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11)화 (11/156)

#011

3. 오, 랜턴!

“한나 오 랜턴?”

‘잭 오 랜턴도 아니고 뭐야.’

서준은 속이 텅 빈 호박을 떠올리며 세상에 별 이름이 다 있다 싶었다. 피로한 눈가를 움찔 떨면서 엉뚱한 생각을 하는 서준을 알아차린 사람은 그와 바로 정면에 있던 크리스티나였다. 그녀는 갸름한 턱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서준은 한나 오 랜턴을 모르나?”

“그야 룸펠슈틸츠헨 베이비가 아니니까….”

“좀 닥쳐, 보비.”

윗입술을 뾰족하게 내밀던 보비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크리스티나의 목소리에 명료한 울림이 담겨 퍼졌다.

“한나 오 랜턴은 옛날에 이 캠프장에서 친구들하고 집단 자살한 사람이야. 외계인이 있다고 주장하고 다녔는데, 사실 이 하몽 캠프장에 안 좋은 소문이 흐르기 시작한 것도 한나의 사건이 벌어진 다음부터였지.”

“주장이라니, 한나는 정말 우주의 존재와 통신했어!”

핀잔 섞인 아교는 그리 효능이 길지 않았다.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듯 보비가 이빨을 부딪치자 요한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서준은 진동이 전달되는 걸 온몸으로 느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요한은 자신에게 기댄 어깨를 감싸 쥐며 서준의 귓가에 속삭였다.

“준아, 네가 모르는 것도 당연해. 한나 오 랜턴이 벌인 일은 우리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에 일어난 데다가, 부모님들이 좋아할 주제도 아니잖아. 보비는 톰팃톳이 배출한 인재 운운하지만 다들 쉬쉬하거든.”

“배출했다고는 해도 뭐, 결국 이룬 건 없지 않나? 그냥 그 사람이 남긴 걸 멋대로 편집한 수필 같은 게 출판된 적 있을 뿐이잖아. 본인이 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

침대 다리에 기댄 도끼를 힐끔거리던 에어리가 윌리엄의 팔을 붙잡고 끼어들었다. 그녀는 윌리엄과 손가락을 얽고는 흔들었다. 윌리엄은 근엄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사실 나도 오늘 처음 들었어.”

“빌리도 서준처럼 다른 곳에서 이사 왔으니까. 결국 고향 사람 아니면 잊히는 거지. 보비도 한나가 실존 인물인 건 드라마 비하인드 찾다가 정말 우연히 알게 된 거였잖아. 뭐였지? 드라마에 나오는 이름은 안나였나?”

에어리가 가볍게 던진 말에 보비의 뺨이 붉어졌다.

“다시 말하지만, 리메이크된 드라마가 인기를 끄는 건 정말 대단한….”

“그래, 그래. 알았어. 원작은 제작비도 못 건졌지만. 그리고 한나 본인이 남긴 공식적인 기록은 기껏해야 동네 사격장 트로피라고, 보비. 네가 그렇게 추앙하는 이상한 잡지나 책 말고. 아무튼, 서준. 네가 만났다는 그 방독면을 쓴 사람 말이야.”

에어리는 보비와의 대화에 빠르게 흥미를 잃었다. 대신 그녀는 피 묻은 도끼와 서준이 털어놓은 사정에 집중했다.

“그 사람 혹시 그냥 분장한 건 아니었을까? 칼도 가짜고. 오늘은 공포 영화 좀 본 사람이면 아는 그런 날이잖아. 독립 기념일! 마침 이 캠프장도 소문이 좋은 편은 아니니까. 그렇지, 티나?”

창문 근처에 등을 기대고 있던 크리스티나도 친구의 말에 동의했다.

“에어리의 말이 맞아. 네가 거짓말을 한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네가 다쳤다고 한 상처들은 생각해 보면 그 ‘가스마스크’가 입힌 건 없잖아?”

“그건….”

반박하기 위해 척추를 똑바로 세웠던 서준의 상체가 다시 구겨졌다. 확실히 어깨의 상처는 서준이 달아나던 중 팻말에 덧댄 철판에 다친 것이고, 그 외에는 쓰러지고 넘어지고 부딪혀 생긴 흔적이었다.

그야 어쩔 수 없었다. 한 번이라도 하몽 나이프가 박혔다면 서준은 도망치지도 못했다.

“…….”

반박을 못 하니 속이 답답해졌다. 그러나 방독면을 쓴 연쇄 살인마가 저지른 범행의 결정적 증거물인 하몽 생산지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르는 판국에 이곳에서 입씨름할 여유가 있을까? 이곳은 공포 영화 속 세상이며 가스마스크가 필수 불가결하게 엄습하리란 걸 어떻게 설명할 수나 있던가.

서준은 제 언어적 능력을 절대로 과대평가하지 않았다. 그는 타인을 설득할 포부가 없었다.

“준아, 그만둬.”

요한이 손목을 붙잡았다. 그의 손은 서준의 가느다란 손목을 빈틈없이 꽉 쥐었다.

“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사이에 엄지손톱이 부딪쳤다. 어린 시절 고쳤다고 여긴 버릇이 무심코 튀어나와 서준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는 바닥을 쏘아보며 엄지를 슬그머니 내렸다.

이렇게 대화하는 와중에도 가스마스크와 식인 괴수의 위협은 차근차근 다가올 터였다. 에어리는 서준의 음울한 기색을 알아차렸는지 위로하듯 말했다.

“만화나 영화 캐릭터에 과한 이입을 하는 사람들 있잖아. 그런 거였을 거야. 세상에, 연쇄 살인마라니. 그런 사람이 정말 있으려고.”

있었다….

서준은 괜히 침구에 찍힌 발자국을 진득하니 노려보며 자신을 북돋웠다. 그나마 말이 통하는 게 어딘가. 누구처럼 살인마라고 부르짖으며 모함하는 대신 차분히 사연을 들어 주니 감사해야 마땅했다. 이성적인 친구들과 나누는 상식적인 대화는 참으로 소중했다.

그는 부디 제 어휘력이 평소보다 훌륭하길 바라며 입을 열었다.

“가스마스크만이 아니야. 여기 뒤쪽, 그러니까 산장 알지? 그곳에서 석궁으로 습격받았어.”

“석궁?”

앙상하게 마른 손목을 부드럽게 쥐고 있던 손이 움찔 떨렸다. 요한은 자신과 눈이 마주치도록 서준의 몸을 돌렸다. 갑작스럽게 몸뚱이 절반이 뒤틀린 서준만이 깩 비명을 질렀다. 평소 운동과 인연이 멀었던 대가를 일시금으로 지불하는 기분을 느끼는 서준에게 요한이 부산을 떨었다.

“으아, 미안해. 준아. 괜찮아?”

“네 목소리는 진실한데 왜 손은 그대로일까 난 참 궁금해.”

허둥거리는 요한의 손을 떼어 낸 뒤에 서준은 자세를 바로잡으려 했지만 눅진하게 몰려오는 피로 탓에 실패했다. 하지만 제 부족한 체력 대신 남 탓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역시 커다란 덩치가 우물쭈물하니 옆자리가 번잡스러웠다.

낡은 매트리스가 끼익 눌리는 소리를 들으며 엄지손톱을 긁었다. 누가 보아도 그의 감정은 명확했다. 그러나 요한의 걱정은 부당했다. 그들은 친구라는 범주에 속하지 않았다.

오랜 지인. 서준이 정의한 관계성이야말로 가장 정확한 이름이었다. 요한의 이치에 맞지 않은 감정은 서준에게 거북했다…. 서준은 제 엄지손톱을 집요하게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가스마스크는 아니었어. 내가 그놈을 도끼로 위협하고 도망치는 길이었으니까. 날 죽이려고 했던 건지는…. 글쎄, 지금 생각해 보니 확실하지는 않아. 빗맞히기에는 너무 가까운 거리였거든.”

“산장이면 혹시 3층 건물 말하는 거야? 거긴 산장이 아니라 예전에 합숙소로 쓰이던 건물이야. 간단하게 구 합숙소라고들 부르지. 그나저나 석궁이라니….”

중얼거리던 크리스티나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에 기묘한 깨달음이 서려 있었다.

“그거 혹시 골디네 아니야? 골든, 리처드, 브래스. 그 셋.”

“골든?”

갑자기 금·은·동 트리오의 이름이 왜 나온단 말인가? 서준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크리스티나의 끝이 짧은 손톱이 요한을 가리켰다.

“낮에 요한이 목격했어.”

“골든….”

요한은 푸른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곧 그가 활짝 웃으며 서준에게 이어 말했다.

“맞아. 내가 봤거든. 골든이 호수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더라고.”

“골든이 하몽 캠프장에 왔다고?”

의아하게 되묻던 서준의 머릿속에 지저분해진 편의점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하몽 캠프장 외에는 볼 것 없는 곳으로 그들이 왜 왔을까 고민했었다. 정답은 이렇게나 단순했다. 금·은·동 트리오는 하몽 캠프장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서준은 더듬더듬 낮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러고 보니 편의점에 왔었어. 너희가 들렀던 다음에. 우유를 바닥에 내던지고 난동을 부렸는데….”

“그럼 역시 내 옷을 건드린 건 브래스였던 거야? 맙소사, 끔찍해!”

에어리가 진저리를 치자 윌리엄이 연인을 껴안았다. 사정을 모르는 서준이 그들을 멀뚱하게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소금과 간장이 간절했다.

“우유를 왜 던져.”

보비가 의기소침하게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했다. 물론 산막이 워낙 좁아 귀에 구멍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 들을 수 있었다. 서준은 보비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어른거리는 마지막 희망의 불꽃을 꺼트리기 위해 친절히 입을 열었다.

“그 우유가, 보자. 상표는 분명 파운드 밀크였지.”

울상으로 변해 가는 얼굴을 보자 서준은 쥐꼬리만 한 기력이 샘솟는 기분이었다. 그는 요한에게 기댔던 등을 곧게 세웠다.

“더 기대도 되는데.”

요한이 풀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서준은 등을 바로 세울 때가 언제인지 알았다. 바로 지금이었다. 자고로 웅변가는 홀로서기 마련이다.

“중요한 건 우유가 아니야. 어찌 되었건 지금 이 캠프장에는 사람을 향해 마구잡이로 석궁을 쏘는 놈과 진짜 살인마인지, 아니면 자기가 살인마라고 착각하는 정신 이상자인지 모를 놈이 돌아다닌다는 사실이지.”

“심지어 도끼를 들고 다니는 사이비 초능력자도 있고!”

빈정거리는 사람이 누군지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서준이 슬그머니 검지로 도끼를 가리키자 보비가 마치 시궁쥐처럼 후다닥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그의 한심한 몰골을 흘겨보던 에어리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석궁은 역시 브래스가 쏜 거 같아. 사격장에 갔을 때 몇 번 마주쳤거든. 셋 중에 석궁이든 뭐든 쏠 줄 아는 건 브래스니까….”

그녀는 여러 번 깨물어 발갛게 부푼 입술을 다시 잘근거렸다.

“세상에, 기분 나빠! 크리스티나. 설마 그놈들 망원경을 가져왔으면 어떡하지?”

“그랬다가는 저녁 먹을 때 썼던 바비큐 꼬챙이로 놈들의 반짝거리는 머리통을 찍어 버릴 거야.”

“정말 믿음직스러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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