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9
경비 초소는 비어 있었다. 더군다나 기름칠한 지 오래되었는지 고된 소리를 뱉는 문은 잠그지도 않아 손잡이를 돌리자 쉽게 열렸다. 가스마스크가 뒤에서 기습하거나 괴물이 촉수를 뻗어 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잔뜩 긴장했던 어깨가 아래로 내려갔다.
서준은 랜턴을 들어 초소 안쪽을 살폈다. 경비 초소는 건물 자체의 크기가 작은 만큼 속도 단출했다.
직사각형 형태의 초소는 방문객에게 대응하는 바깥 부분과 안쪽의 작은 방으로 구간이 나뉘었다. 바깥 부분이라고는 해도 이 부분 역시 초소 내부의 공간이었으나 창문과 문이 있어 한결 트인 느낌을 주었다.
바로 이곳에 전화기가 있었다. 그리고 당연한 듯이 선이 잘려 있었다.
“…….”
서준은 썩은 동아줄을 부여잡고 버튼을 꾹꾹 눌렀다. 아무런 신호도 가지 않았다. 요한은 서준의 어깨를 붙들고 고개를 저었다.
“손 아프잖아. 그만둬. 관리인이 가스마스크라는 증거가 생긴 셈 치자.”
“빌어먹을 가스마스크….”
서준이 이를 갈며 전화기를 내팽개쳤다.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으나 막상 목도하자 속이 쓰렸다. 하지만 짜증은 곧 불안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괴물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가스마스크와 마주치는 바람에 크리스티나와 비교하면 대단히 늦게 출발했다. 그러나 먼저 도착했어야 하는 크리스티나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요한도 그 점이 마음에 걸리는지 전화기 옆에 있는 방명록을 넘기는 중이었다. 랜턴의 낮은 불빛이 그의 턱과 입, 코 아랫부분을 비추었다. 조명만큼이나 어두운 목소리가 경비 초소 안에서 나직하게 울렸다.
“크리스티나가 이곳에 왔었다면 여길 벗어났더라도 흔적을 남겼을 거야. 하지만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어.”
방명록 옆에는 멀쩡한 펜도 놓여 있었지만 요한은 방명록의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원하는 것을 찾지 못했다.
이는 명료하게 한 가지 사실을 가리켰다. 크리스티나는 애초에 경비 초소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맹렬한 후회가 발목을 붙잡았다. 서준은 그나마 멀쩡한 왼손으로 이마를 세게 문질렀다. 경비 초소가 아니라 총성이 난 곳으로 향해야 했던 걸까? 자신은 큰 실수를 해 버린 게 아닌가.
다리가 덜덜 떨렸다. 주인공인 그녀가 아니면 괴물과 가스마스크는 처단되지 않는다. 서준은 이 세계의 확고한 규칙을 알았다.
“빨리, 빨리 크리스티나를 찾아야 해.”
그는 요한의 팔을 끌어당겼다. 쿰쿰한 냄새를 풍기는 짧은 대걸레, 방명록과 펜, 선이 끊긴 전화기가 아무렇게나 바닥으로 떨어져 큰 소리를 냈다.
발치에 어지럽게 쏟아진 물건을 마구 차 내며 광신자가 신에게 매달리듯 요한을 간절히 붙들었다. 요한은 불안하게 떨리는 목소리와 눈동자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준아, 넌 겁이 많아.”
“나는….”
발끈한 서준이 턱을 치켜들고 요한을 보았다. 하지만 그는 제 기분을 아무렇게나 풀어 내듯 분통을 터뜨리는 대신 입을 꾹 다물었다. 요한은 오로지 걱정하는 눈빛으로 서준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에 업신여김이나 비웃음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보비나 금·은·동 트리오에게 숱하게 받아 온 멸시가 아닌 안온한 염려는 너무나 형태가 뚜렷했다. 한 치의 의심조차 용납하지 않는 수심이었다.
서준은 요한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이런 눈으로 자신을 보는가. 그들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다. 약간 안면을 익혔을 뿐, 친구조차 아닌 거리가 요한과 서준의 관계였다. 무관계한 사람이 서준을 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있지, 우리끼리 도망칠까?”
흉통이 크게 부풀어 나온 목소리는 비겁하고 다정했다. 안주하고픈 내용에 서준이 크게 숨을 헐떡였다.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분명히 트럭을 향한 공포를 이겨 냈다. 그러나 단 한 순간도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다.
요한의 제안은 감미롭고도 유혹적이었다. 서준은 짧은 시간 그의 말에 강렬하게 이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준의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팔은 너른 등을 껴안지 않았다.
그는 요한의 품에서 벗어났다. 땀과 체온, 비좁고도 안락한 공간에서 고개를 들자 차가운 밤공기가 피부를 스쳤다. 달빛조차 닿지 않는 땅을 쏘아보던 서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 일은 일어나선 안 돼.”
하몽 캠프장을 벗어난다는 건 일견 달콤하게 들렸다. 하지만 무대용으로 제작된 소품이 극장을 벗어난다는 말은 곧 폐기를 뜻했다. 이지와 맹신이 뒤섞인 눈이 요한을 보았다.
“보비가 나를 미친 사이비 점쟁이라고 말했지. 맞아, 요한. 나는 미치광이야. 불길한 미래를 점치는 예언가야.”
전생을 기억하고 환생을 자신했다. 이것이 정신 이상자가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그가 믿는 미래의 비전은 가끔 머릿속을 파고드는 환시가 아니라 음질 나쁜 흑백의 화면이었다. 주인공 ‘크리스티나’가 높은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는 장면의 클로즈업이었다. 서준은 자신의 예지를 비참하도록 신뢰했다. 그것은 예언이 아닌 확언이었다.
그는 스스로 21세기의 노스트라다무스라 여기지 않는다. 다만 미래의 역사가라 믿을 뿐이다.
이곳, 하몽 캠프장, 바로 오늘, 독립 기념일에 식인 괴수와 연쇄 살인마를 처단하지 않으면 도망쳐 봤자 헛수고였다. 크리스티나의 인지 범위를 벗어나는 순간 갑자기 유성이 떨어져 죽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서준은 버석하게 마른 입술에 침을 묻혔다. 축축한 살덩이가 유독 거슬렸다. 마른 턱이 긴장하듯 떨렸다. 서준은 요한을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들려주듯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크리스티나를 찾아내서 함께 이 고난을 헤쳐 나가야 해. 내가 보았고, 내가 믿을 미래는 오직 그것밖에 없어.”
한계 이상의 체력을 사용한 서준의 목소리는 철판을 긁듯 끔찍했다. 그러나 요한은 음악을 감상하는 태도로 눈을 감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는 자신에게서 벗어난 서준의 어깨를 다시금 껴안았다.
“준아, 그건 너무 다정하게 미친 거 아니야?”
“…….”
다정하다고 말하는 요한의 목소리야말로 따뜻해 서준은 울컥 올라오는 숨을 도로 삼키는 것이 고역이었다. 그는 붉어진 눈가를 숨기려 머리를 숙이고는 요한의 어깨에 기댔다.
“내가 도망친다면 요한, 너는?”
요한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서준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깜빡거렸다. 까만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요한이 급하지 않게 입을 움직였다.
“기쁘게, 너와 함께… 가고 싶지만 크리스티나를 찾아봐야지.”
그는 쓴웃음을 머금고 이어 말했다.
“정말이야. 나 사실은 너와 도망치고 싶어. 준아, 내 마음을 의심하지 마. 응?”
요한의 손이 부드럽게 서준의 양턱을 붙잡고 올렸다.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그는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서준과 눈을 마주쳤다.
거구의 청년이 자아내는 불협화음과 같은 모습에 서준은 속에서 들끓는 열을 느꼈다. 그는 홧홧하게 달아오른 귀와 볼을 숨기지 못했다. 그리고 요한의 멱살을 잡았다.
“어쩐지, 너! 너, 너 혼자!”
배 속을 진탕 흔든 열기의 정체는 다른 무엇으로 착각할 수도 없는 분노였다. 서준은 이를 갈며 요한을 쏘아보았다.
‘어쩐지 아까부터 뭔 이상한 소리나 하더니.’
과연 요한은 《피 흘리는 호수의 살인마》의 주역이었다. 조연조차 못 되는 선지자를 냉큼 치워 버리려는 공포 영화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한 게 분명했다!
‘그놈의 정부 만악 우주 존재설을 지지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서준이라고 요한의 괴상망측한 수작을 느끼지 못했겠는가. 다만 그는 평소에도 종종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오늘따라 그 빈도가 심했지만 괴물과 가스마스크와 만날 날이니 이상해도 그러려니 싶었다.
그러나 진상은 따로 있었던 셈이다. 서준은 물먹은 시금치 같던 몸뚱이 곳곳에 활력이 돋는 걸 실감했다. 내부에서 샘솟는 울분이 곧 그의 힘이었다.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이 함께 있는데 혼자 떨어져 나가 봤자 죽을 게 확실했다.
서준은 요한의 목덜미를 잡아 제 코앞으로 끌어당겼다. 콧대가 툭 부딪히고 핏줄 터진 안구가 매섭게 요한을 노려보았다.
“잘 들어, 요한 젠틸! 나는 너와, 그리고 크리스티나와 이곳에서 도망칠 거야. 절대 혼자서는 안 가. 알아들었어?”
기이하게도 요한은 서준의 영문 모를 노발대발에 마주 화를 내기는커녕 돌연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는 할 말을 잊은 표정으로 입술을 몇 번 달싹이더니 종내에는 꾹 깨물었다.
“그래. 그러자, 준아. 우리 꼭 그러자.”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요한은 조용하고도 확고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의 표정과 목소리는 어쩐지 기묘하게 들떠 있었다. 서준은 요한을 찝찝하게 바라보고는 코웃음 쳤다.
“알면 됐어.”
서준은 요한의 목을 자유로이 놔주었다. 좁은 경비 초소를 채웠던 우울하고도 감상적인 분위기는 날아간 지 오래였다. 그는 랜턴과 과도를 다시 챙긴 다음 요한에게 물어보았다.
“우선 총성이 난 곳으로 가 봐야겠지?”
“음. 그래야겠어. 하지만 정말 총이라면 위험하겠는걸.”
요한이 이마를 살포시 찡그렸다. 서준도 그에 동감이었다. 문제는 알면서도 이렇다 할 방도가 없다는 점이었다. 서준은 요한이 등진 경비 초소 내부의 방문을 가리켰다.
“혹시 여기에 뭐 쓸 만한 게 있지 않을까?”
“이 방? 확실히, 준이 네 말대로 가스마스크가 이곳 관리인이라면 뭐가 있을 수도 있겠다.”
요한은 문손잡이를 돌려 보았다. 역시나 잠겨 있었다.
“더더욱 수상한데.”
문손잡이를 몇 번 더 덜걱거리던 요한이 혼잣말하며 경비 초소 책상을 가리켰다. 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책상을 뒤져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책상을 탈탈 털어도 열쇠는 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가스마스크 본인이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서준은 아랫입술을 질겅거리며 요한의 팔을 건드렸다.
“문고리를 부술 수는 없을까?”
“그게….”
어물쩍 대답을 흐린 요한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문을 퉁퉁 두드리고 귀를 대 보았다. 문을 고르게 두드린 그는 다시 무릎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문 안쪽에 뭘 놔둔 것 같아. 문고리를 부순다고 열릴 게 아닌걸.”
“흐음.”
서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쪽방을 바라보았다.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요한의 손목을 잡았다.
“잠시 기다려 봐.”
“으응.”
요한이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는 게 어쩐지 소름이 돋았으나 괜히 가타부타 타박할 시간도 부족했다.
서준이 망가진 전화기의 선을 끌고 와 문손잡이에 둘둘 말았다. 줄 자체는 그리 두껍지 않았으나 여러 차례 감아 팽팽하게 잡아당기자 제법 튼튼한 밧줄처럼 탄력이 생겼다. 서준은 대강 만든 줄을 요한에게 넘겼다.
“안에 뭐가 있는지 확인이나 하자.”
“뭐, 네가 바란다면.”
요한은 서준을 옆으로 옮긴 후 전선을 손에 둘렀다. 짧은 기합조차 없었다. 팔뚝의 근육이 부푸는가 싶더니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손잡이가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자 문에 동그란 구멍만이 하나 남았다.
요한은 길게 늘어나기야 했지만 용케 끊어지지 않은 전선을 손에서 풀며 큰 몸을 슬금슬금 치웠다. 그는 다소 겸연쩍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게 이렇게 부서질 게 아닌데…. 원래 헐거웠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