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12)화 (12/156)

#012

에어리의 찬탄에 윌리엄이 뒤늦게 끼어들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고 그 꼴을 서준이 목격했다. 그는 한가하게 노닥거리는 일행 사이에서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그런 소름 돋는 상상은 그만하자고.”

크리스티나가 팔뚝에 돋은 닭살을 손가락질하며 진저리를 쳤다. 서준이 산장이라 부른 구 합숙소는 그들의 산막과 거리상으로 무척 가까운 편이었다. 팔뚝을 쓸며 크리스티나가 요한을 바라보았다.

“리처드가 어렸을 적에는 나쁜 애가 아니었는데. 어쩌다 그런 친구들과 어울리게 됐는지 모르겠어. 그렇지 않니, 요한?”

어릴 때는 나쁘지 않았던 리처드의 머리통에 꼬챙이를 꽂아 버린다는 말을 한 소꿉친구를 요한이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곧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새 자세가 허물어진 서준의 등을 살살 쓰다듬었다.

“사람이 어린 시절하고 계속 같은 성격일 수는 없잖아. 그리고 리처드가 동생이 생기는 데 그렇게까지 예민할 줄은 실버 아주머니도 몰랐을걸?”

“그건….”

요한이 리처드의 동생을 언급하자 산막 안에 괴괴한 정적이 흘렀다. 하물며 보비마저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리처드 실버의 동생 헨리 실버. 모범생이라 불리는 그의 탄생은 그토록 기이했다. 톰팃톳 태생이 아닌 서준조차 리처드의 동생에 관해 알고 있었다.

서준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그의 뇌는 과거 톰팃톳의 땅을 밟은 첫 번째 날을 향해 유영했다….

여섯 살의 서준은 제 몸뚱이만 한 곰 인형을 꽉 껴안고 갓 이사한 집, 자신의 방에 콕 처박혔다.

어서 오세요, 톰-팃-톳. 어서 오세요, 톰-팃-톳. 머릿속을 떠도는 문구를 지워 버리고 싶었다. 아직 무른 두개골을 반으로 갈라 뇌를 꺼내 씻어 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러나 어린 서준에게 가능한 건 곰 인형 배에 얼굴을 파묻고 눈물이나 질질 흘리는 것뿐이었다.

우아아아….

그는 침대에 몸을 웅크리고는 끝없이 절규했다. 이 심각한 우울에도 서준의 부모는 아이가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다 여겼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덕분에 서준이 홀로 코스모스의 조화와 질서에 고통스러워하는 동안에도 새로운 이웃을 반기는 다양한 손님들이 오갔다.

그중에는 어머니의 손을 붙든 어린 리처드가 있었다. 손수 만든 케이크를 들고 온 그녀는 무척 친절했다고 한다. 그날 서준은 그 모자와 인사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2층 창문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리처드와 실버 부인을 내려다보았다. 팔과 다리가 길고 호리호리한 부인은 아들과 다정하게 웃으며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을 걸었다.

그날은 그런 날이었다. 네 살 크리스티나의 뽀얀 뺨과 마주했으며, 여섯 살 서준이 좌절을 알아 버렸으며, 친절한 이웃과 만났으며, 유성우가 쏟아진 날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톰팃톳에 비명이 울렸다. 실버 부인의 배가 별을 품은 듯 거대하게 부풀었다. 하룻밤 사이의 일이었다.

“난리도 아니었지. 친자 검사까지 했다잖아?”

조심성 없는 보비의 목소리가 서준을 일깨웠다. 랜턴의 불빛이 어른거리는 산막에는 무수한 별이 쏟아지지도, 어른스러운 낯의 소년이 짓무른 눈가를 쓸어 주지도 않았다.

어느새 기운을 차린 우쭐한 표정의 보비가 이웃의 소식을 속닥거릴 뿐이었다.

“헨리가 리처드하고 안 닮기는 했어. 리처드는 실버 아저씨와 쏙 닮았는데 말이지.”

사실 실버 일가의 이른바 ‘헨리 탄생 사건’은 워낙 유명해 내밀한 사정도 아니었다. 그리고 검사 결과 헨리는 명실공히 실버 부부의 혈육이 맞았다.

비록 헨리가 공중 부양을 했다든가, 뒤집힌 카드를 알아맞혔다든가, 야밤에 두 눈이 번쩍번쩍 빛났다는 소문이 들린다 한들 적어도 유전자는 솔직했다.

이렇듯 기묘한 출생 설화를 지닌 헨리는 범인凡人 리처드와 달리 성격도 어딘가 공허하고 신비로운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리처드는 동생과 아직도 데면데면한 관계였다. 에어리가 콧잔등을 찌푸렸다.

“그래도 리처드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동생 타령이야? 지금껏 어울리는 게 브래스면 그냥 그게 리처드 수준인 거지.”

“그건 그래.”

요한이 심드렁하게 동의했다. 어렸을 적 조금 친근했던 사이는 가을의 바스러진 낙엽보다 가벼웠다. 외지에서 온 윌리엄이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은 몰랐는걸.”

“그야 빌리가 톰팃톳에 없었을 때 일이니까. 와우, 생각해 보니 그게 대체 언제 적이야? 벌써 14년도 더 됐네.”

에어리가 입술을 벌리고 감탄했다. 동시에 서준도 소름이 돋았다. 이 빌어먹을 싸구려 영화에 14년이나 갇혀 있었다니! 그간 톰팃톳에서 얻은 것이라고는 편의점 물건 정리하는 방법과 트럭 모는 기술과 콘택트렌즈가 전부였다.

‘빨리 탈출해야지 안 되겠어.’

서준이 식은땀을 흘리며 요한을 흘깃거렸다. 눈이 마주친 요한이 시원스레 마주 웃었다. 차마 햇살처럼 밝게 갠 얼굴에 대거리할 용기가 생기지 않아 그는 어정쩡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연유 모를 호감은 미지의 공포를 불러일으켰으나 당장 살기 위해 필요한 존재에게 네 속내가 무엇이냐 다그치기란 힘들었다. 그리고 서준이 홀로 복잡한 계산을 하건 말건 에어리가 감탄을 이어 나갔다.

“이 마을, 크기도 작고 외지기까지 하면서 참 별별 일이 다 있단 말이야. 무슨 도시보다 사건이 많은 것 같아.”

“맞아. 톰팃톳에는 한나 오 랜턴부터 시작해서 참 대단한 사연이 많지. 헨리도 그렇고, 조 룸펠슈틸츠헨 감독에 명배우 돌리, 기니피그 레전드까지!”

“남의 할머니 이름 마구 부르지 말아 줄래, 보비?”

신이 나 끼어든 보비에게 크리스티나가 싸늘하게 대꾸했다. 평소라면 제법 능글맞게 대답했을지도 모르겠으나 서준에게 시달린 보비는 금세 주눅 들었다.

보비의 불퉁한 얼굴을 보며 크리스티나가 이마에 손등을 얹었다. 그녀의 눈가에는 피로가 거멓게 달라붙어 수척한 인상을 풍겼다.

“그리고 기니피그 레전드는 또 뭐야? 네가 멋대로 이름 붙인 거잖아. 신시아가 키우던 기니피그가 자동차를 추월한 것 정도로 호들갑이 심해.”

“하지만 크리스티나, 그건 정말 대단한 일이야.”

보비가 답답한 가슴팍을 두드리며 주장했다. 서준도 귀가 솔깃해졌지만, 그는 보비와 달리 눈치란 것이 있었다.

“그만 좀 해. 난 그래도 대도시보다는 톰팃톳이 조용해서 좋아. 뉴욕이라든가, 로스앤젤레스라든가, 시카고 같은 덴 어디 험해서 마음 놓고 살겠냐고. 우리 어릴 때 유아 납치 사건도 있었고 흉흉하잖아. 그런 데 비하면 여기가 낫지.”

“…….”

서준은 입술을 다물었다. 연쇄 살인마 가스마스크와 식인 괴수가 살아 숨 쉬는 땅에서 주인공이 내뱉은 말에 무어라 반응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했다.

‘무슨 말이라도 한마디 얹었다가는 복선이나 암시 되는 거 아니야? 내레이션으로 그 대사는 끔찍한 죽음을 불러왔으나 서준은 알지 못했다, 같은….’

갑자기 어깨를 떠는 서준을 요한이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그는 상처가 난 부위를 용케 건드리지 않았다. 호탕한 생김새와 달리 섬세한 손길에 서준이 안온함을 느낄 무렵, 오로지 보비만이 용감하게 크리스티나에게 의견을 피력했다.

“아니야, 크리스티나! 톰팃톳은 대도시에 지지 않는 사건의 온상지야!”

“보비…. 그럼 너는 지금 진짜 살인마가 나타났으면 좋겠다는 뜻이니?”

분별없는 용기를 사람들은 허세라 부른다. 침몰한 배처럼 쪼그라드는 보비에게 요한이 한마디 던졌다.

“때와 상황을 가릴 줄 알아야지, 보비.”

“잠깐, 요한.”

그때 조용히 있던 윌리엄이 낮은 목소리로 이목을 끌었다. 그는 드물게도 난처한 표정이었다.

“휴대 전화의 신호가 잡히지 않아.”

윌리엄이 내민 휴대 전화의 화면에는 과연 신호가 잡히지 않는다는 표시가 떠 있었다. 크리스티나가 제 주머니를 뒤적여 휴대 전화를 꺼냈다. 곧 그녀의 얼굴에도 낭패감이 떠올랐다.

“이게 무슨 일이야? 낮에는 잘 터졌잖아.”

“채팅 어플도 안 켜져. SNS도…. 아예 인터넷이 안 되는 모양인데?”

에어리의 손가락이 빠르게 휴대 전화에 깔린 애플리케이션을 눌렀다. 그러나 전화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연결되지 않았다. 바깥과 연락할 수단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자 산막에는 아까보다 더한 적막이 찾아왔다.

떨떠름한 분위기와 뒤섞였던 종전과 달리 지금의 공기는 더욱 무거웠다. 에어리가 애써 밝게 말하며 윌리엄의 팔을 끌어당겼다.

“하하, 여기 숲이라 전파 상태가 영 아닌가 봐. 그래도 경비소에 전화기가 있으니까 그걸 빌리면 되겠다. 그렇지?”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터지지 않는 휴대 전화를 바지 뒷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맞아…. 내가 전화로 예약했으니까 여기에 분명 전화기가 있기는 할 거야.”

“결정됐네! 다 같이 가면 되겠다.”

에어리의 목소리는 불안한 기분을 감추려는 듯 쾌활했지만 끝이 떨려 소용없었다.

“에어리, 너는 내가 지켜.”

“아, 빌리!”

한 쌍의 지빠귀가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는 사이 서준이 열심히 뇌를 굴렸다.

‘가스마스크의 정체는 캠프장의 요리사니까…. 요리사만 잘 피해 가면 되겠지? 게다가 사람 수가 많아졌으니 쉽게 당하지는 않을 거야.’

차근차근 제 상황을 머릿속에서 정리하던 서준은 손가락에 닿는 감촉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요한이 그의 손을 꼼꼼히 살피는 중이었다.

“어…. 요한, 이제 괜찮아. 아까 붕대도 감았고.”

“그렇다기보다는. 장갑을 끼워 주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다친 손에 그건 힘들겠더라고.”

“장갑?”

요한은 입을 여는 대신 가방을 쏟은 흔적을 곁눈질했다. 서준은 포장도 뜯지 않은 얇은 라텍스 장갑을 보며 당혹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그가 평소에 자주 끼는 물건이기야 했지만 왜 요한의 가방에서 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넌 결벽증이잖아? 우릴 더럽다고 생각할 테지!”

서준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보비가 한껏 비꼬았다. 울분이 스며든 빈정거림에 서준도 진심으로 말했다.

“그건 오해야, 보비…. 난 그냥 널 만지기 싫은 거야.”

서준의 거짓 없는 참된 마음에 온몸이 붉게 달아오른 보비가 버럭 외치려고 할 때였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산막 입구 쪽 지붕이 흔들렸다. 대화가 일시에 끊겼다.

“…….”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눈빛만이 서로를 향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요한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투명하지 않은 산막의 지붕에 무엇이 떨어졌는지 아는 건 불가능했다. 초조한 공기가 일행 사이를 돌아다녔다.

가장 먼저 나선 건 에어리였다. 그녀는 불안한 기색을 떨치려는 듯 어색하게 다리를 움직였다.

“별거 아닐 거야. 왜, 부엉이가 떨어졌을 수도 있지.”

“에어리, 그러지 마!”

크리스티나가 낮게 친구를 불렀지만 에어리의 움직임이 더욱 빨랐다. 다른 이유가 있었다기보다는 에어리가 좁은 산막의 입구에 가장 가까웠던 탓이 컸다. 그녀는 윌리엄을 붙잡았던 손을 놓고 뻣뻣한 움직임으로 문을 열었다. 끼이익, 닫혔던 공간에 차가운 밤공기가 들어왔다. 선선하고 일견 시원하게 느껴질 수 있던 바람은 오싹하기만 했다.

그리고 문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뭐야.”

싱거운 현실에 에어리가 산막에서 한 발짝 나갔다. 주변을 휘휘 둘러보던 그녀는 뒤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봐, 아무것도…. 어?”

에어리의 눈이 깜빡거렸다. 그녀의 눈꺼풀에 무언가 툭 떨어졌다. 속눈썹에 걸린 액체가 뭉그러지며 시야를 방해했다.

손등으로 닦아 내자 물기가 묻어났다. 그것은 역한 비린내가 났다. 툭, 투툭. 액체는 한 방울로 끝나지 않고 연이어 내려왔다. 비가 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빗물이라기에는 기이한 악취가 풍겼다. 지독한 냄새에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에어리는 서준을 보았다. 여전히 침대에 앉아 기진맥진한 몰골이었다. 그러나 에어리가 보는 건 현재의 그가 아니었다.

쨍쨍한 햇살이 내리쬐던 정오. 서준이 저주처럼 읊조린 언어. 흐린 하늘에서 피가 내리면….

에어리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산막 지붕에 걸친 하반신이 보였다. 정확하게는 하반신밖에 없었다. 허리가 잘려 상반신이 사라진 시체 하부에서 피가 후두두 쏟아졌다. 벌린 입 속으로 핏물이 들어왔다.

“아아악!”

날카로운 비명이 허공을 갈랐다. 경악 섞인 울음이 미처 끝나기도 전, 산막 지붕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하반신이 주룩 미끄러졌다. 철퍽, 축축하게 젖은 소리가 고약한 냄새와 함께 에어리의 발치로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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