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22)화 (22/156)

#022

5. 윌리엄의 비명

“한나, 정말 여기가 맞아?”

1964년, 레드 레이크 캠프장 합숙소에 다섯 명의 젊은 청년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지친 상태였다. 특히 한나의 애인 패트릭은 흰색과 초록색 줄무늬가 들어간 셔츠의 목깃을 펄럭거리며 제 겨드랑이를 힐끔거렸다.

그는 더운 땀을 흘리며 높이 뜬 해를 올려다보았다. 양 갈래로 땋은 밀색 머리카락과 동그란 안경, 둥근 밀짚모자를 쓴 한나가 바닥에 쭈그려 앉아 웬 돌덩이를 유심히 살피는 중이었다.

숨을 쉴 때마다 텁텁한 더위가 몰려왔다. 패트릭은 짜증을 삼키며 한나의 발꿈치를 툭 쳤다.

“한나, 벌써 세 번째야. 그만 포기하자. 이왕 온 거 호수에서 수영이나 하는 건 어때?”

“패트릭, 방해하지 마. 한나는 지금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발견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한나의 열렬한 추종자 샘이 패트릭의 어깨를 잡아챘다. 패트릭은 모기를 내쫓듯 샘의 손을 쳐 냈다. 그는 이 볼살이 통통한 친구가 한나를 친하게 부르는 게 썩 마음에 차지 않았다.

사실 캠프장에 와서 이러는 행위 자체가 불만스러웠다. 이왕 캠프장에 온 것, 시원하게 물놀이나 하고 가면 좀 좋은가? 패트릭은 긴 흑발의 수우를 돌아보았다.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수우가 패트릭과 눈이 마주치자 싱그럽게 웃었다. 그녀는 매력적인 여자였다. 붉은 입술은 도톰하고 끝이 약간 휘어진 매부리코조차 수우의 독특한 미모를 돋보이게 만드는 요소에 불과했다.

입 안이 바짝바짝 마르고 목울대가 움직였다. 이 목마름은 날씨 탓이 아니리라. 패트릭은 한나와 사귀고 있었지만, 수우가 유혹한다면 거절할 마음 따윈 없었다.

패트릭의 마음이 닿았던 걸까? 수우가 팔짱을 풀고 다가왔다. 그녀는 메고 있던 가방에서 페트병을 꺼내 흔들었다.

“패트릭, 목말라?”

“음, 그런 것 같아.”

패트릭은 수우의 가방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는 합숙소 안쪽에 제 짐을 모조리 던져두었다. 시간이 남으면 사냥도 하면 좋겠는데. 패트릭은 한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패트릭의 대꾸에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런 것 같은 건 또 뭐야?”

“좀 봐줘. 아침부터 한나 뒤만 따라다녔잖아. 저 이상한 돌을 찾겠다고 말이야.”

이마에 들러붙은 황갈색 머리카락을 섬세하게 떼어 내며 엄살을 부리자 수우가 즐겁게 웃으며 한나를 가리켰다.

“기다려 봐. 한나가 일을 끝내면 나누어 줄게.”

“맙소사!”

물론 수우 또한 한나의 열렬한 지지자라는 점이 문제였다. 샘과 수우는 한나가 도서관에서 발견한 기록을 연구해 진정으로 외계인과 통신할 수 있다 믿었다. 터무니없는 헛소리였다.

패트릭은 속으로 혀를 차며 맑은 연못을 향해 괜히 돌을 차 넣었다. 연못 근처에서 꾸벅꾸벅 조는 캠밸도 얄미웠다.

“내 생각에는, 물론 너희의 생각과는 다르겠지만, 한나가 그 위대한 발견을 하려면 수십 년은 멀었을 게 분명해. 그리고 수우, 그 빌어먹을 음료수로 내 목을 축이는 건 더 어려울 테고!”

패트릭의 우는소리에 수우가 깔깔 웃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뱃가죽을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오, 패트릭. 날 믿어. 이 음료수는 너에게 정말 끝내주는 경험을 선사할 거야.”

수우가 의미심장하게 페트병을 흔들었다. 패트릭은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보니 페트병 속 물은 투명하지 않고 희뿌연 흔적이 있었다.

“아! 알겠어.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알겠어!”

그때 한나가 높은 목소리로 외쳤다. 그녀의 말 곳곳에 환희와 기쁨이 가득했다. 한나가 몸을 일으키자 밝은 노란색 원피스의 치맛자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깅엄 체크 무늬의 원피스는 무릎까지 내려와 한나의 하얀 맨발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발가락 사이로 푸릇한 잔디가 비죽 솟았다.

패트릭은 활짝 웃으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문득 한나의 고향이 떠올랐다. 그녀는 아무것도 신지 않는 발로 포도를 밟는 곳에서 태어났다. 뜨거운 태양 빛 아래에서 부드러운 입술이 벌어졌다. 하얀 이 틈으로 붉은 살덩어리가 꿈틀거렸다.

“보나페티!”

그리고, 현재보다 조금 이른 시간의 하몽 캠프장에서 크리스티나는 달렸다.

“에어리, 조금만 참아.”

“으, 응.”

에어리는 힘겹게 대답했으나 곧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나직한 신음을 내뱉었다. 그녀의 부상은 허여멀건 괴물에게 당했던 배와 허리만이 아니었다. 추락하면서 윌리엄의 도움을 받아 맨바닥에 그대로 떨어지는 꼴은 면했으나 오른쪽 무릎이 크게 부풀었다. 보랏빛으로 변한 부위는 그녀가 혼자서는 제대로 걷지 못하는 데 일조했다.

크리스티나와 함께 에어리를 부축하던 윌리엄의 안색이 좋지 못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그는 에어리의 무릎에 쇄골이 부딪혀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목 아래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지체하는 순간 뒤에서 정체불명의 괴물이 달려들어 압사당할 것만 같은 공포가 등을 떠밀었다.

크리스티나는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에어리의 팔을 더 단단히 잡았다. 그녀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랜턴을 챙기지 못하고 도망친 탓에 주변을 식별할 방도가 없었다.

“우리 제대로 가고 있는 걸까?”

크리스티나는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강렬히 바랐다. 그러잖아도 불안할 친구에게 더한 부담을 얹어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바람과 현실은 달랐다. 매정하도록 시린 밤바람이 크리스티나의 뜨거운 눈두덩이를 스쳤다.

에어리는 온몸 중 그나마 성한 목을 움직여 주위를 살폈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새까만 숲이 전부였다. 에어리는 여전히 깔깔한 목에 침을 몇 번이고 삼키고 나서야 제대로 된 말을 꺼낼 수 있었다.

“빌리, 티나. 나를 두고 먼저 가. 아, 이런 진부한 대사를 하는 날이 오다니! 내가 보비도 아니고 이런 말을 할 줄 누가 알았겠어.”

그녀는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애써 가볍게 덧붙였지만 크리스티나와 윌리엄의 무거운 낯을 바꾸기는 힘들었다. 윌리엄은 에어리의 팔과 손을 꽉 부여잡으며 낮게 속삭였다.

“그런 말 하지 마, 에어리. 난 널 지킬 거야.”

“맞아. 에어리. 어떻게 다친 친구를 두고 갈 수 있겠니? 괜한 소리 하지 마.”

크리스티나가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싸르륵싸르륵 스산하게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묻혔다. 그러나 에어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스스로 똑똑하다 자부하지 않았지만 사리 분별 못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혼자서는 움직이기도 힘든 몸뚱이는 소중한 친구와 연인의 발목을 잡을 뿐이었다.

“아니지, 아니지. 티나. 크리스티나. 이건 괜한 허세가 아니야. 우리는 한시라도 빨리 바깥과 연락을 해야 해. 특히 괴물…. 그래, 괴물만 있으면 또 모르지. 하지만 서준이 한 말을 기억하지? 난 솔직히 그 애가 평소처럼 이상한 말을 한다고 여겼어.”

에어리는 창백하고 무뚝뚝한 얼굴을 기억에서 끄집어냈다. 친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관계였다. 서준은 늘 그들과 거리를 두었으며 어쩌다 대화를 해도 괴상망측한 언사를 끼워 넣었다.

그러나 높은 허공에 떠 흔들릴 때, 온몸이 괴물에게 잡혀 무력하게 나부낄 때,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밤이라서일까? 물가가 근처였기 때문일까? 서준은 고함을 치지 않았으나 그의 피로한 어투는 귀에 똑똑히 들어왔다.

에어리는 크리스티나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목숨을 건져서 그런가? 서준의 말을 경청해야겠다는 마음이 들더라고. 알겠니, 크리스티나? 정말 살인마가 있으면 이곳은 정말로 위험해.”

숲에서 헤매는 판국에 부상자까지 건사하기란 대단히 어려웠다. 에어리는 거대한 나무 고목을 가리켰다. 뻣뻣하게 마른 나무의 살갗과 습한 이끼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저쯤에 나를 두고 가.”

“하지만, 에어리.”

“나를 믿어. 나도 내 목숨을 내던지겠다는 소리는 아니야. 왜, 괴물의 몸뚱이 기억하지? 그만한 덩치라면 이렇게 나무가 빽빽한 숲에 들어오기는 어려울 거야.”

물론 이는 희망 사항이었다. 괴물이 선보인 괴력이라면 이런 나무 정도는 쉽게 뽑아내고 부러뜨리리라. 에어리가 짓궂게 미소 지었다.

“빌리, 다른 사람들을 불러서 나를 도우러 와 줘.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그녀는 피로를 숨기고 거칠게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구태여 떠들썩하게 말했다.

“아, 힘들다. 솔직히 나 지금 정말 피곤하거든! 발도 퉁퉁 붓고 아파서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이겠어.”

“에어리….”

크리스티나가 얼굴을 팔뚝으로 아무렇게나 문질렀다. 하얀 뺨이 벌게지도록 벅벅 문댄 그녀는 곧 얼굴을 홱 치켜들었다. 눈물 자국은 없었다. 크리스티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윌리엄의 등을 세게 쳤다.

“윌리엄, 내가 무슨 말 할지 알지?”

“음.”

윌리엄은 크리스티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에어리의 등과 오금에 팔을 넣어 그녀를 들어 올렸다. 갑작스럽게 몸이 붕 뜬 에어리가 으악 하며 놀랐다. 에어리는 자신의 얼굴 옆에 자리한 쇄골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외쳤다.

“빌리! 다친 주제에 무슨 짓이야! 크리스티나, 빌리 좀 말려 줘!”

“아니. 안 말려.”

“뭐?”

크리스티나는 윌리엄에게 안긴 에어리와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선언했다.

“잘 들어, 에어리. 난 내 친구들을 한 명도 포기하지 않을 거야. 우리는 왔던 그대로, 아니지, 서준을 포함해서 이 거지 같은 캠프장을 벗어날 거야.”

만약 서준이 목격했더라면 과연 여자 주인공이라며 손바닥이 터지도록 손뼉을 쳤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친구 목록에 자신이 포함된다는 사실에 심란해하면서도 어떻게든 크리스티나의 뒤에 꺽다리 같은 몸을 숨기려 추태를 부렸으리라.

하지만 지금 이곳에 그는 없었고 크리스티나와 에어리, 윌리엄은 다시금 발길을 재촉했다.

크리스티나는 꼼꼼히 주변의 풍경을 살폈다. 이곳이 어디인지 가늠할 작은 단서 하나하나가 귀했다. 방향을 알지 못해서야 계속 같은 곳을 맴돌지도 모를 일이었다. 고민하던 크리스티나의 눈이 크게 열렸다.

“그래, 우리 저곳으로 가자.”

윌리엄과 에어리도 그녀가 손을 뻗어 가리킨 장소를 바라보았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비죽 솟아오른 지붕이 보였다. 구 합숙소였다.

비록 과거에 끔찍한 일이 벌어져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 곳이기는 하지만 하몽 캠프장에서 가장 층이 높은 장소이기도 했다. 구 합숙소라면 그럭저럭 주변을 살피기 용이했다. 당장 고를 수 있는 선택지 중 제법 좋은 조건이었다.

“저곳에서 석궁을 쏘아 대는 녀석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높은 확률로 브래스겠지만. 아, 맙소사. 차라리 브래스인 게 나은 지경인 게 어처구니가 없네.”

에어리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크리스티나는 친구의 말을 부정하는 대신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렸다.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말이야.”

“에어리, 정 불안하면 내가 먼저 구 합숙소 안쪽으로 들어갈게.”

윌리엄이 두꺼운 승모근을 꿈틀거리며 목을 돌리자 에어리가 그의 뺨에 손을 얹고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열기를 품은 눈과 마주치자 그녀는 거친 입가를 문지르고는 윌리엄의 턱에 이마를 찧었다.

“무슨 말이야, 빌리. 우린 한 몸이잖아. 혼자 위험한 짓 할 생각 마.”

에어리가 은유적이고도 물질적인 비유를 들자 윌리엄이 대단히 감동한 듯 목을 떨었다.

“에어리….”

“오, 나의 빌리!”

“자, 그럼 움직이자.”

크리스티나는 둘만의 세상으로 빠지려 하는 에어리와 윌리엄을 채근하며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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