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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29)화 (29/156)

#029

다만 서준은 마냥 희망을 부풀리지 못했다. 편의점에 전화기 정도야 당연히 있었다. 문제는 그것이 무선 전화기가 아니라 유선 전화기였으며, 당연하지만 무선이어도 이 거리에서는 연결될 리 없다는 사실이었다. 서준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골든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길쭉한 물체를 보았다.

하지만 서준은 알지 못했다. 골든은 그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그가 당당하게 꺼내 든 것은 개별 포장이 된 바나나였다. 편의점 내부가 아닌 외부 판매대에 전시된 상품이었다. 싸늘한 정적이 구 합숙소 내부에 가득히 내려앉았다.

“…….”

심지어 크리스티나까지 몹시 경멸하는 눈빛으로 골든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며 지금까지 그가 했던 이야기 전체의 신빙성을 찬찬히 되짚었다. 겨우 몸을 운신한 윌리엄이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골든, 네 눈에는 그게 전화기로 보여?”

“어? 어어…. 이럴 리가 없는데.”

골든은 대단히 당황하며 자신의 주머니를 탈탈 털었다. 그러나 바나나를 꺼낸 뒤 나오는 것이라고는 먼지가 전부였다. 그 꼴을 눈에 새기며 서준은 굳게 다짐했다.

‘마약 빠는 자식과는 상종을 말아야지.’

두 번 다시 약쟁이를 상대로 희망 운운하지 않으리라. 결단코!

군인의 숨넘어가는 소리만 드문드문 들리는 구 합숙소에서 주위의 시선이 각박하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골든의 눈매가 괴악하게 올라갔다. 그는 바나나를 바닥에 내팽개치며 짜증을 부렸다.

“그 가스마스크란 건 뭐야? 애초에 난 너희랑 마주칠 줄도 몰랐다고. 그리고 대체 저 미치광이는 누구야?”

그의 궁금증은 사실 타당했다. 골든은 정체불명의 괴물에게 친구를 잃었을 뿐 연쇄 살인마와 맞닥뜨린 적은 없는 것이다.

서준은 막막해졌다. 괴물과 군인, 연쇄 살인마와 납치당한 브래스와 보비. 대체 약이 덜 깬 골든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무엇 하나 쉽지 않았다. 그의 심정을 대변하듯 에어리가 중얼거렸다.

“미치겠네. 우리 이제 어떡하니? 우리도 그 괴물을 본 게 아니었으면 이 자식들이 마약 하느라 헛걸 봤다고 생각했을 텐데!”

에어리가 초조하게 손톱을 깨물었다. 그녀가 초조하게 떠는 사이 크리스티나가 골든에게 차분히 사정을 늘어놓았다.

“골든, 잘 들어. 여기에는 네가 말한 괴물과 더불어 방독면을 쓰고 다니는 이상한 사람이 있어. 우리도 아직 못 봤지만 요한과 서준이 목격했고…. 보비가 잡혀갔어. 브래스가 사용했다는 석궁을 가스마스크가 사용했다는 걸 보면 아마 브래스도 잡혀갔을 거야.”

“가스마스크?”

골든이 입술 끝을 기묘하게 비틀었다. 그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심각한 낯짝이었다. 골든이 기대했던 못된 장난을 고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헛웃음을 내뱉으며 콧등을 찌푸렸다.

“지금 그걸 믿으라는 거야, 크리스티나 툴박스?”

골든의 공격적인 목소리에 대답한 건 서준이었다. 그는 여전히 피로가 가시지 않아 메마른 목구멍을 쥐어짰다.

“우리도 네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귀담아들었잖아.”

골든의 눈 밑의 살이 씰룩거렸다. 서준은 소중한 크리스티나의 정신을 고작 지나가는 약쟁이가 흠집 내는 걸 원하지 않았다. 평소 그를 모욕하고 때리는 건 넘어갈 수 있었다. 시골 양아치에 불과한 골든의 성미는 살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지금 이곳은 하몽 캠프장이었다. 온갖 비인도적, 비인간적 생명이 추악하게 꿈틀거리는 장소였다. 결코 크리스티나가 완전한 절망에 빠져서는 안 될 곳이었다. 그 순간 여기 있는 생명은 전부 비참하게 사라질 것이므로.

서준은 목에 단단히 힘을 주고 말을 이었다.

“허여멀건 괴물 촉수가 사람을 빨아 먹고, 그 괴물 촉수를 하몽 캠프장에 떨어뜨린 군인이 있는데 아무렴 연쇄 살인마를 못 믿을 건 또 뭐야?”

그때 골든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는 단번에 서준의 앞으로 다가오려 했다. 요한이 막아서지 않았다면 성공했을 것이다.

“치워, 요한.”

“너처럼 폭력적이고 혈관이 깨끗하지 않은 마약 중독자는 위험해.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골든.”

골든은 요한을 밀치려 했으나 자신보다 힘이 센 그를 쉬이 넘어가지 못했다. 대신 골든은 씨근덕거리며 서준을 향해 삿대질했다.

“내가 못 믿는 건 너야, 점쟁아! 너 같은 거짓말쟁이를 어떻게 믿겠어?”

“거짓말쟁이?”

서준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골든을 보았다. 의외로 그는 당당한 태도로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그러고는 물어보지도 않은 사연을 털어놓았다.

“네가 내 자전거가 묻힌 장소를 정육점 앞마당 여섯 번째 개암나무 아래라고 했었지. 나는 멍청하고, 순진하고, 선량하게 그 말을 믿었었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거길 파 봤지. 그리고, 젠장. 그때 브렌에게 얻어맞은 데가 아직도 흉터로 남았어!”

“아, 그게 내 탓이다?”

“그래. 난 덕분에 거짓말을 아주 싫어하게 됐다고.”

“…….”

서준은 거름망 없이 환시를 주절거리던 과거를 떠올렸다. 비단 브렌의 주먹질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몇 번을 생각해도 골든이 자신을 괴롭힌 기나긴 역사의 첫 시발점이 고작 자전거라니 기가 막혔다. 게다가 그의 예지는 이해하기가 어려울망정 틀리지는 않았다. 서준은 말끔하게 결론지었다.

‘네가 엉뚱한 곳에 삽질을 했던 거겠지.’

서준은 짜증과 분노를 지그시 억눌렀다. 보비가 사라진 이상 골든의 몸뚱이라도 있는 편이 나았다. 속으로 혼자 마무리를 지은 그는 뻔뻔하게 대꾸했다.

“대체 몇 년 전 자전거야? 네가 자전거 타고 다니던 시절이면 지금쯤이면 안장도 다 삭아서 떨어졌겠지. 그만 잊고 현실을 봐. 여기서 어떻게 탈출할지를 고민하라고.”

그때 요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준아, 뭘 고민하는 거야? 골든이 왔던 길로 나가면 되잖아. 좀 불편하기야 하겠지만 편의점으로만 가도 멀쩡한 전화기가 있을 테니 거기서 신고라도 하면 되겠지.”

“진심이야, 요한?”

서준은 크리스티나의 혈색이 이미 충분히 사라졌다고 여겼었다. 하지만 요한의 말을 들은 뒤 그녀의 낯은 더더욱 새하얗게 변해 마치 밀랍 인형처럼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크리스티나가 두 눈을 축축하게 적시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보비는 어떡해? 브래스는 둘째 치고, 우리가 도망친 사이 보비가 죽어 버리면….”

“어? 아, 보비. 아아, 그렇구나. 보비.”

요한은 크리스티나가 언급한 이름에 눈을 깜빡거렸다. 마치 그를 잠시 잊기라도 한 듯 어색한 태도였다. 그러나 요한은 금세 다정하고 어른스러운 목소리로 크리스티나를 달랬다.

“크리스티나, 잘 생각해 봐. 우리가 어떻게 괴물이 돌아다니는 캠프장에서 연쇄 살인마와 겨루겠어. 아무리 사람 수가 많아도 그렇지. 우리의 몰골을 봐. 하나같이 엉망이라고.”

괴물의 촉수를 자르고 가스마스크를 한순간이나마 제압했으며, 망설임 없이 군인의 옆구리를 찔러 버린 놈이 할 말은 아니었다.

서준이 요한의 멀끔한 얼굴을 흘겨보는 사이 그는 길쭉한 손가락을 들어 구 합숙소의 사람을 한 명 한 명 가리켰다.

하몽 캠프장에 도착했을 때부터 상처투성이이던 서준이며 괴물에게 당해 허리와 무릎을 다친 에어리, 군인에게 심하게 폭행당한 윌리엄, 뇌가 제정신인지 의심 가는 골든…. 구태여 그들을 살필 필요도 없이 크리스티나 자신도 피로가 누적되어 몸이 무거웠다.

기실 이곳에 보비를 위해 생명을 걸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을 자각하자 곧 떨떠름한 정적이 지나갔다.

확실히 현실적으로 따졌을 때 그들이 보비를 구하기 위해 하몽 캠프장을 돌아다니는 건 위험했다. 그러나 이대로 도망쳐도 괜찮은 걸까?

그녀는 스스로 강인한 사람이라 자부하지 않았다. 가느다란 팔과 다리는 싸움을 해 본 적이 없었으며 달변가라 자청하기에도 부족했다. 연쇄 살인마로 추정되는 가스마스크나 언어조차 통하지 않는 괴물을 언변으로 설득할 수 없었다. 크리스티나가 목소리로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할머니에게 배워 제법 선명하게 비명을 지르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비명이 대체 무슨 도움이 될까?

“으윽….”

그때 군인이 신음을 냈다. 앓는 소리에는 고통이 배어 있었다. 잠시나마 요한의 말에 혹했던 크리스티나가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지독한 꼴로 바르작거리는 군인을 내려다보았다. 군인은 눈을 뜬 것인지, 감은 것인지조차 헷갈렸고 손과 발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아 축 늘어져 있었다. 크리스티나가 그를 본 것은 군인의 처지를 동정하거나 불쌍히 여겨서가 아니었다. 그에게서 빼앗은 물건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크리스티나는 군인과 멀찍이 떨어뜨린 총을 가리켰다.

“요한, 그래도 우리한테는 이제 총이 있잖아. 가스마스크가 철인도 아니고 사람이라면 총을 두려워하지 않을 리 없어.”

“흠.”

요한이 크리스티나의 고운 손가락이 지목한 총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는 큰 보폭으로 걸어가 대수롭지 않은 손길로 총을 주워 들었다.

“요한 젠틸, 그거 진짜야? 죽여주는데….”

골든이 흥분한 듯, 다소 빠르게 말했다. 요한은 그저 어깨를 으쓱거리며 다시 돌아왔다.

에어리가 그것을 보며 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녀가 한쪽 발로 바닥을 세게 치자 나무판자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불쾌하게 울렸다.

“너무 좋아하지 마. 그것 때문에 빌리가 다쳤다고.”

에어리는 윌리엄을 다치게 한 총이 거북스러운 듯 요한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반면 크리스티나는 요한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이 정도면 아주 승산이 없는 건 아니야. 그렇지? 적어도 위협 정도는 되지 않을까?”

요한이 총과 크리스티나를 번갈아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크리스티나는 보비를 찾아다니다가 가스마스크와 마주치면 쏴 버리자, 이런 뜻이지?”

“그, 그럴 리가! 시작부터 싸우자는 건 아니야. 그쪽도 석궁이며 우리가 모르는 무기가 또 있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보비를 데려오거나, 아니면 협상이라도 하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

크리스티나가 머뭇거리며 총신을 건드렸다. 차가운 감촉에 그녀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한 발자국 떨어져 있던 서준은 그녀의 다정한 마음씨에 안구가 다 축축해졌다. 가스마스크와 괴생명체 X를 처리할 장본인이 이토록 의욕 넘치다니…. 감동을 자아내는 광경이었다.

막상 크리스티나는 직접적으로 싸움을 종용하기보다 어디까지나 친구를 챙겨서 도망가자고 말하는 중이었지만 서준의 고막은 제가 원하는 것만 듣자고 결심한 지 오래였다.

그가 상황을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사이 요한의 눈썹 끝이 내려갔다. 그가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여기서 총 사용할 줄 아는 사람?”

“…….”

“…….”

“…….”

침묵이 가득한 곳에서 서준만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그는 과거 병역의 의무를 마친 군필자였다. 요한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것 봐. 아무도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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