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
4. 군대는 엄청난 것을 흘렸습니다
“아무튼, 함부로 괴물하고 싸우려고 하지 마.”
서준은 말을 돌렸다. 어차피 요한을 비롯한 배역들을 진지하게 설득하고픈 마음도 없었다. 그는 따로 눈을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보비의 축축한 목깃만 노려보았다. 맹렬한 눈빛을 한 몸에 받은 보비가 몸을 떨었지만 서준의 안광은 더욱 빛날 뿐이었다.
“그, 그만 봐.”
그는 기어이 보비의 입에서 가냘픈 애원이 흐른 다음에야 맹금류 같은 시선을 거두었다. 요한은 서준의 대화를 거부하는 태도에 말없이 손목을 털었다. 꼬챙이가 가볍게 돌았다.
“그래. 알았어, 준아. 조심할게.”
순순히 수긍하는 요한에게 잘난 듯이 군 것이 신경 쓰여 서준이 눈꼬리에서 힘을 빼고 그에게 다가갔다.
“있잖아, 요한….”
“준아, 잠깐만.”
쉿, 하며 요한이 자신의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기껏 낸 용기가 구겨지려는 찰나 서준의 귀도 그 소리를 들었다. 잔디를 무겁게 누르며 움직이는 소리는 결코 사람의 발이 낼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입을 틀어막았다. 막대한 질량의 중압감이 서서히 사그라드는 감각은 양팔의 피부에서 소름이 돋을 정도로 사람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괴물을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면 가장 좋았을 테지만 하필 간이 취사장에는 이렇다 할 창이 없었다. 컨테이너를 개조해 만들어 찌그러진 문이 통로로 기능하는 전부였다.
바깥을 보지 못한 채 얼마나 숨을 죽였을까? 요한이 서준의 손목을 살며시 붙잡고 끌어 내렸다.
“준아, 간 것 같아.”
“응.”
서준은 대답하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문 아래의 틈으로라도 동정을 살피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별 효과는 없었다. 워낙 벌어진 자리가 좁고 어두웠던 탓이다.
‘뭐 보이는 게 없어.’
서준이 더러워진 무릎을 털면서 일어나자 요한이 슬쩍 다가와 귓속말했다.
“준아, 내가 등이랑 허벅지 털어 줄까?”
왜 고작 먼지 좀 떼어 주겠다는 말을 이리 은밀하게 해야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더군다나 몸을 앞으로 숙였는데 왜 뒷면을 훔치겠다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괜찮아.”
그보다, 하며 서준은 랜턴의 불빛을 강하게 조절했다. 부디 괴물이 정말 이곳을 떠났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이 시체, 출처가 어떻게 될까?”
“넌 무슨 사람을 주석처럼….”
말꼬투리를 잡는 보비의 행태에 하나하나 맞장구를 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서준은 그를 무시하고 허리를 숙였다.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에서는 지독한 냄새가 올라왔다.
‘이런 걸 껴안고 다니다니, 이 자식도 대단해.’
서준은 내심 보비의 비위에 감탄하며 상반신을 향해 팔을 뻗었다. 손에 든 랜턴이 덜컹 작게 흔들렸다. 주황색 불빛이 일렁이며 그것의 흐물흐물한 자태가 드러났다.
“우욱….”
옆에서 보비가 헛구역질해 댔다. 그간 어두워 잘 몰랐는데 막상 두 눈으로 상반신을 보니 새삼스럽게 역겨워진 모양이었다. 상태가 심각하기는 했다. 보비는 겨우 올라오는 토악질을 참아 내고는 서준이 든 랜턴을 옆으로 슬슬 밀었다.
“이건 왜 보는 거야.”
“왜일까, 보비? 뇌가 간신히 들어간 네 작은 머리통으로 한번 생각이란 것도 해 봐.”
물론 보비의 두개골이 평균보다 자그마하지는 않았으나 서준은 괜히 그럴싸한 말을 던졌다. 요한도 다가와 꼬챙이로 상반신을 툭 건드렸다. 가벼운 가죽은 훌렁훌렁 잘도 뒤집혔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이건 군복인가? 밀리터리 마니아일지도 모르겠지만.”
몸이 반으로 동강 난 시체는 비록 속은 텅텅 비었지만 겉에 걸친 의복만은 비교적 멀쩡했다. 그는 디지털 무늬 야전 상의와 조끼를 챙겨 입었는데, 아마 방치된 하반신도 비슷한 옷가지였던 듯했다.
“군인이 이런 데를 왜 오겠어? 한심한 밀리터리 룩 마니아일 게 분명해.”
보비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확실히 톰팃톳은 대체로 조용한 동네였다. 비록 살인마와 식인 괴수가 날뛰고야 있지만…. 여느 때는 그렇다는 뜻이었다.
그때 서준이 입술을 살짝 벌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경박한 목소리와 천박한 몸짓이 떠올랐다.
“정육점 브렌!”
“브렌? 그 소문난 춤꾼? 탱고의 달인?”
브렌이 그토록 춤을 잘 추는지는 모르겠지만 브래스와 야밤의 가도에서 흥겹게 몸을 움직이기는 했다. 서준은 보비가 알려 주는 쓸모없는 지식을 무시하고 제 말만 빠르게 지껄였다.
“브래스가 새벽에 군용 트럭을 봤다고 했었어. 무슨 헛소리를 하나 싶었는데 이 군인이 그 트럭에 타고 있었다면….”
서준이 말끝을 흐렸지만 그가 한 추측은 요한이나 보비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이 불쌍한 군인은 해가 뜨기도 전 목숨이 끊겼으리라.
“역시 그 괴물한테 당했겠지? 세상엔 별별 게 다 있구나.”
“그 괴물은 어디에서 나온 걸까?”
“우주에서 온 거야.”
요한과 서준이 시신을 살피며 대화하는 사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있던 보비가 입을 열었다. 서준이 뒤를 돌아보자 보비의 희열에 찬 얼굴이 보였다. 그의 안색은 눈에 띄게 창백했으나 코와 뺨에는 열이 올라 불그스름했다. 보비는 반들거리는 눈으로 상반신의 절단면을 바라보았다.
“여, 역시 한나 오 랜턴의 수기는 진실이었던 거야. 틀림없어! 군대는 분명 괴물이라는 진실을 묻어 버리려다가 반대로 당한 거지.”
보비가 조급하게 외치자 요한이 창백해진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진정해, 보비. 내 생각에는 정부의 실험체 아닐까? 방사능이나, 뭐 그런 거.”
서준은 그들을 둘 다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미국에 음모론이 파다하다더니, 멀리 찾으러 나갈 것 없이 바로 코앞에 음모론자들이 있었다. 물론 요한은 제가 말하면서도 썩 믿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그때 보비가 갑자기 목청을 높였다.
“아니! 한나 오 랜턴의 친구들이 죽은 모습과 이 군인이 죽은 모습은 굉장히 비슷해. 이건 틀림없이 저것이 우주의 존재이고, 한나 오 랜턴이 교신했던 존재가 다시금 이 캠프장에 나타났다는 걸 증명하지. 마침 오늘은 독립 기념일이니까!”
“한나 오 랜턴이고 잭 오 랜턴이고 자시고. 우주에서 지구 오기 참 쉽다. 응? 왜, 아주 지구 정거장 톰팃톳 역이라고 하지 그래.”
“이이익….”
보비가 분한 듯 발을 굴렀지만 서준은 코웃음만 쳤다. 저 허여멀건 괴물은 기껏해야 삼류 감독의 허망한 공상적 실체에 불과했다. 그는 제가 공포 영화에 빙의했다고 믿는 주제에 머리가 꽉 막혀 고리타분했다.
“저게 진짜 외계에서 날아왔으면 내가 알몸뚱이로 춤을 추겠어. 불알 밑에 난 점까지 다 보여 주겠다 이 말이야.”
평소에 보비에게 손가락질당한 원한이 이럴 때 표출되는 것일까? 서준은 한술 더 떠 허무맹랑하고 추잡스러운 공약까지 내걸었다.
“잠깐, 내 생각에도 저건 외계에서 온 것 같아.”
“뭐?”
보비가 헛구역질하는 꼴을 무척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서준은 떨떠름하게 그를 돌아보았다. 요한이었다. 정부 만악설을 밀던 요한이 돌연 우주 존재설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서준아. 생각해 봐. 방사능을 쬔 동식물이 기이하게 변형된다는 소리는 많이 들어 봤지. 하지만 우주에서 날아온 미지의 생명체가 과연 지금까지 없었던 게 말이나 될까? 인류가 달까지 갔다 온 시대야. 내 생각에는 이건 우주에서 온 괴생명체를 정부에서 실험하던 게 분명해. 군용 트럭이 지나갔다고 했지? 더 볼 것도 없어. 그들이 우주 존재를 옮기던 거야.”
듣다 보니 이제는 숫제 정부 만악설과 우주 존재설이 결합한 정부 만악 우주 존재설을 주장했다. 서준은 기가 막혀 랜턴으로 요한의 얼굴을 자세히 비췄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진실하게 빛났으며 입매는 진중했다.
“요한, 너 평소보다 말이 많다?”
“나는 평소와 같아. 온전히, 완벽하게.”
씨알도 안 먹힐 소리나 하는 요한은 내버려 둔 채 서준은 입술을 짓씹었다. 지금 그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주인공인 크리스티나였다.
고난과 역경은 그녀의 원동력이 될 것이며 비명을 지를수록 크리스티나의 수명은 길어질 것이다. 서준은 부디 자신이 그녀의 질긴 명줄에 얹혀 가기를 강하게 바랐다.
“그나저나 크리스티나가 잘 갔을까? 가스마스크와 마주치면 큰일인데….”
비록 그녀가 가스마스크에게 살해당하지는 않겠지만 윌리엄과 에어리는 모를 일이었다. 서준의 혼잣말을 들은 보비가 꺼림칙하게 되물었다.
“그거 진짜야? 그, 가스마스크 어쩌고.”
“보비, 내가 널 놀리기 위해 온몸에 피 칠갑하고 도끼를 들고 달려들 거라는 자의식 과잉을 버려 주면 정말 고맙겠어.”
“준아, 너무 걱정하지 마. 빌리도 같이 있잖아.”
으레 남자 주인공이 아닌 근육의 소유자는 멀리서 날아온 도끼에 머리가 찍히거나 뒤에서 달려든 칼에 목, 심장, 하복부 등을 찔린다. 윌리엄의 운명이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았다…. 서준은 랜턴을 들지 않은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요리사를 조심하라고 해야 했는데.”
“요리사라니, 무슨 요리사?”
요한이 서준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 내고 자신이 문질러 주었다. 이마에 닿는 타인의 온기를 느끼던 서준이 고개를 들어 요한을 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순수한 호기심만이 있었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서준은 깔깔한 목에 침을 삼킨 뒤 대답했다.
“왜, 얼굴에 곰보 자국이 난 사람 있잖아.”
“그 사람은 요리사가 아니라 캠프 관리인이야. 내일 우리 식사도 만들 거라는데 영 실력이 없어 보였단 말이지.”
보비가 투덜투덜 불평을 늘어놓으며 끼어들었다. 하지만 서준은 그를 타박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저 자신이 들은 말이 보비의 하찮은 거짓말이기를 원했다.
그러나 요한은 보비가 장난을 쳤다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서준은 천천히 떠올렸다. 처음으로 하몽 캠프장에 도착했을 때 마주쳤던 가스마스크와 그가 나왔던 건물을.
경비 초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