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
6. 황금 비율
‘아니, 아까 한 번 있었지.’
무시하기에는 워낙 큰 구명이었다. 비록 골든이야 뭍으로 나온 생선처럼 펄떡거리기만 했으나 총 든 군인 앞에서 그러기도 쉽지 않았다. 서준의 이마에 깊이 팬 골이 슬금슬금 판판해졌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물씬 피어올라 속을 들쑤셨지만 그는 빠르게 정신 사나운 감정을 심장, 혹은 뇌 어딘가의 안쪽으로 잘 구겨 넣었다.
서준은 인내할 수 있었다. 오로지 생존을 위하여 평생을 참아 왔다. 단 한 번이라도 더 호흡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더한 짓도 가능했다. 그는 죽음과 친밀하게 걷고픈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단 일 분이라도 더 눈을 깜빡이는 대가가 고작해야 금·은·동 트리오의 머리가 하는 이야기를 들을 뿐이라면 이 얼마나 가벼운가.
따끔한 입가를 손등으로 문질렀다. 옆에서 타인의 시선이 느껴졌으나 구태여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구 합숙소 안은 어두웠다. 하나밖에 없는 랜턴의 불빛이 1층 전경을 전부 비추기란 불가능했고, 덕분에 그들은 서로 둥글게 모여 서 있었다. 윌리엄은 에어리와 서로 어깨동무하고 크리스티나는 불안한 듯 연신 묶인 군인을 눈짓했다. 요한은 서준의 오른쪽에 있었다. 그는 발화자를 향해 시선을 두지 않았다.
전지를 원동력으로 삼는 주홍색 불빛이 어스름하게 흔들렸다. 마치 21세기가 오기 이전의 물건 같은 생김새다. 하지만 바닥에 놓인 랜턴은 겉을 그럴싸하게 만들었을 뿐, 실상은 무척 현대적인 구조로 속을 채웠으리라.
인공적인 빛은 골든의 턱과 왼쪽 뺨, 눈꺼풀을 비추었다. 평소라면 오랫동안 볼 일이 없는 각도의 그림자는 기이한 섬뜩함을 낳았다. 쓸려 핏방울이 작게 뭉친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서준의 방해로 부자연스럽게 끊겼던 문장이 다시금 이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이곳에 들어왔어….
***
구 합숙소는 낡고 지저분한 건물이었다. 브래스는 손을 대기도 싫은지 발로 문을 쳤다. 녹슨 경첩이 힘겨운 소리를 내며 내부가 드러났다. 리처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신경질적인 손짓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브래스는 그 꼴을 보며 낄낄 웃었다. 골든 역시 그들의 뒤를 따라 발을 옮겼다.
구 합숙소는 내부, 외부 할 것 없이 아주 엉망이었다. 건물 앞에 있는 불길한 색의 늪지에서는 어쩐지 썩은 내가 풍겼다.
“골든! 왜 안 들어오고 거기서 청승 떨고 있어?”
골든이 선뜻 문턱을 넘어오지 못하자 브래스가 리처드를 밀치고 걸어왔다. 그는 얼른 친구들과 마약을 하고 크리스티나와 에어리를 훔쳐보고 싶은지 조급한 심정이 표정에 다 드러났다. 골든은 씰룩거리는 브래스의 입꼬리를 응시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 안 들키는 거 맞아? 우리 빌어먹을 아버지께서는 한 번만 더 걸리면 내 모가지를 썰어 버리겠다고 엄포를 늘어놓으셨다고. 젠장, 집을 나가든가 해야지. 그놈의 톱질 소리도 듣기 지겨워 죽겠어. 가구점에서 사면 될 것이지 왜 허구한 날 의자를 만든다, 탁자를 만든다 난리인지.”
“오, 골든. 너희 집과는 달리 관리를 대충 하니까 우리가 이렇게 들어온 것 아니겠어?”
브래스는 경박하게 몸을 들썩이더니 골든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여기 관리인이 아주 굼뜨고 멍청해. 얼굴에 곰보 자국이 있는 놈인데, 뻔하지. 평생 제대로 된 일은 못할걸? 기껏해야 이런 변두리에서 썩어 갈 인간이 뭘 알겠어. 걸려도 세게 나가면 그만이야.”
퉤, 브래스는 메마른 땅에 침을 뱉었다. 그는 제 가래 섞인 끈적한 침을 유독 비죽하게 솟은 돌덩이에 신발 뒤꿈치로 비볐다.
“얼른 들어가서 재미나 보자고. 내가 저번에 와 봤는데 여기 별 이상한 게 다 있어. 글쎄, 석궁이 다 있더라니까?”
“…….”
골든은 브래스의 호주머니를 곁눈질했다. 입에 침이 고이고 사타구니가 저릿해졌다. 정신이 혼몽해지면 늘 떠올리는 희고 가느다란 목이 기억 속에서 돋아났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덮은 목덜미는 살이 거의 없어 뼈가 도드라지곤 했다.
목울대가 느릿하게 움직였고 그는 불길한 기분을 무시했다. 자릿한 쾌감이 아랫배에서 서서히 뭉쳤다. 막연한 감각에 비하면 훨씬 거센 자극이 발을 이끌었다.
황홀한 시간이 지났다. 날이 어둑해지자 브래스가 쌍안경을 아래로 내렸다. 그는 구 합숙소 3층 창가에서 호수 쪽을 구경 중이었다. 눈가에 자국을 남길 정도로 쌍안경을 꾹 누른 브래스가 중얼중얼 혼잣말해 댔다.
“아, 에어리, 더 벗어. 젠장, 화끈하게 벗으라고!”
높이 떴던 태양은 서서히 지평선 너머로 가라앉아 짙은 석양이 너른 숲을 색칠했다. 붉게 물드는 호수와 드넓게 펼쳐진 삼림이 변화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으나 감상자의 수준이 대단히 미비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브래스는 약에 취한 와중에도 본래의 목적을 잊지 않았다. 그는 미리 챙겨 온 쌍안경으로 호숫가에서 놀던 크리스티나와 에어리를 훔쳐보았다.
다행스럽게도 더러운 시선이 그들에게 닿은 시간은 무척 짧았다. 한창 호수에서 수영할 때 금·은·동 트리오는 약에 취해 있었으며, 그나마 정신을 차려 쌍안경을 집어 들었을 때 그들은 이미 물가에서 나와 바비큐 준비에 열중했다.
덕분에 브래스가 가장 많이 본 광경은 에어리와 크리스티나가 볼이 불룩해지도록 고기를 씹는 모습이 전부였다. 하지만 브래스는 포기하지 않고 삐걱거리는 창가에서 몸을 더 내밀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불안한 자세에 보다 못한 리처드가 마시던 맥주 캔을 던졌다. 깡, 하며 브래스의 뒤통수에서 맑은 소리가 울렸다.
“뭐야!”
“작작 하고 술이나 마셔. 아니면 약을 하든가….”
리처드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더니 새로운 맥주 캔을 땄다. 뚜껑을 열기 무섭게 흰 거품이 치솟았지만, 리처드는 히죽 웃으며 손가락에 묻은 가루와 맥주 거품을 같이 핥았다.
브래스는 제 뒤통수를 문지르고는 빈 깡통을 창 바깥으로 던졌다. 풀숲에 떨어졌는지 변변찮은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바지를 추스르는 골든의 옆으로 기어 왔다.
“이봐, 친구들.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너희에게도 좋고, 나에게도 좋은 일이지.”
“대체 말 한 번 하는데 ‘좋다’가 몇 번이나 들어가는 거야?”
골든은 브래스의 옆구리를 치며 성질을 부렸다. 하지만 브래스는 오히려 만족스러운 듯 입을 크게 벌려 웃더니 귓가에 속살거렸다.
“왜 이래, 골든! 나도 다 안다고. 너 아까 여기 나가서 여자애들 구경했잖아? 그러니까 아랫도리가 이 모양 이 꼴이 났겠지.”
“치워.”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골든이 브래스를 밀쳤다. 브래스는 아주 단단히 착각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는 오해를 풀 생각도 없었다.
“우리, 저 운 좋고 멍청한 놈들에게 무서운 맛을 보여 주자고. 응?”
브래스는 석궁을 들고 흔들었다. 제 것도 아니면서 손길이 제법 능숙했다. 빈 캔을 뒤집어 탈탈 털고 있던 리처드가 흐물흐물한 몸짓으로 다가왔다.
“뭐야? 그거 가지고 뭘 하려고?”
“뭘 하긴? 멍청한 치와와 같은 보비 엉덩이에 한 발 쏴 주고 뇌까지 근육으로 꽉 차 있을 윌리엄에게도 한 발 쏴 주고. 아, 그래. 꼴 보기 싫은 요한 면상에도 날려야지!”
브래스가 낄낄거리며 석궁을 쏘는 시늉을 했다. 그 꼴을 지켜보던 골든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정말 쏘는 건 못 하겠지만 놀라게 하는 정도야 가능하리라. 약과 술에 취한 세 남자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골든은 먼지투성이 계단을 밟고 내려오면서도 연신 키득거렸다.
그들은 셋 다 비슷한 수준의 인성의 소유자였으며, 불법적인 약물까지 취한 뇌는 평소보다 더욱 성능이 떨어졌다. 그래서일까? 그들은 비상식적인 존재를 목격하고도 눈만 껌뻑거렸다.
“어, 뭐야. 저거 뭐야.”
구 합숙소의 정문을 밀고 나오자 보인 것은 늪지에서 몸을 꿀렁거리는 허연 덩어리였다.
“내가 술에 취했나?”
리처드가 망연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안구는 충실히 기능을 다하는 중이었다. 덩어리가 출렁, 몸을 흔들었다. 가장 먼저 소리를 지른 것은 브래스였다.
“오, 하몽 캠프장이라고 괴생명체 X 체험의 현장, 뭐 그런 거야?”
하지만 그것은 경악이나 공포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허파에 바람이 들렸는지 한바탕 웃어 젖히며 리처드의 등을 세게 두드렸다. 얼결에 맞은 리처드가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휘청거리던 그는 곧 발이 꼬여 철퍼덕 엎어졌다.
늪에 숨어 있던 하얀 촉수가 리처드를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것은 일견 정중한 느낌까지 들었다.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생김새와 달리 위협적이지 않은 태도에 금·은·동 트리오는 누구 하나 위기감을 가지지 않았다.
약에서 덜 깬 리처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부드럽게 제 허리를 감는 촉수의 표면을 만졌다. 매끈하고, 축축했다. 늪의 비린내가 났다.
“이거 사진 찍어! 얼른!”
리처드가 얼굴을 붉게 상기시키고는 외쳤다. 브래스가 휴대 전화를 꺼내겠다며 대답했다. 환락에 취한 뇌는 여전히 게을리 굴었다. 아마 이유를 따지자면 그럴 것이다. 골든이 어눌하게 꼬인 혀를 겨우 풀고 느릿느릿 말했다.
“리처드, 잠깐. 그거….”
골든은 허연 덩어리를 가리켰다. 어느새 촉수는 리처드의 허리를 감싼 것 외에도 하나 더 나와 있었다. 새로운 촉수에는 문어의 빨판과 비슷한 것이 여러 개 달려 수축과 이완을 반복 중이었다.
둥그런 빨판이 움직일 때마다 옅은 바람이 불어 리처드의 머리카락이 흔들거렸다. 골든은 문득 생각했다. 마치 냄새를 맡는 것 같다고….
아마 그 순간이었다. 태업한 뇌와 달리 눈은 정확한 정보를 받아들였다.
“어, 어, 잠깐, 나 도와줘. 나 좀 도와줘!”
점차 거세게 조여 오는 촉수에 리처드가 뒤늦게 기겁했다. 그러나 그의 입이 비명을 토하기도 전에 다른 촉수가 리처드의 입 속으로 파고들었다.
“끄윽!”
그 돌기는 다른 촉수와 비교하자면 굵기가 유독 가늘고 색이 투명했다. 반투명한 촉수 역시 두께가 두꺼운 파이프와 비슷해 입을 강제로 벌리니 리처드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의 두 눈에 공포가 서렸으나 골든도 브래스도 움직일 수 없었다. 땅에 다리가 못 박힌 듯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리처드의 입 속으로 들어간 촉수가 힘차게 꿈틀거렸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리처드는 고통 섞인 울음을 내뱉었으리라. 그러나 골든은 듣지 못했다. 그의 비명도 길디긴 창자도 촉수가 흡입해 버렸으니.
저건 뭘까.
저게 뭐지?
골든은 눈꺼풀을 내리는 것조차 잊은 채 그것을 응시했다. 리처드가 다리를 버둥거렸다. 그의 하반신에서 오줌이 쏟아졌다.
반투명한 촉수가 두 번째로 먹은 것은 허파였다. 핏물이 장기와 함께 촉수의 관을 통해 넘어갔다. 리처드의 다리가 경련했다. 스스로 움직이는 형상이 아니다. 자극 때문에 반사적으로 떨릴 뿐이었다.
촉수가 세 번째로 먹은 것은 이자였다. 리처드의 가슴팍과 아랫배가 홀쭉해졌다. 그의 하반신에서는 이제 피가 터져 나왔다. 지독한 암모니아 냄새는 그보다 더한 피비린내와 섞였다.
전신의 감각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골든은 마치 자신이 물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의 발은 여전히 땅 위에 있었으며, 그랬기에 그것은 골든의 발치로 굴러왔다.
데구루루 굴러온 동그란 물체는 익숙했다. 익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리처드의 안구였다. 골든은 턱을 떨며 고개를 들었다. 돌연 깨달음이 찾아왔다.
장기가 전부 없어진 인체는 저렇게 얇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