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
서준은 자신이 고정 관념에 빠져 있었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그는 요리사는 요리사라는 직책 하나만을 지녔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누추한 캠프장의 몰골을 다시 떠올려 보자. 당장 간이 취사장의 꼴이 어떠한가? 때가 타 꼬질꼬질한 보비와 뼈와 가죽밖에 남지 않은 시체는 차치하고서도, 컨테이너만 덜렁 갖다 놓았다. 그나마 식당이나 구 합숙소는 건물 모양을 갖췄지만 후자는 을씨년스럽게 방치되어 관리하는 기색도 없었다.
귀신이라도 나올 듯한 캠프파이어장과 야영지는 어떠했나? 나달나달한 삼각 텐트의 곰팡내가 코 아래에서 아른거렸다.
“젠장….”
서준은 애꿎은 보비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명백히 자신의 실수였다. 이토록 관리 인원이 적은 캠프장이라면 한 사람이 여러 업무를 총괄할 가능성이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쳤다. 전체 관리인이 요리까지 담당하는 건 불가능하지 않았다.
길쭉한 다리가 크게 휘청거렸다. 넘어질 뻔한 서준의 팔을 붙잡은 건 요한이었다.
“준아.”
그는 서준의 이름을 부를 뿐 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서준은 요한의 큼직한 손을 보고, 근육으로 단단한 팔뚝을 보고, 이어 너른 어깨와 강인한 섬유로 이루어진 목을 보았다.
청년다운 턱과 날렵한 뺨, 그리고 눈동자. 시선이 천천히 올라갈수록 요한을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가 인지되었다. 오늘 밤 괴물 혹은 살인마에게 갈가리 찢겨 육편으로 흩날릴 수도 있는 것들이었다.
순간 목구멍에서 숨이 막혔다. 서준은 이런 걸 알고 싶지 않았다. 그는 비겁해도 좋으니 방관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서준의 육체는 이미 하몽 캠프장에 있었다. 손바닥이 찢기고 어깨에서 피가 흘렀다.
서준은 볼 안쪽의 살을 깨물었다. 그는 두 번의 생을 거치며 통증만큼 즉각적인 반응을 알지 못했다.
“요한, 살고 싶어?”
“당연하지!”
요한이 입을 열기도 전에 보비가 냉큼 대답했다. 보비의 생명이야 알 바 아니었다. 서준은 답을 구하듯 요한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요한의 입가에는 찬찬히 미소만 걸렸다. 온화한 생김새의 이목구비는 어둠 속에서도 본질을 잃지 않았으나 그의 얼굴에 대꾸 대신 걸린 웃음은 참으로 기묘했다. 지금이 이런 표정을 지을 때인가?
문득 의구심이 생기기도 전에 요한이 미소만큼이나 느릿하게 입술을 벌렸다.
“당연하지. 준아. 나는 행복하게 살고 싶어. 그러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
“그래….”
뜸 들일 만큼 대단한 말도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 간이 취사장이라는 이름의 컨테이너 속 인간들의 바람은 하나로 모였다. 이 불우한 하루에서 살아남는 것이다. 서준은 보비에게 버럭 외쳤다.
“보비, 지도!”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참혹한 결말을 막을 희망은 오직 크리스티나였다. 그녀는 처참한 어둠 속에서 횃불을 든 여신처럼 그들을 구원하리라. 그러니 크리스티나의 정신적, 육체적 피해가 크지 않도록 도와야 했다.
그런데 이토록 다급한 때 보비는 똘똘하고 날래게 행동하지는 못할망정 눈썹이나 축 늘어뜨리고 굼뜨게 굴었다. 서준은 제 화가 몹시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는 다시금 보비에게 말했다.
“보비, 지도라는 건 평면 종이에 약속된 기호를 표시해 둔 것을 뜻해. 네가 게으름을 부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너희 친구들의 생명은 촛불처럼 시시각각 꺼지고 있어. 그러니까 당장 내놔!”
서준은 이번만큼은 협박의 의도로 과도를 휘둘렀다. 마치 꿀벌처럼 8자 형 궤도를 그리며 허공을 가르는 칼에 보비가 딸꾹질하며 꽥 소리쳤다.
“그 지도, 네가 나한테 뺏어 갔잖아!”
보비는 억울해 눈꼬리에 눈물까지 고였다.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다. 서준은 냉정하게 대꾸했다.
“진작 그렇다고 말했어야지, 보비.”
매끈한 눈썹이며 고운 이마를 찡그리며 위협적인 표정을 짓는 서준을 보자 보비는 더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는 방향을 바꿔 요한에게 제 서러움을 토로했다.
“요한, 너는 이 미치광이가 나한테 칼을 휘두르는데 왜 말리기는커녕 등을 받쳐 주고 있어?”
“보비, 서준은 부상자잖아.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다니, 네가 그렇게 야박한 사람일 줄 몰랐어.”
“아악!”
요한의 대답은 보비의 화를 가라앉히는 건 고사하고 그의 속을 까맣게 태웠다. 서준은 그들을 보며 건강하지 못한 교우 관계를 진작 생성하지 않아 다행이라며 친구 하나 없는 제 인생을 위로했다.
그는 보비가 가쁜 숨을 허덕이는 걸 무시하고 자신의 바지 뒷주머니를 매만졌다. 어쩐지 뒤에서 요한이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요한은 서준의 귀에 속삭이듯 말했다.
“준아, 내가 꺼내 줄까?”
“아니?”
서준은 꼬깃꼬깃하게 접어 놓은 지도를 꺼냈다. 딱지처럼 접어 놓아 펼치니 모눈종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보비가 울적하게 중얼거렸다.
“내 지도….”
물론 보비의 심경은 하등 중요하지 않았기에 서준은 지도를 바닥에 깔고 랜턴의 불빛으로 환하게 비추었다. 세 개의 머리통이 옹기종기 모였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D 구역을 가리켰다.
“여기, 이 관리동…, 그러니까 경비 초소와 식당 사이쯤에서 내가 발을 들였어. 그런데 하몽 캠프장에 들어서자마자 경비 초소에서 나오는 가스마스크와 마주친 거야.”
“하필이면…. 운이 없었구나, 준아.”
평소라면 공포 영화의 남자 주인공 역할인 요한의 말에 반박할 거리가 충분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의 말이 옳았다. 7월 4일의 서준은 운이 심각하게 부족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 말했다.
“그래, 아무튼 쫓기던 와중에 나보다 먼저 이 자식이 와 있었다는 걸 보고 나니 정신이 없어서 깊게 생각을 못 했어. 이 하몽 캠프장의 요리사인 동시에 관리인이 가스마스크라는 사실을 말이야.”
그때 보비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런데 이 사람 얼굴에 곰보 자국이 난 건 어떻게 안 거야? 가스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며.”
“어…. 내가 반항하면서 어떻게 우연히 잘 마스크가 조금 삐뚤어졌어. 그 틈으로 봤지.”
서준이 대강 변명했다. 하지만 보비는 여전히 미심쩍게 그를 바라보았다.
“넌 손전등이나 랜턴도 가지고 있지 않았잖아?”
“때마침 달빛이 밝게 내리쬐더라고.”
내가 밤눈이 밝아, 하며 서준은 보비의 뺨을 과도 손잡이로 꾹꾹 밀었다. 그의 설명이 잘 통했는지 보비도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 서준은 요한에게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요한, 전화하러 간다는 건 다시 말해 가스마스크의 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꼴이야. 죽으러 가는 거라고.”
서준은 손톱을 세워 두피를 벅벅 긁었다. 피가 날 정도로 따끔한 고통이 쌓였지만 조바심이 손끝에 모여 쉽게 멈출 수 없었다. 그때 요한이 서준의 깡마른 손목을 잡았다.
“준아, 네 말은 알았어. 생명은 머리카락과 같지. 돌아오지 않고 끝없이 소비될 뿐이야.”
손가락 하나하나를 부드럽게 쥐면서 하는 말이 이상했다. 서준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모발이 풍성한 머리를 힐긋거렸다.
“걱정 마. 내 조상님들은 다들 넉넉하셨거든.”
적어도 사진으로 확인한 바 고조부모 대부터는 그러했다. 그는 손가락을 꿈지럭거리며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가 가장 빨리 경비 초소로 가려면 캠프파이어장을 가로질러 가야 해. 크리스티나네가 어느 길로 갈지 모르니까….”
“내 생각도 그래.”
그리하여 길쭉하고, 두텁고, 납작한 세 명은 경비 초소로 향하게 되었다. 물론 보비는 반항했다. 그는 간이 취사장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는 빼액 부르짖었다.
“나, 나는 여기서 안 나갈 거야. 너희 미쳤어? 서준의 말이 사실이라면 바깥에는 괴물에다가 살인마, 석궁을 쏘는 미친놈까지 있다는 거잖아!”
하나하나 정리하니 새삼스럽게 암담한 현실이었다. 서준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음. 그래, 보비가 원한다면 난 말리지 않을게. 어디까지나 보비가 스스로 원하고 선택한 보비의 인생, 보비의 삶, 보비의 운명이니까. 비록 내일부터는 보비와 만나지 못하겠지만 보비가 원했으니까 어쩔 수 없지. 비록 보비의 시체는 가스마스크가 훼손하거나 괴물이 동강을 내거나 하겠지만 보비가 원한 일인걸. 컨테이너에 갇혀 빛나는 해도 보지 못하고 점점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가 숨구멍을 조이겠지만 나는 보비의 의견을 존중해.”
“따, 따라가면 될 것 아니야!”
보비가 기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준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억지로 따라오라고 한 적도 없는데 혼자 난리였다.
“보비도 뭔가 무장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도 친구라고 걱정스럽다는 듯 요한이 덧붙였다. 확실히 보비는 몹시 무방비했다. 하지만 간이 취사장에서 그나마 무기로 쓸 만한 과도와 꼬챙이는 이미 서준과 요한의 손에 들어간 지 오래였다. 보비를 위해 제 장비를 양보할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던 서준에게 다행히 좋은 것이 보였다.
그는 다정한 손길로 보비의 머리통에 양철 냄비를 씌워 주었다. 요한도 해사하게 웃으며 칭찬했다.
“와, 정말 안전해 보여. 보비!”
메말랐던 보비의 눈가가 습하게 젖어 들었다.
우그러진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괴물의 일격이 컨테이너의 문 경칩을 비틀지는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먼저 나가 동정을 살핀 요한은 서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아, 나와도 괜찮아.”
“어어.”
서준은 요한의 팔뚝을 잡고 바깥의 공기를 한껏 들이켰다. 숲과 호수의 청량한 공기 대신 물비린내와 피 냄새가 콧구멍을 파고들었다. 괴물은 어디론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육중한 몸뚱이가 이곳에 있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부러진 나무와 쓸리고 파인 땅 구덩이가 남아 있었다. 당장 어디로 가 버렸는지는 모르지만 올 때와 마찬가지로 언제 다시 나타날지 알 수 없었다.
양철 냄비를 쓴 보비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는 불안스럽게 주변을 살피며 목을 쭉 뺐다.
“괴물, 괴물은 없는 게 확실해?”
“요한, 빨리 움직이자. 지금도 시간이 많이 지체됐어.”
“그래.”
“내 말이 혹시 안 들려? 너희 귓구멍이 막힌 거야, 내 목소리가 사라진 거야? 야, 야!”
그리하여 일행은 발바닥에 불길함과 찝찝함을 붙이고 B 구역의 산막을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