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30)화 (30/156)

#030

소리 없이 올라갔던 손은 마찬가지로 잠잠하게 내려갔다.

‘뭐, 나도 보비를 위해 최전방에 나서고 싶은 건 아니니까….’

서준은 그간 톰팃톳에 이사 와 보비에게 받은 수많은 물질적, 행위적 대상을 헤아려 봤다. 도마뱀을 닮은 얼굴로 우쭐거리던 보비, 학급에서 같은 조가 되었을 때 레포트에 서준의 이름만 쏙 빼놓은 보비, 성탄절 선물 주고받기 당시 사탕 껍질을 넣어 두었던 보비, 서준의 운동화에 압정을 넣었던 보비…….

‘아, 압정은 보비가 보낸 러브 레터를 받은 알리샤한테 발신인의 정체를 알려 준 게 들통나서였나?’

비명을 지르고 오열하던 알리샤는 다음 날 이사 갔다. 매매 표지판이 박힌 알리샤의 집을 바라보며 서준과 보비는 사이좋게 경악했다. 서준은 영화의 제약에서 자유로운 단역 중의 단역이 어찌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아무튼, 보비를 위해 총을 들고 가스마스크와 대면하느니 수상쩍은 큐브를 맞추는 편이 나았다. 서준이 심술궂은 생각을 무럭무럭 키워 나갈 무렵 요한이 크리스티나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다.

“크리스티나. 보비가 가스마스크에게 살해당하는 걸 내버려 두어야 하는 게 마음이 아프다는 것, 이해해.”

그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또는 침중했다. 적어도 귀로 듣기에는 그런 편이었다.

“그래도 우리가 여기에서 미적거리느니 빨리 탈출해서 도움을 요청하는 편이 좋을 거야. 혹시 알아? 보비가 그때까지 살아 있을지.”

그때쯤이면 보비는 대단히 높은 확률로 사람에서 하몽으로 종류가 바뀌었으리라. 그러나 요한의 조리 있는 설명에 일행은 설득된 듯 은근한 눈빛이 오갔다.

서준 역시 크리스티나와 동행한다면 우선 하몽 캠프장을 빠져나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홀로 도망치는 게 아닌 파이널 걸의 일행에 끼어 나간다면 제법 안전하지 않을까?

심지어 가장 보비의 생명을 걱정하던 크리스티나 또한 요한의 말이 타당하다고 여겼는지 선선히 수긍했다.

“그래….”

그때 골든이 불쑥 입을 열었다.

“바깥하고 연락하는 게 중요하다고? 그러면 여기 3층에 전화기가 있을 텐데.”

서준은 골든과 코가 부딪힐 정도로 가깝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총기 따위는 흔적도 없었으며 빳빳한 양쪽 볼에는 심술보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럼에도 거짓을 말하는 특유의 머뭇거림은 보이지 않았다.

“뭐, 뭘 그런 눈으로 쳐다봐!”

골든은 서준의 가슴팍을 거칠게 밀고는 붉은 얼굴로 버럭 성을 냈다. 갑작스러운 주목에 당황한 것인지, 그는 목에 핏대를 세우고 씨근덕거렸다.

‘이 자식, 이번에는 썩은 나무토막 들고 전화기라고 우기는 거 아니야?’

서준은 의심스러워 그를 흘겨보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골든은 오직 진실을 말했다.

구 합숙소 3층, 한쪽 다리가 기울어진 탁자 위. 먼지가 뽀얗게 쌓인 전화기가 있었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 불길한 소리를 내는 계단을 걸어 올라와 전화기를 본 에어리가 입을 벌렸다.

“미, 미친 거 아니야? 왜 이걸 지금 말해?”

그녀는 눈이 화등잔만 해져 허리의 부상도 잊은 듯 골든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여자와 아이, 노인은 물론 온갖 나이와 성별을 가리지 않고 패악을 부리는 골든은 신경질적으로 에어리의 팔을 쳐 냈다. 만약 윌리엄이 있었다면 크게 화를 냈을 정도로 모진 손길이었다. 하지만 그는 군인을 감시 중이었으므로 에어리를 받쳐 준 사람은 크리스티나였다.

“물어보지도 않은 걸 내가 꼬박꼬박 가져다 바쳐야 하나?”

“넌 사람이 눈치가 없니, 인성이 없니? 인제 보니 둘 다 없지만.”

에어리와 골든이 신경전을 벌이는 틈을 타 서준은 구 합숙소의 3층을 둘러보았다. 의외로 잡다한 물품이 많았다. 한쪽 문짝이 떨어져 나간 옷장이라든가, 그 속에 있는 다 삭아 빠진 천 꾸러미라든가, 도대체 있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짚더미라든가….

차라리 바닥에 굴러다니는 맥주 캔이며 흰 가루가 조금 묻어난 비닐봉지 따위는 정체가 확실했다. 서준이 혀를 끌끌 차고 있자 요한이 서준의 팔을 슬며시 잡아당겼다.

“준아, 건드리지 마. 공기 중에 떠다니는 마약을 흡입하면 어떡해.”

그는 스스로 입 밖에 꺼낸 말이 두렵다는 듯 어깨를 움츠리더니 서준을 껴안았다.

“가까이하기도 무섭다. 그지?”

“으응….”

서준은 묵직한 무게감을 느끼며 요한의 두꺼운 팔뚝을 툭 두드렸다. 어쩐지 친근함이 느껴졌다. 그가 미묘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사이 또 에어리의 비명이 들렸다.

“이, 이 쌍안경! 이걸로 사람을 훔쳐봤단 말이야?”

서준은 에어리가 이를 빠드득빠드득 가는 소리를 들었다. 지금쯤 브래스가 죽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살아 있어도 그의 남은 수명이 썩 길어 보이지는 않았다.

전화기를 발견한 일행은 하나같이 부산스럽게 굴었다. 그러나 이 모든 잡다한 행동은 크리스티나의 말 한마디로 깨끗하게 정리되었다.

“얘들아.”

크리스티나는 한 손에 다이얼 전화기를 들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끝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리고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기쁨과 혼란이 한데 어우러져 퍼져 나갔다.

“이 전화 연결이 돼.”

울먹이는 목소리 뒤로 짧은 정적이 잇따랐다. 심지어 전화기가 있다고 알려 주었던 골든까지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곧 열렬한 환호성이 울렸다. 시작은 에어리였다.

“아악! 지저스! 난 믿었어요!”

그녀는 양손을 꼭 모아 쥐고 흔들었다. 가만두었다가는 춤이라도 출 기세였다. 크리스티나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전화선이 연결되어 있어서, 아니, 그래도 끊겼을 수도 있었는데, 어, 어디에 전화하지? 집, 이 아니라. 그래, 긴급 신고….”

코를 훌쩍거리는 그녀는 긴장이 풀린 듯 몸을 벽에 기대더니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서준은 그저 힐난의 눈빛으로 골든을 응시했다. 한심스럽다는 뜻이 잘 전해졌는지 그는 입술을 깨물더니 짜증을 부렸다.

“왜 그딴 눈으로 사람을 꼬나봐? 브래스가 내 미간에 볼트를 쏘게 생겼는데 내가 여유롭게 들어와서 전화를 걸까, 응?”

평소에 얻어맞거나 욕을 배부르도록 들어서인지 입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 가능한 한 참신하게 욕설이 아니되 그만큼 기분 나쁜 말이 하고 싶어 말을 고르고 있자니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급히 서준을 휘감는 팔이 있었다. 요한이었다.

마른 몸뚱이는 속수무책으로 감겨들었다. 서준은 놀라 그를 떼어 내려고 했지만 귀에 닿는 축축한 음성에 팔이 멈추었다.

“정말, 다행이다.”

목소리에 열기가 있다면 이렇지 않을까.

두툼한 가슴팍에 껴안긴 탓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서준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거세게 뛰는 심장 소리만큼은 더할 나위 없이 잘 들렸다. 쿵, 쿵, 쿵…. 요한은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다행이야, 준아. 정말 다행이야.”

서준은 머뭇거리던 손가락을 구부려 요한의 등을 껴안았다.

“그래. 다행이야.”

살아남을 가능성이 올라갔다. 축하할 일이었다.

“얘들아, 나 전화 걸게!”

크리스티나가 단호하게 내뱉는 선고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한참을 더 포옹했을 것이다. 서준은 그녀의 말이 들리기 무섭게 요한을 밀고 그와 손을 잡았다. 순식간에 서준에게 떠밀렸던 요한은 그 잠깐 사이에 서운한 표정을 짓다가 활짝 웃었다.

그를 이끌고 크리스티나의 곁으로 다가가자 에어리가 걱정스럽게 입을 열었다.

“티나, 이 전화기 쓰는 방법 알겠어?”

“응. 우리 할머니 집 가면 아직 이런 거 쓰시거든.”

크리스티나의 손가락이 능숙하게 다이얼을 돌렸다. 서준은 신기하게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도 다이얼 전화기를 사용할 줄이야 알지만 상당히 신세대에 가까운 크리스티나가 사용하는 방법을 안다니 신기했다.

뚜우… 뚜우… 뚜우….

신호음이 울릴수록 서서히 얼굴에 긴장이 서렸다. 그리고 마침내 달칵,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 네. 911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평범한 말 한마디에 불과했으나 서준의 심장을 조이기에 충분했다. 모두 바짝 굳어 크리스티나를 보았다. 전화기를 든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나 크리스티나는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저, 저기. 여기는 하몽 캠프장이에요. 톰팃톳, 하몽 캠프장이요. 여기 이상한 사람이 저희 친구를 흉기로 위협하고 잡아갔어요. 그리고 이상한 짐승도 있어요. 저와 다른 친구들은 숨어 있는데 언제 들킬지 몰라요. 빨리, 빨리 도와주세요.”

- 네. 알겠습니다. 진정하시고 정확한 위치를 말씀해 주시겠어요?

높은 목소리였다. 언뜻 듣기에는 여자 같았으나 의외로 남자일지도 몰랐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평탄했다.

“여기, 여기는 그러니까 하몽 캠프장이요. 톰팃톳에 레드 레이크가 있는 캠프장이요.”

- 선생님의 정확한 위치를 알려 주세요.

“아, 여기요. 여기, 여기는 어디지?”

크리스티나가 허둥거리자 에어리가 그녀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

“티나, 여기는 구 합숙소야. 그러니까 하몽 캠프장에서 가장 높은 3층짜리 건물.”

“아, 맞아. 그렇지. 여기는 하몽 캠프장 구 합숙소예요. 가장 높은 3층짜리 건물인데 아마 오시면 바로 알 거예요.”

이제 끝났다. 위치까지 전한 크리스티나의 얼굴에 희미한 안도가 퍼졌다.

- 아, 거기구나.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더욱 오래도록 이어졌을 감정이었다.

- 거기였구나! 한참 찾았어. 지금 당장 갈게, 기다려.

끽, 끽, 끼익 긁는 소리가 났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정도로 높았던 목소리가 급격히 낮아졌다. 그러고는 뚝, 일방적으로 끊겼다.

뚜우… 뚜우… 뚜우….

적막한 방에 오직 전화기 연결음만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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