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24)화 (24/156)

#024

환호성이라도 지를 듯 감격한 표정이 구겨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요한을 바라보았으나 아무리 찾아도 우울한 대답에 농담하는 기색을 찾기 힘들었다. 크리스티나의 안색이 먹구름이 낀 듯 흐려졌다. 그들 사이로 침통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게다가 요한의 뒤로 군인이 절도 있는 걸음으로 걸어오자 마지막 염원까지 사그라들었다. 크리스티나가 눈썹을 일그러뜨리고 중얼거렸다.

“맙소사, 서준까지….”

“끄윽.”

서준은 크리스티나를 만나 인사라도 하고 싶었지만 목이 졸리는 와중이라 돼지 멱 따는 소리만이 간신히 나왔다.

군인은 횡설수설하는 말솜씨와 달리 대단히 약삭빠르게 굴었다. 그는 서준의 목숨을 위협하며 요한이 스스로 꼬챙이를 버리게끔 했다. 바닥을 구르는 꼬챙이를 군인은 느긋한 손길로 챙겼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그는 서준이나 요한을 바비큐로 만드는 정성을 발휘하지 않았다.

‘대체 크리스티나는 언제 잡아 가둔 거야?’

서준은 느릿하게 돌아가는 머리통을 억지로 회전시켰다. 그는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피 흘리는 호수의 살인마》에 군인이 나온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 적어도 그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장면은 아니었다.

물론 오늘 벌어진 일 중에 서준의 미약한 뇌 주름에 새겨진 광경이 재현된 건 손에 꼽을 정도밖에 없었다. 하지만 군대를 비롯해 군인, 그것도 정신이 나간 군인은 정말이지 낯설고 당황스러웠다. 군인의 행동이 얼마나 민첩한지는 둘째 치고 그의 정신머리에 문제가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혹여 가스마스크와 관련이 있을까 고민도 해 보았으나 군인은 하몽 생산지나 방독면을 쓴 연쇄 살인마에 관해서는 입 한번 벙긋하지 않았다. 오히려….

‘괴물이 던진 시체도 군복을 입었었지. 그리고 이 군인이 말했던 호송 중이던 짐승.’

그건 마치 호수의 식인 괴수를 이르는 말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것이 가당키나 하던가? 브래스의 목격 정보와 군인의 말을 종합하자면 괴물은 군대가 호송 중이었으나 우연히 하몽 캠프장의 호수에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앞뒤가 안 맞잖아. 《피 흘리는 호수의 살인마》에서 괴물은 호수에서 서식했어. 갑자기 웬 군대란 말이야? 지나가던 군대가 식인 괴수를 흘렸다고?’

보비나 좋아할 소리였다. 서준에게는 마치 자신이 샀던 국내산 한우가 사실 미국산 수입 소고기란 뜻으로 들렸다. 그는 군인이 요한에게 스스로 팔을 묶으라고 명령하는 걸 들으며 주변을 살폈다. 우선 머릿속이 시끄러워지는 복잡한 상황을 전부 밀어 두고 생각했다. 그리고 눈치챘다.

승산이 있었다.

하나같이 불리한 정황이었으나 놀랍게도 서준은 가능성을 엿보았다. 우선 군인의 무장이다.

‘제대로 된 무기가 총 말고는 없어.’

하다못해 케이블 타이라도 있었다면 더욱더 효율적이고 간편하게 크리스티나를 비롯한 일행을 구속하는 게 가능했다. 그러나 군인은 번거롭고 결박 기능을 높게 평가할 수 없는 옷가지를 이용했다.

또한 절대적인 우위를 자신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묶을 것이 부족했는지 모르겠으나 다리는 자유롭게 놔두었다. 이는 큰 수확이었다.

군인은 단 한 명뿐이었으나 그들은 정신을 잃은 윌리엄을 제외해도 네 명이었다. 게다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지 우선은 죽이려는 마음도 없는 듯했다. 서준이 입 안쪽에서 혀로 이를 쓸었다. 침을 삼켰다.

총알은 소비되는 물품이다. 장전을 해야 하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 그때만 노릴 수 있다면 승리를 손에 쥐는 것이 가능했다. 피가 뜨겁게 돌기 시작했다. 서준의 얄팍한 가슴 안쪽에서 희망과 자신감이 무럭무럭 차올랐다. 너무 자란 그것이 기어코 갈비뼈에 걸리고 나서야 그는 흥분한 심장을 가라앉혔다.

둘째로는 군인의 신체였다. 그의 육체는 겉보기만 흉이 진 게 아니었다. 드러난 피부에서 흐르고 굳은 진물과 피는 진짜였다. 군인은 고통 따위 모르는 양 굴었으나 서준은 그와 밀착해 있기에 알아차렸다. 통증을 참는 나직한 신음, 불규칙한 숨소리, 움찔 떠는 손…. 확실히 군인의 몸놀림은 뛰어났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부상자였다.

무엇보다 이곳에는 크리스티나가 있었다.

서준은 확신했다. 우주의 신비로운 기운이 그녀를 끝까지 살릴 터이다. 총알은 그녀의 심장과 머리를 비껴가고 피와 살점이 가득한 행운을 크리스티나에게 안배하리라. 비록 그 과정에서 제가 죽어 나자빠질 위험이 있기야 했지만….

단 한 순간의 틈, 서준은 단지 그것만을 강렬히 원했다. 그가 바란다고 온다면 인생이 이토록 고달프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기원했다. 하늘을 향해, 땅을 향해, 지하를 향해, 혹은 저 너머 우주를 향해.

그리고 하늘은, 땅은, 지하는, 혹은 저 너머의 우주는 서준의 소원을 이뤄 주었다.

“아아아아!”

한 사내가 구 합숙소의 문을 거칠게 열고 괴성을 지르며 달려왔다. 수많은 시선이 그를 향했다. 크리스티나와 에어리, 막 정신을 차린 윌리엄, 서준을 결박하던 군인의 눈이 모두 구 합숙소의 사내를 돌아보았다.

황금처럼 빛나는 머리카락이 달빛을 받아 번쩍 빛났다. 골든이었다.

그러나 오로지 요한만은 난데없이 등장한 골든을 보지 않았다. 그는 줄곧 서준만을 응시했다. 요한은 때를 놓치지 않았다. 탕, 바닥을 박차고 육중한 몸뚱이가 군인을 들이받았다. 구 합숙소에서 다시 한번 총성이 울렸다.

요한이 군인을 들이받으며 세 사람이 엉망으로 뒤엉켜 바닥을 굴렀다. 다행히 서준의 얼굴에 새로운 구멍이 생기지는 않았다. 불행한 일을 당한 것은 구 합숙소였다.

오랜 시간 관리받지 않아 삭은 널판때기는 총알을 막을 힘이 부족했다. 퍼석, 하고 꽂힌 그것은 천장 안쪽으로 들어가 작은 구멍을 남겼다. 멋대로 뻗은 팔의 끝에는 여전히 위험한 흉기가 들려 있다. 서준은 망설이지 않고 군인의 손목을 깨물었다.

“아아아악!”

고통스러운 비명이 군인의 목구멍을 긁었다. 서준의 턱이 무는 힘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다. 무의식중에 예상했던 대로 옷에 감싸이지 않은 부분의 피부는 짓무른 흔적이 여실했다.

과연 연약한 살점을 이로 뭉개자 익힌 고기를 씹듯 쉽게 뜯어졌다. 순간 상처에서 흐른 진물과 피, 피부의 조직이 혀의 돌기에 달라붙었다. 서준은 표현하기조차 끔찍한 미각을 애써 외면했다.

“끄윽!”

“요한! 총, 총부터 막아!”

“빌리, 정신 차려! 빌리!”

“으아, 아아아!”

개판이 따로 없었다. 군인의 두 눈이 벌겋게 달아 부풀었으며 묶여 움직이지 못하는 크리스티나와 에어리가 열심히 악을 질렀다. 말 못 하는 서준은 슬슬 노년기의 잇몸이 걱정되었으며 골든은 양팔을 휘저으며 달려왔다. 그의 양 눈동자는 탁한 안개가 낀 듯 혼돈과 혼란이 가득했다. 그야말로 혼세였다.

우득, 서준의 어금니가 기어이 무언가를 물었다. 그것은 근육보다는 뼈에 가까운 질감이었고, 덕분에 입술 양옆이 조금 찢어졌다. 하지만 서준은 제가 낸 피의 냄새를 맡지 못했다. 그의 콧구멍에 제대로 된 기능을 기대하는 것은 제법 가혹한 일이었다.

“아아악!”

기어코 군인의 손에서 총이 떨어졌다. 요한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발로 총을 멀리 찼다. 서준의 머리통과 농밀한 접촉을 했던 쇳덩이는 크리스티나의 발치로 미끄러졌다.

그때 고통으로 흐려졌던 군인의 눈이 짐승처럼 번뜩 빛났다. 요한이 총에 시선을 둔 한순간, 군인의 왼손 엄지가 서준의 오른쪽 안구를 향해 휘둘러졌다. 서준은 뒤늦게 입을 떼고 머리를 뒤로 젖히려 했으나 눅진한 살에 박힌 이가 쉽게 빠지지 않았다. 살과 근육을 한껏 문 입으로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시간이 점차 느리게 느껴졌다….

끝이 깎인 단단한 손톱은 손가락에 간신히 매달렸다. 아, 그렇구나. 마치 뇌우처럼 깨달음이 찾아왔다. 군인은 이미 생과 가까운 존재가 아니었다. 그의 육신은 이미 죽음과 밀접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자였다. 허물어지는 육체를 스스로 느끼며 이성이 마비된 존재였다.

뇌와 이어진 안구를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는 손가락을 코앞에 두고서 엉뚱한 생각이 쳇바퀴처럼 빙글빙글 돌아갔다. 여러 장의 사진을 연속해서 찍듯 손가락이 다가온다…. 활짝 열린 눈꺼풀 사이를 비집고 축축한 각막을 찌르고 터뜨리기 위해!

“…아!”

겨우 입을 벌리고 머리를 들었지만 너무 늦었다. 서준은 눈을 감지도 못하고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끄윽….”

하지만 피거품이 이는 소리와 동시에 그 행동은 불발되었다.

“손, 치워!”

요한이 기어이 군인의 허리춤에서 꼬챙이를 뽑아낸 것이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곧장 꼬챙이를 군인에게 찔러 넣었다. 투둑, 옷감이 뜯어지며 옆구리 가죽과 장기를 꿰고 다시 피부를 뚫고 날카로운 끝이 튀어나왔다. 꼬챙이에는 피와 선분홍색 내장이 조금 묻어 있었다.

흐으…. 바람 빠지는 소리가 군인의 뱃가죽에서 났는지, 아니면 그의 입에서 나왔는지 서준이 파악할 틈도 없었다. 주변에서 우왕좌왕하던 골든이 몸에 꼬챙이를 꽂은 군인의 뒤통수를 냅다 후려갈겼기 때문이다.

군인은 반항하지 못하고 앞으로 엎어졌다.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그는 엎어진 그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미약하게 떨리는 몸을 보아하니 기절한 듯했다.

군인이 정신을 잃은 걸 파악하자 골든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씨근덕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고는 뻣뻣한 걸음으로 서준의 앞으로 다가왔다.

“너, 너! 점쟁이! 안 다쳤어?”

그는 잔뜩 흥분해 서준의 어깨를 잡고 짤짤 흔들었다. 덕분에 기껏 딱지가 앉은 어깨가 벌겋게 물들었다. 골든의 염색약은 값이 쌌는지 그의 땀을 따라 이마를 금색으로 물들였다.

서준은 딱 기절하고픈 심정이었다. 딱 지금만큼은 고꾸라진 군인이 부러웠다. 정신없이 회전하던 머리통을 보다 못한 요한이 나서서 골든을 저지했다. 그는 골든의 손목을 붙잡았다.

“악!”

“골든, 그만해.”

요한이 내던지듯 그를 떠밀었다. 골든의 손목은 처음에는 하얗게 질리더니 피가 통한 이후로는 시퍼런 자국이 남았다. 골든이 화를 낸 건 당연했다. 그는 허수아비처럼 깡마른 서준과 비교해 눈높이는 약간 낮은 편이었으나 복싱이 취미라는 건 틀림없는 사실로 팔뚝과 가슴이 두툼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요한에게 중요한 건 골든의 체격이 아니었다.

“지금 네 말 들을 때가 아니야, 골든.”

그는 서준의 찢어진 입가를 조심스럽게 엄지로 문질렀다. 따끔한 통증에 무심코 얼굴을 찡그리자 요한이 안절부절못했다.

“준아, 아파? 미안해.”

요한은 제 주머니에 연고가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운 듯 과장되게 울상을 지었다. 서준은 여전히 온몸이 아팠지만 어쩐지 그 모습에 긴장이 풀려 비식비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요한의 등 뒤에서 험악하게 얼굴을 찡그린 골든을 보자 점점 입가가 굳었다.

‘잠깐만, 설마 내 평생의 행운을 골든 부르는 데 전부 소비한 건 아니겠지?’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가정을 서둘러 머릿속에서 박박 지웠다. 그때 바닥을 가볍게 차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군인이 괴물 같은 회복력을 발휘했나 싶어 어깨가 쭈뼛 솟아오른 서준이 긴장하며 돌아보자 크리스티나와 에어리가 뚱한 표정으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크리스티나의 발치에는 여전히 총이 굴러다녔다.

“우리 좀 풀어 줘.”

“맞아, 풀어 줘.”

요한은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군인이 어찌나 단단하게 묶었는지 피부에 멍 자국이 검게 들었다.

“으….”

크리스티나가 쓰라린 손목을 주무르는 사이, 에어리가 절뚝거리며 윌리엄에게 걸어갔다. 그녀는 더러운 바닥에 앉아 윌리엄의 몸을 조심스럽게 돌렸다.

군인은 크리스티나 일행을 끌고 오며 이른바 본보기가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저항할 수 없는 윌리엄의 머리를 바닥에 찧었다. 체벌은 윌리엄이 정신을 잃을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는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를 즐거워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성미가 거칠고 폭력에 거침없었다. 그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보던 에어리의 마음은 타는 듯 괴로웠다.

“오, 빌리!”

“음…. 에어리?”

다행히 이마의 피부가 찢어져 피가 났을 뿐, 윌리엄의 상태는 양호했다. 물론 그도 다리에는 총상을 입고 쇄골의 부상도 있었으나 어쨌든 목숨은 건졌지 않은가? 적어도 생사불명인 보비에 비하면 윌리엄은 괜찮은 축이었다. 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윌리엄의 근성을 높이 샀다.

요한은 혼자 머리를 가볍게 움직이는 서준을 보며 슬쩍 이마에 손을 얹었다.

“뭐야? 치워.”

“열은 안 나는데….”

“이 근본적으로 기분 나쁜 기분은 뭐지?”

하지만 입으로는 싫은 듯 말해도 오늘따라 선뜻 만지는 요한의 손에 금방 익숙해진 서준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몸이 자유로워진 일행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이제 그들이 아닌 군인이 묶일 차례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