼쪽에는 가스마스크의 손가락이 떨어지며 피가 흐른 자국이 있었다. 자칫 잘못해 저 부근을 밟았다면 피에 미끄러졌을지도 모른다. 물론 확실하지는 않다. 문제는 가능성 그 자체였다. 일말의 실현성이 요한의 발을 묶어 버렸다.

‘하필이면 저 자리에….’

머리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수많은 함정을 준비하고 무기와 손가락까지 떨구었다. 분명 적기였다. 하지만 연쇄 살인마의 생명은 질기고 근성은 더욱 끈덕졌다.

고뇌는 짧았다. 서준은 기껏 올라온 지붕에서 다시금 몸을 날렸다.

“서준, 뭐 하는 거야!”

지붕에 있던 크리스티나가 놀라 외치는 소리도 무시했다. 다만 이번에는 창에 거꾸로 매달리지 않았다. 그는 한 손으로 처마를 붙잡았다. 체중이 가벼워 펼칠 수 있는 묘기였다. 물론 뻣뻣하기 짝이 없는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러 댔지만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촉감이 낯설고 두려웠으나 서준은 이를 악물었다. 찢어지고 튼 입술이 따끔거리며 더한 공포를 맛보기 싫다면 얼른 노동하라 강요했다. 가스마스크에게 잡힌다면 이따위 고통은 애교로 보일 체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총을 든 팔이 볼썽사납게 흔들렸다.

“움직이지 마!”

굼적거리던 가스마스크가 느긋하게 고개를 돌렸다. 방독면 너머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서준은 자신이 파충류 같은 시선과 맞부딪혔다고 직감했다.

‘총알이 없다는 걸 저 자식은 몰라.’

서준은 볼 안쪽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총알은 전부 소모했다. 하지만 가스마스크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서준은 얼마든지 거짓말을 할 수 있었다.

지면을 밟지 못한 허리 아래가 불안스레 흔들렸다. 그리고 그때, 윌리엄이 가스마스크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당당하게 3층의 문으로 뛰어 들어와 가스마스크의 뒤에서 목에 팔뚝을 감았다. 놀랍도록 부풀어 오른 근육이 방독면 아래의 목젖을 압박했다.

[큭!]

갑작스러운 습격에 가스마스크가 몸을 뒤틀었지만 윌리엄의 체구 또한 훌륭했다. 그는 끈질기게 가스마스크의 목에 매달렸다.

‘좋아, 이대로만 하면 돼.’

서준이 시간을 끄는 사이, 마찬가지로 지붕에 있던 윌리엄은 계단 쪽 창문으로 몸을 욱여넣어 건물 내부로 들어왔다.

서준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온통 부상을 입은 인원으로 가스마스크를 상대하려면 정면 돌파는 어려웠다. 그 때문에 그들은 수많은 구덩이를 파야 했다.

서준과 윌리엄이 시간을 끄는 사이 요한도 기어이 옷장을 옆으로 떠밀었다. 큰 소리와 함께 3층의 바닥이 흔들렸다. 바닥에 쌓였던 먼지가 주변으로 흩날렸다. 콧구멍과 입으로 들어오는 매캐한 먼지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윌리엄, 잘 붙잡아!”

옷장에서 벗어난 요한은 거추장스러운 리처드의 가죽을 발로 차며 꼬챙이의 손잡이를 잡았다. 여전히 옆구리가 꿰여 있던 가스마스크가 몸을 크게 꿈틀거렸다.

요한은 그의 괴로움을 무시하고 꼬챙이를 빼냈다. 제대로 찌르기 위해서 선행해야 하는 동작이었다. 막혀 있던 구멍이 뚫리자 피가 분수처럼 솟았다. 그러나 일시적인 자유를 얻은 가스마스크는 더욱 크게 반항했다.

말하자면 운이 나빴다. 윌리엄은 가스마스크의 목을 조르기 위해 자신의 상반신 전면부를 무방비하게 드러냈다. 하필이면 가스마스크가 그의 쇄골을 찍은 것 또한 윌리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문제였다. 뼈가 쪼개지는 듯한 고통이었다.

“크윽!”

낮은 비명과 함께 윌리엄의 팔에서 힘이 풀렸다. 그가 주저앉자 가스마스크는 창문을 향해 달렸다. 지붕으로 올라가기 위해 팔을 뻗고 있던 서준은 망연하게 그 꼴을 바라보았다. 연쇄 살인마가 제게 손을 뻗는 그 모습을.

“아!”

오랜 세월 삭풍에 시달리던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하복부에 충격이 닿았고 몸이 아래로 빨려드는 감각이 뒤늦게 몰려왔다.

추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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