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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10)화 (10/156)

#010

서준은 혀를 차며 보비의 연약한 어깨와 가녀린 팔뚝을 흘겨보았다.

‘보비나 나나 체격이 거기서 거기야. 가스마스크를 만나도 영 도움이 안 될 거란 말이지….’

하물며 보비는 서준보다 키도 작았다. 타고난 체격에 더해 성격도 용기와 기개가 넘친다고 보기 어려웠다. 보비의 못 미더운 몸뚱이를 응시하던 서준은 한시라도 빨리 요한과 윌리엄을 만나고 싶어졌다. 바스락거리는 지도를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은 뒤 그는 앞사람을 채근했다.

“보비, 더 빨리 걸어. 너는 할 수 있잖아. 나는 보비를 믿어. 보비도 보비를 믿자!”

“으응!”

도끼를 휘두르자 벌이 날갯짓하는 소리가 보비의 귓가에 섬뜩하게 들려왔다. 사채업자 버금가는 독촉에 보비의 발이 신속해졌다. 역시 사람에게는 채찍만이 아니라 당근도 필요하다며 서준이 자찬하는 사이 그들은 산막에 가까워졌다.

산막은 보비가 나왔을 때처럼 여전히 어두웠다. 보비는 침을 꼴깍 삼키며 산막의 문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그는 떨면서도 정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데려와 줬으니까, 나는 살려 주는 거지? 그렇지?”

“네 그 비겁함…. 오래도록 잊지 않을게, 보비.”

가스마스크와 식인 괴수에게 크리스티나 일행을 떠넘기기로 일찌감치 마음먹은 사람이 주제에 보비를 야유했다. 서준은 단단히 오해한 보비를 어떻게 이해시킬지는 나중으로 미루었다. 그는 우선 요한과 마주하기로 했다.

“…….”

그러나 막상 손잡이를 잡자 선뜻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상야릇한 기분이 전신을 지배했다. 오한 같기도 하고, 설렘 같기도 한 이상한 감각이 손바닥이 근질근질하도록 돌아다녔다.

산막 앞에 망부석처럼 선 서준을 보비가 이상하게 바라보았지만 늘 그렇듯 보비는 별 대수가 아니었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안쪽을 훑은 서준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그는 나직하게 안내자의 이름을 불렀다.

“보오비?”

“내가, 내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니야! 우리가 머무는 곳은 여기가 맞다고!”

보비는 숫제 경기를 일으키듯 목청을 높였다. 문이 활짝 열린 좁은 산막은 사람 한 명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누가 뭐래?”

“손에 든 도끼나 치우고 그렇게 말해!”

“왜 그렇게 섬세해? 인생 살기 피곤하지 않아?”

서준의 매도에 보비는 무척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보비의 손에 들린 것은 랜턴이었고 서준의 손에 들린 건 피가 흐르는 도끼였으므로 그는 입을 다물었다. 얌전해진 보비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서준이 혼잣말했다.

“네 탓을 하려는 게 아니야.”

서준은 보비를 싫어하는 편이었지만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이는 보비 따위가 바꾸지 못하는 계획이었다. 잔혹한 살육과 참혹한 비명은 미리 쓰인 예정이었다. 일찍이 촬영된 미래였다. 그토록 끔찍한 세상에 그들은 살아 숨 쉬었다.

“이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비좁은 산막에 멈춰 선 채 중얼거렸다. 목소리에는 피로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쾌활한 척 말을 이었지만 숨길 수 없는 흔적이었다. 문득 참기 힘든 외로움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사치스러운 감정은 곧 우심방 어딘가로 구겨졌다.

‘외롭다? 지금 잘못하면 죽을 판국인데 외롭다?’

서준은 저의 정신이 보비를 만나 해이해졌다며 한탄했다. 한가하게 고독을 곱씹을 때가 아니었다. 그는 겅중겅중한 걸음으로 산막 안으로 들어갔다. 이부자리의 구김살이라든가 침대에 찍힌 신발 자국을 보면 보비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서준은 질색하는 표정으로 침구를 내려다보았다.

‘국적까지 갈렸는데 이놈의 문화 차이, 도통 좁혀지질 않는단 말이지….’

휘휘 둘러보던 서준은 결론을 내렸다. 그는 보비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일단 짐이 여기 있는 걸 봐서는 멀리 가지는 않았겠어. 보비, 네 친구들이 갈 만한 곳으로 짐작 가는 곳 좀 말해 봐. 설마 없지는 않지? 보비의 생명이 위급하면 언제든 달려와 줄 든든한 친구들이잖아.”

“…….”

입술을 앙다물고 억울함을 표현하던 보비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그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외쳤다.

“알겠어! 분명 크리스티나와 에어리의 산막에 간 거야. 요한도 너무하잖아. 내가 요즈음 크리스티나하고 분위기 좋은 걸 알면서 유력한 라이벌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이러는 건 페어플레이가 아니지!”

“내가 너희랑 친한 편은 아니지만 그건, 글쎄다….”

보비의 분노는 대단했다. 그는 조금 전까지 꽉 껴안고 있던 공포라는 감정을 멀리 던져 버리고 씨근덕거렸다. 서준은 한국인도 아닌 보비가 김칫국부터 마시는 것이 기가 막혔다.

“요한 젠틸!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절친한 사이를 강조한 것을 까맣게 잊은 듯 보비가 발을 굴렀다. 시끄러운 그의 태도에 서준도 제법 당황스러웠다. 흥분한 보비는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보는 사람을 조마조마하게 만들었다.

“보비. 좀 조용히 닥쳐 봐.”

서준은 보비가 잃어버린 소중한 기분을 돌려주기 위해 도끼를 바로 잡았다. 서준의 행동은 보비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생명은 단발적이므로.

“윽!”

그러나 보비가 목소리를 낮추기 전, 어둡던 산막 입구에서 환하게 빛이 쪼였다. 갑작스러운 불빛에 서준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계속 어두운 곳에 있었던 눈에 지독히도 강한 자극이었다.

그가 왼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산막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랜턴을 든 크리스티나가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크리스티나, 안에 보비 있어?”

그녀의 뒤로 에어리와 윌리엄, 요한이 줄줄이 나타났다. 크리스티나는 오묘한 눈빛으로 보비를 비껴 보며 대꾸했다.

“어, 어어. 안에 있어.”

아무래도 보비의 말을 들은 눈치였다. 이 사실을 보비도 알아차렸는지 얼굴이 해쓱해졌다. 랜턴의 빛 때문에 숨기지도 못했다.

크리스티나의 뒤에 있던 에어리가 친구의 어깨를 툭 치며 산막 안쪽으로 걸어왔다. 그녀는 여름 점퍼의 지퍼를 올리며 연신 춥다, 춥다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투덜거리며 말했다.

“보비, 너 대체 어디 갔었어? 빌리하고 요한이 너 찾는다고 우리 있는 데까지 왔었잖아…. 어, 서준?”

에어리가 한 박자 늦게 서준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녀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낮에는 헛소리를 해도 옷차림은 말끔하던 서준이 꼬질꼬질하게 때가 타 아주 엉망이었다. 여름날의 햇살을 받은 사과처럼 선명한 빨간색이던 조끼는 검붉은 자국으로 얼룩이 들고 찢겼다. 근육이 거의 보이지 않는 다리를 감싼 검은 바지와 흰색이었을 운동화는 동일한 잿빛으로 변했다.

옷뿐만 아니라 사람도 영 못 볼 꼴이었다. 드러난 피부에는 긁힌 자국이 가득하고 무엇보다 어깨와 손바닥 등에 피와 진물이 굳어 흉측했다. 발목과 손목, 뺨은 자줏빛 멍이 들어 부었으며 머리카락은 산발이었다. 눈빛 또한 불손하게 형형했다. 랜턴의 불빛은 서준의 참담한 몰골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더불어 그의 손에 단단히 붙잡힌 도끼의 날도 반짝 빛났다. 에어리는 도끼를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준아?”

하지만 요한은 서준의 손을 보았다. 도낏자루를 쥐느라 피와 진물이 엉킨 손바닥을 주시했다.

요한은 에어리가 든 랜턴 앞에 섰다. 진한 역광에 요한의 표정이 가려졌다. 서준은 그의 생김새를 알아채기 위해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지만 소용없었다.

다만 새까맣게 그늘진 어둠 속에서도 푸른 눈동자가 기이한 광채로 번뜩였다. 코요테가 연상되는 사특하고 교활한 눈빛이었다. 한낮의 태양처럼 밝게 웃는 요한과 어울리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코요테가 눈을 빛냈다.

“준아, 너 다쳤구나.”

그는 다시금 서준을 불렀다. 친근한 어조였다. 어쩌면 다정한 말투이기도 한 단언. 요한은 거리낌 없이 서준에게 다가왔다. 서준은 문득 궁금해졌다. 자신의 손에 들린 흉기를 요한은 목격하지 못했을까? 생각은 빠르게 부정으로 이어졌다.

윌리엄을 보자. 그는 에어리를 제 뒤로 숨겼다. 크리스티나는 긴장해 턱과 목이 뻣뻣했으며 보비는 어느새 그녀에게 찰싹 들러붙었다. 요한의 시력은 초원을 살아가는 민족과 비등했다. 그러나 코요테, 초원의 민족, 혹은 그저 요한 젠틸은 서준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아 침대에 앉혔다.

“기다려 봐, 구급상자가 있어. 도끼도 손에서 놓고….”

요한은 서준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앉아 가방을 뒤적거렸다. 서준이 손을 들어 똑바로 내리친다면 그의 정수리는 시원스레 쪼개질 위치였다. 과연 그 사실을 아는 건 서준만이 아니었다. 편을 얻었다고 여겼는지 보비가 기세등등하게 주둥이를 팔락거렸다.

“요한, 떨어져! 저 자식은 살인마야. 정신 나간 사이코패스라고! 게다가 나도 협박당했어!”

오리처럼 꽥꽥거리는 목소리를 배경음 삼아 요한은 가방을 뒤졌다. 잘 찾아지지 않는지 가방을 거꾸로 뒤집어 탈탈 털었다. 삼단 우산, 휴대 전화, 속옷, 담배, 장갑, 레몬이 뒤섞여 떨어졌다.

작고 납작한 구급상자는 가장 밑바닥에 있던 모양이다. 요한이 가장 마지막으로 떨어진 상자를 시시덕거리며 주웠다. 그는 상자를 열어 붕대와 연고를 꺼냈다.

“준아. 손 보여 줘.”

서준은 호수처럼 깊고 푸른 눈 속 흐리멍덩한 표정의 겁쟁이와 눈이 마주쳤다. 겁쟁이는 피 묻은 도끼가 구명줄인 양 손바닥의 상처가 덧나는 걸 알면서 그것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서준의 앞에는 194센티 쿼터백이 있었다. 마음이 뿌듯하게 차올랐다. 든든한 체구였다. 서준은 순순히 도끼를 침대 위에 올려 두었다. 그는 약간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음. 부탁해.”

“맡겨만 줘.”

대답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요한은 활짝 웃으며 서준의 손을 잡았다. 차가운 물 냄새가 나는 미소였다.

붕대가 깔끔하게 감긴 손가락을 움찔거리자 요한이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매듭을 문지르며 짐짓 쑥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 이런 거 잘해, 준아. 수선하고 그런 거.”

서준이 손가락을 꿈질거렸다. 확실히 테이핑 실력이 일품이었다. 평소에 운동을 해서 그런지 무척 능숙했다. 크리스티나가 은근슬쩍 맞장구쳤다.

“맞아, 그제도 요한이 내 곰 인형 터진 거 솜 넣어 줬어. 굉장히 잘 채우더라. 내가 하면 꼭 곰이 아니라 머리만 큰 이상한 비율의 몬스터 인형이 되어 버리던데….”

“곰 인형이라면 티나 네가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는 피피페페 시리즈? 그 인형을 고쳐 줬다고? 뭐야, 둘이 분위기 좋았겠는데?”

에어리가 능글맞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그녀는 요한과 크리스티나를 번갈아보며 팔꿈치로 친구의 옆구리를 툭 쳤다.

“에어리! 그런 게 아니야. 우리는 워낙 어렸을 때부터 붙어 다녀서 가족 같은 사이라고.”

화들짝 놀란 크리스티나가 에어리의 손등을 가볍게 때렸다. 서준은 속으로 코웃음 쳤다.

‘요한은 남자 주인공이고, 크리스티나는 여자 주인공이지. 너희는 사귀게 될 운명이고. 뭐, 남자 주인공이라고 다 살아남으리란 보장은 없지만….’

“앗, 준아. 왜 그렇게 날 열렬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거야?”

“…….”

헛소리를 흘리는 요한을 애잔하게 흘겨보던 서준은 문득 분위기가 제법 누그러졌단 사실을 깨달았다. 마침 눈이 마주친 에어리가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단순히 장난을 치려고 말을 꺼낸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뜻밖의 친절에 그는 나무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간단한 치료가 끝난 뒤, 서준은 기탄없이 사정을 설명했다. 편의점에서 일을 끝낸 후 방독면을 쓴 괴인에게 습격받아 하몽 캠프장으로 도주했다…. 사실의 나열이었으나 축약한 이야기는 어딘가 우스꽝스러웠다.

서준은 거짓말쟁이로 매도당해도 어쩔 수 없다며 속으로 자신을 비웃었다. 그러나 서준이 평소 과장되고 허황한 말투를 사용했던 덕에 볼품없고 단순한 단어는 현실감을 더했다. 물론 보비는 그를 쉬이 믿지 않았다.

“뭐? 사실은 살인마가 쫓아와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려던 거라고? 웃기지 마! 세기말도 아니고 멀쩡한 21세기에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그리고 나한텐 그렇게 말하지도 않았잖아. 이것 봐, 거짓말이 분명해.”

“어쩌겠어? 사실인걸. 그리고 보비, 넌 내가 무슨 말을 할 틈을 줘야 말하지. 난데없이 살려 달라며 친구들을 팔아 치울 줄 내가 어떻게 알겠냐고.”

“와아악!”

체력이 바닥까지 떨어진 서준은 치료를 받고 침대에서 일어날 기력도 없었다. 그는 몸에서 힘을 뺀 채 흐물흐물하게 앉아 주섬주섬 말을 꺼냈다.

“그렇게 도망치다가 바닥에 머리를 박고 엎어졌는데…. 아니, 자빠졌었나? 아무튼, 정신 차리니까 보비 목소리가 들려서 그대로 따라간 거야. 내 휴대 전화는 그대로 놓고 와서 너희한테 빌릴 생각이었거든.”

말이 길어질수록 서준의 상체는 힘없이 뭉그러졌다. 마치 연체동물 같은 모습에 요한이 그의 옆에 앉아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대게 했다.

제 뼈의 골밀도가 새와 엇비슷하게 느껴지던 서준은 단단한 버팀목이 생기자 미심쩍은 시선으로 요한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요한이 눈꼬리를 접고 입꼬리를 올렸다.

그때 에어리가 갑자기 떠오른 질문을 놓치지 않고 던졌다.

“서준이야 길을 잃었다고 치자. 너는 대체 왜 한밤중에 혼자 어슬렁거린 거야? 덕분에 빌리하고 요한이 저 큰 호수를 왕복했잖아.”

엄밀히 따지자면 윌리엄은 보비가 에어리가 있는 산막에 가 치근거릴까 봐 걱정한 것이다. 서준은 그제야 요한에게 느껴지던 찬 기운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호수에 있어야 할 식인 괴수는 대체 어디로 사라졌기에 이들이 멀쩡히 돌아다녔는가? 하지만 서준의 어림짐작이 구체화하기 전 보비의 절박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난 그저 한나 오 랜턴이 우주와 교신한 흔적을 되짚으러 갔을 뿐이야.”

크리스티나가 나직하게 탄식했다.

“넌 1999년을 살았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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