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8
“내, 내가 할 수 있어! 나도 할 수 있다고!”
그는 내던져졌던 탓에 양철 냄비가 깊숙이 내려와 코까지 덮인 상태였다. 보비가 양 뺨을 붉히고 콧김을 내뿜었다.
요한의 선전에 감명이라도 받은 것일까? 아니면 그의 인생에 몇 번 없을 용기라는 감정이 눈을 떴을까? 보비는 가스마스크의 팔에 매달렸다.
“요한, 내가 도와줄게!”
승기를 보았는지 보비는 무척이나 의욕적이었다. 가스마스크의 무한한 체력과 괴력을 알지 못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서준은 그의 행동에 내심 감탄하며 바닥에 떨어진 과도를 주워 들었다. 이쪽이야 보비가 목숨을 내던져 움직여 준다면 고마울 따름이었다.
“크, 으….”
“찔러, 요한! 찔러 버려!”
괴상망측한 풍경이었다. 요한과 보비가 가스마스크를 상대로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서준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어쩌면, 혹시 따위의 가정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삶을 향한 가능성이었다.
조금씩이지만 요한의 꼬챙이가 앞으로 나아갔다. 보비는 둘째 치고, 쿼터백의 힘이 연쇄 살인마를 상대했다. 서준은 눈을 꾹 감고 다시 떴다. 지금은 한가롭게 눈물이나 흘릴 때가 아니었다. 그는 요한에게 가세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 했다.
타앙, 길게 끄는 소리가 하몽 캠프장을 울렸다.
수많은 새가 날아올랐다. 날갯짓하는 소리에 일순 숲 언저리에서 들린 총성이 착각이었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요한과 보비, 서준의 시선이 진원지를 찾아 움직였다. 심지어 가스마스크의 몸까지 굳었다. 그토록 낯선 파열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진실로 매섭고 두려운 낙뢰였으며 불길한 전조였다. 불행의 첫 곡조는 하필이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이 가스마스크였다는 점에서 시작한다. 그는 석궁을 위로 올려 꼬챙이를 쳐 냈다.
“큭!”
등자에 걸린 꼬챙이의 끄트머리가 함께 올라가며 요한의 가슴팍이 무방비하게 드러났다. 가스마스크가 근접거리에서 석궁을 겨눴다. 볼트는 이미 장전된 상태였다.
“요한!”
하지만 이번만큼은 서준도 늦지 않았다. 그는 요한의 품에 몸을 날렸다. 어설픈 시도였으나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볼트가 아무것도 없는 땅바닥에 박혀 들었다.
요한은 바닥을 구르며 서준을 껴안고 곧바로 일어났다. 그의 두꺼운 팔뚝이 서준의 허리를 감싸고 가스마스크와 거리를 벌렸다. 그러나 가스마스크는 석궁을 재장전하는 대신 더욱 쉬운 방법을 택했다.
“으악!”
그는 가볍게 보비를 털어 낸 뒤 다시 목을 잡았다. 서준의 싱싱한 피가 묻은 하몽 나이프가 보비의 목덜미를 은근하게 쓰다듬었다. 덕분에 보비는 눈을 까뒤집고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흐, 흐으, 으으….”
가스마스크는 여전히 무언을 고수했지만 그가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는지 모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질이었다. 서준은 과도를 만지작거리며 침을 삼켰다.
“주, 죽이지 마! 살려, 살려 줘. 응?”
첫 번째 말은 가스마스크를 향했으며 두 번째 말은 서준과 요한을 향했다. 서준은 깔깔한 목에 침을 두어 번 삼킨 후 침통한 낯으로 말했다.
“보비! 널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아니! 솔직히 싫어했지만! 네 기일만큼은 미국 전역에 기억될 거야!”
‘독립 기념일이니까.’
서준의 야박하고 매몰찬 언사에 보비가 성을 낸 것도 당연했다.
“개새끼야! 넌 살인자야! 기대하지도 않았어!”
그는 눈물과 콧물을 쏟으며 요한에게 시선을 보냈다. 요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보비, 네 용기를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게. 넌 용감했어!”
표현은 조금 달랐으나 내용은 서준이 한 말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친근한 어투와 달리 냉정하기 짝이 없는 요한의 대꾸에 보비는 크게 충격받았다.
“요, 요한! 어떻게 너까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물론 보비는 살인마라 착각한 서준에게 친구들을 팔아넘긴 전적이 있었으나 어쨌든 요한과 소꿉친구라는 관계가 있기는 했다.
매정한 우정과 배신의 현장에서 가스마스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가치 없는 인질을 놓아주는 대신 보비의 목을 붙잡고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더니 빠르게 숲으로 사라졌다. 총성이 난 것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요한과 서준은 가스마스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몸에서 긴장을 풀지 않았다. 하지만 저주의 말을 쏟는 보비와 과묵한 가스마스크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하….”
서준은 사지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그는 등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옷이 피부에 척척하게 달라붙은 감촉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대로 땅에 미끄러지려는 몸을 단단히 붙잡은 요한이 고개를 숙여 서준과 눈을 마주쳤다.
“준아, 괜찮아? 아프지? 아프겠다.”
“너 혼자 다 대답할 거면 왜 물어봐.”
“하지만….”
“그보다 너는 괜찮아? 나야 보비랑 친구도 뭣도 아니었지만 넌….”
서준이 말끝을 흐렸다. 솔직히 생명의 위기 앞에서 이성적으로 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더군다나 요한은 정신적으로 미숙할 나이의 청년이었다. 자신처럼 두 번 생을 반복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서준의 걱정과 달리 요한은 무척이나 태연한 낯으로 대꾸했다.
“그래도, 준아. 인생에는 우선순위가 있는 법이잖아.”
보비가 사지로 끌려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리 걱정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서준은 뼈저리게 통감했다. 요한 젠틸, 과연 《피 흘리는 호수의 살인마》의 남자 주인공이었다. 인성이 참으로 훌륭해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보다 손부터 보여 줘.”
“손?”
요한이 서준을 조심스럽게 자신의 품에서 떼어 냈다. 그는 주머니를 뒤적였지만 쓸 만한 게 나오지 않자 한숨을 내쉬었다. 서준은 그의 비교적 한가하기까지 한 태도에 그제야 억눌렀던 신음을 흘렸다.
“흐으….”
눈물이 찔끔 솟아났다. 도대체 온몸에 성한 구석이 없었다. 이런 꼴을 보기 싫어서 평생을 이른바 룸펠슈틸츠헨 베이비와 거리를 두었는데 결국 이 모양이었다. 요한은 결국 그나마 멀쩡한 서준의 왼손을 잡았다.
“이쪽 붕대를 풀어서 오른쪽 손을 더 단단히 감자. 응?”
“으응.”
왼손도 피부가 쓸리고 베이기야 했지만 구멍 난 오른손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서준은 천천히 풀리는 붕대를 응시하며 일부러 우편에서 시선을 돌렸다. 욱신거리는 고통은 하몽 나이프에 갈렸던 때보다는 나았지만 엉망이 된 상처를 봐도 기분만 가라앉을 뿐이었다.
요한은 붕대로 상처를 단단히 감으며 입을 열었다. 낮은 목소리는 속상한 듯 물기를 띠었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준아, 정말 위험했어.”
“그러다가 네가 죽으면?”
반사적으로 입에서 튀어 나간 말이었다. 요한이 죽는 순간 크리스티나가 겪어야 할 위험의 난도는 심각하게 올라갈 터였다. 그는 앞으로도 서준과 크리스티나의 든든한 방패가 되어 줄 의무가 있었다. 적어도 서준은 그렇게 믿었다.
날 선 대꾸를 듣자 요한의 푸른 눈동자에 여러 감정이 섞여 일렁였다. 하지만 달빛조차 제대로 비치지 않는 으슥한 야영지에서 그의 눈이나 한가롭게 바라볼 사람은 없었다.
요한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는 모양 좋은 입술에 잇자국을 낸 다음에야 자학을 멈추었다.
“그래도. 그러지 마.”
붕대가 손가락 사이를 감자 무시하지 못할 아픔이 밀려왔다. 서준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준아, 많이 아파? 아파도 참아.”
귓가가 웅웅 울렸다. 하나 마나 한 말이 나직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에 실려 서준의 고막을 건드렸다. 시각이 차단되자 여러 감각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예를 들자면, 바로 곁에 선 남자의 체온.
요한은 미지근하게 구는 것과 달리 열이 많았다. 서준은 이 낯간지러운 사실을 알아 버렸다는 사실이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생소한 감각에 오래 매몰되지 못했다.
“사람의 두개골은 생각보다 강도가 세. 그리고 나는 미식축구 선수잖아. 피부 긁히는 정도는 익숙해.”
요한이 태연히 꺼낸 말은 순간적으로 서준의 뱃속에 불씨를 던졌다. 그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요한과 눈을 마주쳤다. 핏발이 선 안구는 금방이라도 피를 흘릴 듯 붉었다.
“익숙해? 가스마스크의 팔심과 속도를 생각했을 때 네 미간을 깨부수고 뇌를 찔렀을 수도 있어. 위치를 조금이라도 틀었으면 안구를 터뜨리는 것도 가능했지. 미치광이를 네 편할 대로 재단하지 마. 이 세상은 이상한 곳이야. 말도 안 되는 일이 태연히 벌어진다고.”
내 손바닥에 구멍 난 게 보이지 않느냐며 손을 짤랑짤랑 흔들어 주자 요한이 그제야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불쌍한 개와 같은 꼴을 한 그는 서준의 손을 붙잡았다.
“그건 그래. 미안해, 준아. 정부에서 숨긴 우주 생명체도 있는 마당에 내가 허튼소리를 했어.”
자신이 빙의자라 믿는 청년은 아직도 정부 만악 우주 존재설을 지지하는 음모론자를 질린 듯 바라보았다. 그러나 손에 붕대도 다시 감았겠다, 더는 이곳에서 허투루 보낼 시간도 없었다.
그는 요한과 깍지를 낀 손을 털어 버리고는 땅바닥에서 아무렇게나 구르는 랜턴을 주워 들었다. 다행히 보비는 잡혀갔을지언정 그가 들었던 랜턴은 무사했다.
“안다니 다행이다. 그보다 가스마스크가 저쪽으로 간 거 봤지? 지금이 기회야. 가스마스크를 만난 건 우리니까 크리스티나는 무사할 거고, 경비 초소도 비워졌겠지.”
말을 끝낸 서준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직도 이상한 점이 온갖 곳에 산재해 있었다. 난데없이 울린 총성, 석궁의 불가사의, 가스마스크가 보비를 잡아간 이유 등…. 다만 그들은 한가로이 수수께끼를 하나둘 풀어 나갈 여유가 부족했다.
“물론, 경비 초소라고 멀쩡하지 않을 수도 있어. 가스마스크의 정체는 이곳의 관리자니까 무언가 방비를 해 두었을지도 몰라.”
애초에 휴대 전화가 터지지 않는 것도 지금 생각해 보면 그가 모종의 수를 썼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냥 이곳 전파 상태가 나쁠지도 모르겠지만.’
푸르게 질린 얇은 입술이 비죽거렸다. 대한민국에 살 적에는 도시에서 평생을 살았었다. 당시의 서준은 자신이 이토록 드넓은 숲과 호수가 있는 미국에 틀어박힐 줄 상상도 못 했다.
“그러면 가스마스크가 다시 오기 전에 빨리 움직이자. 크리스티나나 빌리도 그쪽으로 오고 있을 테니까.”
어쨌든 이러니저러니 고민해도 경비 초소의 유선 전화가 희망이었다. 비록 그 희망이 썩은 동아줄에 불과한들 현실은 냉혹했다.
“좋아. 가자, 요한.”
“그런데, 준아. 손 아프지 않아? 내가 업어 줄까?”
“와, 요한! 두 다리로도 가스마스크를 충분히 제압할 수 있구나! 정말 대단해!”
“그건 좀….”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요한과 서준이 발을 움직였다. 그들은 애써 다른 가능성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크리스티나와 에어리, 윌리엄이 총성과 관련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