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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31)화 (31/156)

#031

굳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사이란 것이 있다. 비록 서준은 이 장소에 있는 인원과 그렇게까지 친근하지는 않았으나 지금은 그 누구라도 같은 마음일 터이다.

크리스티나가 맑은 눈물을 흘리며 두 눈을 감았다.

“우린 망했어.”

그녀가 눈과 입을 닫기 무섭게 에어리가 머리카락을 쥐어뜯기 시작했다. 윤기 흐르던 갈색 머리카락이 억센 손아귀에 뽑혀 훌훌 휘날렸다. 폐허나 다름없는 공간에서 가느다란 모발이 허공에서 천천히 가라앉아 바닥으로 떨어지는 광경은 참으로 기괴했다.

“아악! 이 세상에 신은 없어!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우리는 뺑소니 사고를 일으킨 적도 없고, 캠프장에서 애들을 돌보다가 물에 빠뜨린 적도 없고, 수상한 라틴어 책을 읽은 적도 없고, 베이비시터 아르바이트를 한 적도 없는데! 대체 왜!”

모태 신앙자는 심장에 깊은 상처가 남은 듯 펄펄 날뛰었다. 서준은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음, 혹시 어머니께서 불륜하신다는 음해를 받으신 적은 있어?”

“잘 들어, 우리 집은 아빠밖에 안 계시는 한부모 가정이라고!”

자칫 그녀에게 입양된 전적이 있다면 혹시 연쇄 살인마 기질이 있는 손위 형제가 존재하는지 물어볼 뻔한 서준은 오늘부터 무신론자가 되겠다며 주장하는 에어리의 곁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펄펄 뛰는 그녀를 곁눈질하며 서준은 주변을 살펴보았다.

상황은 비관적이었다.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괴물과 기이한 전화를 남긴 가스마스크가 존재했으며 바깥과 연락할 가능성도 전무했다.

“…….”

서준은 볼 안쪽의 살을 깨물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입술 양쪽 언저리가 따끔따끔 쓰라렸지만 사소한 통증에 매몰되어 있을 시간조차 아까웠다.

다만 골든은 못마땅한 어조로 불퉁하게 입술을 내밀더니 이미 내려놓은 전화기를 깡깡 내리쳤다.

“대체 이 머저리는 뭔데 호들갑이야?”

“그만해, 그러다가 가스마스크가 들으면 어떡하려고!”

“겁들은 많아서, 퉤.”

바닥에 침을 뱉은 골든이 형형하게 빛나는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서준은 그에게 심심하면 얻어맞은 전적이 있으므로 골든의 심기가 무척 불편하다는 걸 빠르게 알아차렸다. 사실 누구라도 알 만한 표정이었다.

“여기 사람이 몇인데 고작 한 명한테 빌빌거려? 이놈이 그 상한 오징어 같은 괴물도 아니고! 한꺼번에 덮치면 제가 별수 있겠냐고.”

가스마스크를 직접 목격하지도 않고 서준에게 자세히 이야기를 들은 바 없는 골든은 크리스티나와 친구들의 공포를 공감하지 못했다. 하지만 요한은 골든의 비웃음에 성을 내는 대신 입꼬리를 올렸다.

“골든, 네 입으로 석궁을 쏜 건 브래스라고 하지 않았어?”

“왜 갑자기 딴소리야?”

숨을 쉬고 말을 할 때마다 그들의 폐 속으로 오랜 시간 묵은 먼지가 끼어들었다. 그러나 골든은 부러 크게 가슴을 펴고 턱 끝을 올렸다. 그는 자신보다 키가 큰 요한과 눈을 마주치기 위해 목을 올리고 싶지 않았다.

푸른 눈은 정적으로 빛났다. 그의 시선은 다소 어렴풋한 느낌으로, 제대로 된 불빛이 없는 공간에서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서준은 요한이 목을 까딱거리며 골든을 향해 허리를 숙였을 때 무척 기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골든, 목 위에 있는 걸 마약 흡입구로만 사용하지 말고 생각도 좀 해 보는 건 어떨까?”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폭력적인 기미는 섞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다정하고 안온한 이였다. 그러나 어투가 부드러우면 모두가 친절한 사람이던가?

“뭐? 지금 시비 걸어, 어!”

골든 또한 코앞에서 늘어놓는 모욕을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뇌세포가 파괴되지는 않았다. 그는 요한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았다. 그게 전부였다. 목덜미를 잡힌 요한은 제자리에 단단히 서 있었다. 되레 눈웃음을 치더니 골든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 냈다.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잖아. 브래스는 사람을 향해 석궁을 쏘는 것도 망설이지 않는 쓰레기잖아. 그런 쓰레기한테 손쉽게 무기를 빼앗은 거야.”

뒤늦은 설명이 골든의 귀에 제대로 들어갔을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크리스티나의 정신을 각성시키는 효과는 톡톡했다. 짧은 인생을 반추하던 그녀는 퍼뜩 눈을 뜨고 거침없이 다가왔다.

“그래, 요한 말이 맞아. 지금 우리끼리 다툴 때가 아니야. 일단 아래로 내려가자. 여기 있다가는 정말 죽을지도 몰라.”

다리가 불편한 윌리엄을 배려해서 한 소리일 것이다. 그리고 가스마스크가 갑자기 달려와도 벗어날 곳이 없는 3층보다는 1층이 낫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리라. 서준은 크리스티나의 뒤를 따라붙었다. 그의 목에는 어느새 쌍안경이 걸려 있었다.

사정을 들은 윌리엄의 낯이 심각해졌다. 그러잖아도 무뚝뚝한 그의 얼굴은 마치 석상처럼 굳었다.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윌리엄의 입이 열렸다. 어둡게 그늘진 미간에는 고뇌와 망설임이 서려 있었으나 목소리는 매끄러웠다.

“내가 미끼가 될게.”

“빌리!”

에어리가 낮게 비명을 지르며 윌리엄의 양 뺨을 부여잡았다. 볼이 눌린 모습은 제법 우스꽝스러웠으나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는 에어리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에어리, 내가 가스마스크를 붙들고 있는 틈에 캠프장을 빠져나가.”

“헛소리 작작 해, 빌리! 내가 널 어떻게 두고 가.”

에어리의 만류에 윌리엄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자신의 다리를 툭 치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서준은 윌리엄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했다. 윌리엄은 혼자서는 제대로 걷는 것조차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다리에 상처를 입은 윌리엄을 부축하며 놀라운 기동력을 가진 가스마스크에게서 벗어나기란 어려웠다. 윌리엄 자신도 그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서준은 그의 제안이 제법 달게 느껴졌으나 에어리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네가 보비처럼 되어 버리면 어떡해? 미끼라니. 아, 세상에! 그런 끔찍한 말은 입에 담지도 마, 윌리엄!”

그녀는 콧물을 훌쩍거리며 윌리엄의 목을 껴안고 울먹거렸다. 그런데 연인을 품에 안고 들썩거리던 에어리의 등이 부자연스럽게 멈췄다. 마치 기계가 움직이듯 뻣뻣하게 머리를 든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힘겹게 호흡하는 군인을 바라보았다. 에어리의 눈에 서늘한 한기가 스쳤다.

“미끼로 삼을 거라면 차라리 저 사람을 쓰자.”

그녀는 참혹한 몰골의 군인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저 정신 나간 군인만 아니었다면 그들은 진작 이곳을 빠져나갔으리라. 하지만 요한은 에어리의 제의를 단숨에 거절했다.

“너무 대놓고 미끼 같아서 소용없을 수도 있어. 우리로 착각할 리도 만무하고. 피 냄새도 독하고, 옷도 우리가 입은 것과는 전혀 다르잖아. 잠깐 의외로울 수야 있지. 피투성이에 숨이 꺼져 가니까. 하지만 연쇄 살인마라는 사람이 그 정도로 긴장을 놓을 것 같지는 않아. 의외성을 주려면 더 지독해야 해.”

심지어 알아서 움직이지도 못하니 길게 가스마스크의 시선을 붙잡을 용도로도 걸맞지 않았다. 입을 몇 번 벙긋거리던 에어리가 결국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그래도, 빌리를….”

“에어리, 나는 괜찮아. 네가 무사하다면 얼마든지 이 목숨을 내놓을 수 있어.”

“아아, 빌리!”

“에어리!”

윌리엄과 에어리가 서로를 다시 부둥켜안는 사이 크리스티나가 조심스럽게 총을 가리켰다.

“저걸 쓰면 어때? 아까는 나서서 위험을 자초하지 않는 게 낫다고 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잖아. 위험이 알아서 우리를 찾아오고 있어. 서준, 총을 쓸 줄 안다고 했지?”

크리스티나가 말끄러미 서준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두 눈에는 공포와 불안, 그리고 투지가 함께했다. 서준은 맹세컨대 크리스티나의 기대대로 행동하고 싶었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깨끗한 뇌를 가진 채 그녀의 명령을 듣다 보면 이 악몽 같은 하루가 지나갈 듯했다.

“음, 크리스티나.”

“왜?”

“우선 이 총에 관해서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과 더 나쁜 소식이 있어.”

서준의 말에 저들끼리 난리이던 윌리엄과 에어리는 물론이고 군인의 호흡을 확인하던 요한까지 행동을 멈추었다. 그가 떨떠름한 얼굴로 서준에게 말을 걸었다.

“준아, 그럴 때는 보통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만 있는 것 아니야?”

“요한, 현실을 직시해. 우리는 지금 선택의 여지가 대단히 빈약해. 그나마 좋은 소식이 하나 있는 게 다행일 지경이라고.”

서준과 요한이 대화하는 사이 크리스티나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서준, 좋은 소식이 뭐야?”

“총알이 남아 있어.”

서준의 대꾸에 크리스티나의 얼굴에 흐릿한 미소가 걸렸다. 그녀는 다소 안도하며 다시 물어보았다.

“그럼 나쁜 소식은? 설마 총이 고장 났어?”

“그건 아니고. 총알이 딱 하나 남았어.”

“…….”

크리스티나의 입꼬리와 오른쪽 뺨이 씰룩거렸다. 그렇다. 군인은 윌리엄을 위협하느라 아까운 총알을 허비하고 얼마 남지도 않은 총탄으로 그들을 농락한 것이다.

군인의 옷가지를 뒤져 보아도 다른 총알은 나오지 않았다…. 군인의 옆구리에 꼬챙이를 더욱 깊게 찔러 넣은 요한이 무릎을 툭툭 치며 일어섰다.

“그럼 더 나쁜 소식은 뭐야?”

군인의 옆구리에서 찔끔 새는 피를 보던 서준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요한과 크리스티나, 에어리, 윌리엄, 마지막으로 골든을 보았다.

“괴물에게는 총이 통하지 않아.”

“아…!”

나지막한 탄식이 에어리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녀의 뇌리에 하마터면 자신의 허리를 부러뜨릴 뻔한 괴물의 생김새가 언뜻 스쳤다.

곧 괴괴한 적막이 피부를 훑고 지나갔다. 그들의 머릿속에서 잠시나마 밀려났던 괴물이 다시금 부상했다.

서준도 괜히 크리스티나의 불안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가스마스크 하나로도 벅찬 때에 ‘우리의 생명은 풍전등화, 바깥에는 태풍이 두 개.’ 따위의 말을 조언이랍시고 지껄이고픈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이해해야 했다. 가스마스크만이 아니다. 하몽 캠프장에서 하나만을 상대해 살아남는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확신이었다. 크리스티나가 죽이기 전까지 몇 번이고 나타날 적들의 존재를 향한 굳센 믿음이었다.

“아, 그래.”

그때 조용히 굴던 요한이 서준을 향해 한쪽 눈을 가볍게 감았다 떴다. 어설픈 눈짓을 한 그는 웃으며 서준의 팔을 끌어당겼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할 수 있는 걸 해야 하지. 위기를 기회로 삼자. 응?”

그들의 형편과 지독하게 어울리지 않는 쾌활한 목소리였다.

***

구 합숙소의 건물 앞에서 흙 위로 난 풀을 밟는 소리가 났다. 그는 왼손에 든 하몽 나이프를 가볍게 흔들었다. 사람의 피를 몇 번이나 머금었던 날이 섬뜩하게 빛났다.

다른 무장은 필요치 않았다. 그는 역시 석궁 따위는 취향에 맞지 않았다. 짐승들을 몰아넣기 위해서 공포를 조장하는 건 즐거웠다. 그러나 그가 좋아하는 것은 직접 피부를 가르고 살을 써는 것이지, 손맛이 남지 않게 멀리서 쏘아 대는 게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에 어여쁜 소녀가 떠올랐다. 새하얀 피부의 소녀는 아름다운 금발이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금발을 손가락에 휘감고 목을 잘라 내면 얼마나 좋을까.

기대가 그의 심장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는 통증을 참으며 기껍게 발을 내디뎠다.

구 합숙소는 3층 건물이지만 사실 제대로 된 시설이라 부르기에는 미흡했다. 과거 한나 오 랜턴의 사건 이후 방치되어 마치 폐가나 다름없는 장소에 그나마 손본 것이 있다면 전화기가 전부였다. 방독면 속 입술이 꿈틀거렸다.

1층,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피를 흘린 흔적이 보였다. 그는 발끝으로 핏자국을 문질렀다. 굳지 않은 피가 지익 긁혔다.

2층, 아무것도 없었다. 가구 하나 없이 텅 빈 곳에는 숨을 곳도 마땅찮았다.

3층, 그는 우비에 감싸인 몸을 긴장시킨 채 들어섰다. 창문이 열려 찬 바람이 들어왔고 방은 꽤 어수선했다. 바람결에 따라 흔들리는 창틀이 유독 거슬렸다. 그는 오른손으로 방독면을 한번 추어올린 뒤, 창가로 걸어갔다.

그런 그의 발을 잡아채는 소리가 들려왔다. 짚 더미였다. 3층의 방구석에는 연유 모를 짚 더미가 있었다. 그도 평소에는 정돈하지 않고 내버려 둔 것이다. 그곳에서 희미한 움직임이 보였다….

그는 방독면을 쓴 탓에 냄새에 취약했다. 그러나 다른 감각만큼은 매섭게 단련했다. 덕분에 그는 알 수 있었다. 저 안쪽에 무언가 있다. 혈관 속을 맴도는 피가 뜨거워졌다. 그는 발끝에 힘을 주고 걸어갔다. 파삭파삭, 흩날리는 짚의 소리는 무척 힘없었다.

“으, 으으…. 흐….”

그리고 짚 더미 속에 있던 것 역시 다 죽어 가고 있었다. 군복을 입은 사람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남자는 전신의 피부가 짓물러 끔찍한 몰골이었다. 입에는 천 꾸러미가 억지로 틀어박혔으며 손과 발이 묶여 있고 눈도 가려 놓았다. 군복을 입은 남자는 나약한 신음을 흘릴 뿐이었다. 입가에는 침과 피가 흥건했다.

그는 반사적으로 치켜들었던 하몽 나이프를 내렸다. 돼지들의 반항은 늘 그렇듯 그에게 크나큰 흥분을 선사했다.

그때 반짝, 하고 하몽 나이프의 날이 무언가를 비추었다.

우연이었을까? 그는 하몽 나이프의 날에 반사되어 보이는 옷장을 응시했다. 고장 난 옷장은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는다. 그 틈으로 가느다란 머리카락 한 올이 빛났다. 어둠 속에서도 찬란히 빛나는 아름다운 머리카락. 마치 달빛처럼 황홀한 색.

그는 태연하게 뒤돌았다. 부러 옷장이 아닌 다른 곳을 뒤적거렸다. 그러나 온 신경은 옷장을 향했다. 원체 가구가 적은 방이었다. 그는 정말 어쩔 수 없다는 태도로, 마치 스쳐 지나가듯 옷장을 향했다. 반짝, 반짝, 반짝. 그는 기뻤다. 옷장 속에서 떨고 있을 돼지가 사랑스러웠다.

그는 이제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육중한 무게를 실은 걸음이 옷장을 향해 달려갔다. 꽝, 이미 망가진 문짝이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삭아 빠진 천 꾸러미 속 반짝거리는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는 탄성을 지르며 머리카락을 잡아챘다. 그리고 천 꾸러미에서 그것이 쑥 빠져나왔다.

안구 대신 짚이 튀어나오고, 주둥이에서도 짚이 흘렀다. 속에는 내장이 없는지 무척 가벼웠다. 오로지 짚으로 속을 채운 인간의 가죽이었다.

리처드 실버의 가죽과 가스마스크가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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