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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13)화 (13/156)

#013

에어리는 뒷걸음질 치려 했지만 마구잡이로 뜯긴 허리에서 내장이 쏟아지자 그만 미끄러졌다. 균형을 잡는 데 능숙한 에어리라 한들 걸쭉한 피와 기름 섞인 지방을 밟고는 중심을 잡기 어려웠다.

이어서 얼빠진 눈빛으로 제 몸에 묻은 핏자국을 바라보았다. 초점이 잡히지 않고 흔들리는 눈동자 위로 눈꺼풀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진한 핏물로 그려진 흔적은 두 눈으로 보아도 현실감이 부족했다.

참담한 몰골에 그녀의 가슴팍이 크게 헐떡거렸다. 공상적이기까지 한 광경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건 비단 에어리만이 아니었다. 뒤늦게 윌리엄이 다급하게 애인의 이름을 불렀다.

“에어리!”

그는 서둘러 에어리의 곁으로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빠른 존재가 있었다. 불행이라면 그것이 산막 안이 아닌 바깥에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외피의 생김새로는 믿지 못할 속도로 산막을 향해 접근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에어리는 위치의 불리함을 떠맡았다. 무성하게 자라난 풀을 헤치며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거대한 ‘무언가’였다.

“저게 뭐야….”

서준의 입이 무심코 움직였다. 그는 눈을 꾹 감았다가 다시 떴다. 부릅뜬 두 눈이 정면을 향했다. 여전히 이전과 같았다. 사라지지 않은 현실이 망막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당연하지만 서준은 언젠가 찾아올 이날을 위하여 머릿속에서 수많은 미래를 헤아렸다. 가스마스크의 복장, 그가 손에 들 흉기, 하몽 캠프장의 누추하고 연쇄 살인마에게 유리한 지형. 식인 괴수인 괴생명체 X도 그에 속했다.

그러나 영화의 이미지가 너무나 강렬했던 탓일까? 온갖 끔찍한 상상의 끝은 언제나 어설픈 인형 옷으로 이어졌다. 조잡한 탈바가지, 창고 구석에 먼지나 풀풀 쌓일 애니메트로닉스….

모조리 틀렸다. 서준은 차라리 제 실수를 인정했다. 그는 차라리 심해 생명체가 나오는 영화나 탐독했어야 옳았다.

크기는 컸다. 소형 버스만 한 몸집의 그것은 착실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점차 가까워지는 그것을 두 눈으로 생생히 지켜보면서도 정확한 생김새를 묘사하기는 힘들었다.

그것은 푹 익혀 흐물흐물하게 퍼진 문어 같기도 했고, 덜 익힌 오믈렛을 갈라 쏟아 낸 것 같기도 했다. 백색 광택이 흐르는 매끈한 표면에는 숨구멍이 여럿 있었는데, 그 부위가 오므라들었다가 펼쳐질 때면 비릿한 냄새가 나는 물이 왈칵 쏟아졌다. 역겨운 광경이었다.

그것은 굼질굼질 움직이면서도 느리지 않은 모순을 몸소 표현했다. 아무래도 바닥과 닿은 아랫배의 빨판이 제법 다목적으로 쓰이는 모양이었다. 몸통으로 여겨지는 부위의 가운데에서 나온 길쭉한 촉수에는 사람이 휘감겨 있었다.

손이라 보아야 할 부위일까? 서준은 그것이 쥔 사람을 망연하게 바라보며 엉뚱한 생각을 했다. 어쩔 수 없었다. 우선 그것이 붙잡은 사람은 온전한 인체를 보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로지 상체뿐인 시신에는 죽음 직전 느꼈을 고통과 경악이 박제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절반으로 뜯긴 몸뚱이를 홱 던졌다. 시원스러운 몸짓이었다. 서준은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시체와 눈이 마주쳤다. 푸르게 부푼 얼굴에서 표정을 발견하는 것은 썩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그것이 의도한 바였는지 서준으로서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계획을 세울 지성이 있는 존재라면 제구력이 상당했다. 그것이 던진 상체는 절묘하게도 산막 안으로 쏙 들어왔다. 운 좋게 아직도 상반신 속에 들어 있던 심장, 간, 폐, 콩팥 따위를 흩날리며.

덕분에 보비의 품에 안긴 시체는 가벼웠다. 물론 보비는 기뻐하지 않았다.

“아아악!”

얼결에 상반신을 덥석 껴안은 보비가 온 세상의 절망을 퍼뜨리듯 부르짖었다. 보비는 정신없이 끌어안은 몸뚱이를 떼어 내려 했지만 축축하게 젖은 바람에 마치 해초처럼 엉겨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그의 절규도 그 나름대로 쓸모 있었다. 온 힘을 다해 내지른 비명은 윌리엄의 몽롱한 정신을 자극했다. 윌리엄이 에어리를 향해 달려갔다. 굳었던 몸이 풀린 듯 다소 어색한 움직임이었지만 그는 직선으로 뛰었다.

그러나 그것은 골격이 없어서인지 윌리엄보다 수배는 재빨랐다. 그것은 팔, 다리, 혹은 촉수로 부를 수 있는 유연한 살덩이를 앞으로 뻗었다. 무엇이든 쥐고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다만 확실한 건 그것에게는 다리가 여러 개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누구보다 빠르게 체감한 사람은 다름 아닌 에어리였다.

“사, 살려, 아악!”

채찍처럼 날아온 다리가 에어리의 허리를 빠득 조였다. 그러고는 허공에 들어 올렸다. 에어리는 혼비백산해 다리를 버둥거렸다.

“빌리! 빌리!”

그녀의 옷차림은 얇았다. 그 말인즉슨 갈빗대 아래가 보호할 장비도 없이 무방비하게 노출된 상태였다.

“에어리!”

정체를 알지 못하는 존재가 자신을 낚아챘다는 공포에 질겁하기도 전에 선뜩한 고통이 먼저 다가왔다. 피부와 가죽을 누르고 내장을 압박하는 힘에 에어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안 돼, 에어리!”

시체와 얼싸안은 보비는 둘째 치고, 크리스티나와 윌리엄은 조급해져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윌리엄은 맨몸뚱이로 괴물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요한 또한 서준을 침대 안쪽으로 밀어 넣고는 그의 앞에 섰다. 그러나 서준은 알았다. 잠깐의 안락함은 생명을 보장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두툼하게 붕대를 감은 손바닥에 도돌도돌한 촉감이 느껴졌다. 껍질을 까지 않아도 새큼한 향이 느껴졌다. 비릿한 악취로 가득한 공간에서 숨통이 트였다. 하지만 느긋하게 있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에어리의 수명이 조금씩 닳고 있었다.

서준은 팔을 뻗어 도끼를 잡았다. 자루에는 여전히 핏물이 묻어났다.

“준아?”

부스럭거리는 기척을 느꼈는지 요한이 뒤돌아보았다. 끝이 내려간 요한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어쩔 수 없었다. 서준의 행동은 기행이라 부르는 편이 어울렸다. 그는 도끼로 레몬을 찍는 중이었다.

서준은 적이 무디고 어리벙벙한 얼굴을 한 요한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면서도 손을 멈추지는 않아 곧 과일이 터지고 시큼한 즙이 도끼날을 축축하게 적셨다. 서준은 손목까지 튄 즙을 혀로 핥았다. 당도가 낮았다.

“자, 요한….”

“나? 이거?”

서준은 요한의 손에 도끼를 쥐여 주었다. 그러고는 그의 손목을 덥석 붙잡고 산막 밖으로 이끌었다. 이름 모를 시체와 보비를 지나치고, 크리스티나를 지나치고, 윌리엄을 지나쳤다.

사람이 북적여 온도가 높던 산막을 빠져나오자 부패하기 시작한 시체의 피, 호수 밑바닥의 비린내가 차가운 밤공기와 뒤섞여 피부를 건드렸다.

혼몽하던 의식이 점차 또렷해졌다. 기이한 밤이었다. 연쇄 살인마와 마주치고 어리숙한 인지를 뛰어넘은 괴물이 나타났다. 세상은 그런 법이다. 서준이 외면하고 회피하려 해도 그들은 이미 이곳에 존재했다.

그렇다면 서준 역시 실존하는 대상을 사용하면 될 일이었다. 그는 요한의 팔뚝을 잡았다. 탄력 있는 근육이 미세하게 떨렸다. 요한도 두려워하는 것일까? 서준은 아무 말 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요한의 푸른 눈동자는 미동 없이 곧게 서준과 부딪쳤다. 일직선의 눈빛이었다. 공포가 아니라면 요동의 원인은 무엇일까?

짧은 궁금증은 생겨났을 때처럼 금방 사라졌다. 더 지체했다가는 에어리의 척추가 부러질 판국이었다. 서준은 요한의 어깨를 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요한, 도끼를 던져.”

요한은 서준에게 받은 도끼를 생경하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시선과 달리 그의 손에 머뭇거림은 없었다. 요한은 입꼬리를 끌어 올려 씨익 웃었다. 소리 없는 미소는 이제 막 청년의 태가 두드러지는 그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맡겨만 둬.”

요한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곧게 뻗은 팔에서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개구진 입매가 다물리고 두툼한 흉곽이 한층 팽창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던졌다.

차라리 쏘아 냈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날카롭게 귀를 울렸다. 회전하는 도끼의 날이 달빛을 받아 번뜩 빛났다. 서준은 요한을 보았다.

쿼터백의 어깨였다.

퍽! 맹렬하게 날아간 도끼가 괴물의 다리를 갈랐다. 어두운 밤하늘에서도 선명한 보랏빛 액체가 터져 나왔다. 괴물이 흩뿌린 액체는 바닷가의 흰 모래처럼 찬란한 빛을 내포했다.

눈이 부실 정도로 번쩍거리는 피가 붙잡힌 에어리의 얼굴을 흠뻑 적셨다. 얄궂게도 괴물의 다리가 단단히 붙잡은 부위만이 깨끗했다.

“됐다!”

크리스티나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잘린 다리에 힘을 주는 건 어려웠는지 에어리를 잡은 힘이 점점 약해지는 게 훤히 보였다.

하지만 느긋하게 성공을 음미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괴물의 다리가 잘렸다는 것은 에어리가 자유로워졌다는 뜻이다. 그리고 허공에서 만끽하는 해방을 반길 사람은 드물었다.

“악!”

에어리가 비명을 지르며 잘린 촉수와 함께 지면으로 떨어졌다.

“에어리!”

윌리엄이 에어리를 향해 달려갔다. 추락하는 연인의 몸뚱이는 평소보다 무겁게 느껴졌을 터이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에어리는 다리부터 떨어졌다. 그러나 새처럼 가볍다 여긴 무릎이 구부러지며 윌리엄의 쇄골과 부딪혔다.

돌출된 뼈와 뼈의 만남은 썩 반갑지 못한 결과를 내놓았다. 윌리엄은 피부가 찢어지고 근육이 눌리면서도 받아 든 에어리를 세게 부둥켜안았다. 한 몸처럼 얼싸안은 그들은 몇 번이나 땅을 구른 끝에 멈췄다.

“크윽….”

“아으으…. 비, 빌리.”

에어리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하복부를 비롯해 괴물에게 붙잡혔던 허리 전체에 시퍼런 멍이 올라왔다. 내장은 무사한지 피를 뱉지는 않았다. 물론 피부가 변색된 걸 보아하니 통증 자체는 어마어마하리라.

“에어리, 괜찮아?”

크리스티나가 서둘러 에어리를 부축했다. 에어리는 친구의 도움을 마다하는 대신 어깨를 기댔다.

이 눈물겨운 상황 속에서 서준은 당혹스러웠다.

‘저게 진짜 통하네?’

그는 잘려 꿈틀거리는 촉수를 황당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레몬이 괴생명체 X에게 유효하다는 지식은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밑져야 본전이란 심산이었지, 절대적인 신뢰를 두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도끼의 날에 레몬즙을 묻히면서도 서준은 반신반의했다.

결과야 훌륭했다. 레몬즙을 묻히지 않았다면 아무리 날이 잘 갈린 도끼를 요한이 던졌다 한들, 괴물의 다리가 두부처럼 쉽게 잘리지는 않았을 터이니.

그래서인지 서준의 심장을 가득 채운 건 계획이 통했다는 기쁨보다는 허탈함에 가까웠다. 레몬에 허덕거리는 식인 괴수라니! 《피 흘리는 호수의 살인마》가 왜 망했는지 궁금한 사람이 있다면 당장 이 풍경이나 보면 될 일이었다.

게다가 서준이 에어리를 구하기 위해 귀한 레몬을 사용한 것은 마음속 어딘가 잠들어 있던 측은지심이 불쑥 솟아났기 때문은 아니었다.

‘전략적으로 행동해야 해.’

비록 서준은 전술과 전략의 차이도 몰랐지만 행동에 그것이 필요하단 것 정도는 인지했다. 보통 공포 영화의 참극은 여자 주인공의 절친한 친구가 죽으며 가속한다.

한마디로 에어리는 시발점에 가까운 존재였다. 물론 아닌 예도 있었지만 서준은 보편적인 편견에 근거해 생각하리라 결심했다. 공포 영화가 무수히 범람하는 세상에서 여자 주인공의 친구의 명줄은 발목 양말보다 짧았다.

그렇다면 반대로 그 여자 주인공의 친구가 죽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서준은 여자 주인공의 친구, 에어리를 보았다. 그녀의 오른쪽 무릎이 부풀고 허리의 피부는 검게 멍이 들었으나 일단 겉보기에 목숨은 멀쩡했다.

괴생명체 X와 접촉한 사람은 방사능, 혹은 독에 침식되어 사망한다는 빌어먹을 설정이라도 붙지 않는 한, 당장 고꾸라져 죽을 걱정은 없었다. 레몬의 효능 외에도 에어리의 존재가 스토퍼가 되어 준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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