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8)화 (8/156)

#008

하몽 캠프장의 야영지는 너른 공터의 중심에 캠프파이어용 장작이 높게 쌓여 있고 주변에 삼각 텐트가 여럿 흩어진 모양새였다.

텅 빈 야영지는 스산한 공기가 흘렀다. 캠프파이어의 장작에도 불이 붙은 흔적이 없고 텐트도 조용한 것을 보아하니 공포 영화의 주역은 다른 곳에서 묵는 듯했다. 하기야 금방이라도 뜯어질 듯 너저분한 삼각 텐트의 꼴은 차라리 바깥에 돗자리 깔고 드러눕는 게 나아 보였다.

‘산막에 있는 건가?’

산막이라고 뭐 그리 대단하겠느냐만 야영지의 텐트보다는 덜 누추하리라. 하지만 목적지를 정한 서준의 발이 머뭇거리며 쉬이 나아가지 못했다. 서준은 산막 근처에 있을 호수, 정확하게는 호수 속에서 눈을 끔뻑거릴 식인 괴수를 떠올리며 어깨를 떨었다.

물론 그는 한가롭게 어깨나 떠는 게 아니라 당장 이동해야 했다. 식인 괴수를 만나기 전에 하몽 나이프에 허벅지가 썰릴 판이니, 선택의 폭이 대단히 좁았다.

문제는 조금 전 식당을 벗어났을 때와 달리 야영지에는 길이 두 개라는 점이었다.

식당과 관리동이 있는 D 구역에는 하몽 캠프장의 입구를 나타내는 표식이 있었다. 덕분에 서준은 입구와 반대편에 있는 길로 고민 없이 들어왔다. 그러나 야영지인 A 구역은 말하자면 하몽 캠프장의 중심지였다.

만약 서준이 안전한 상황에 시간이 넉넉하다면 일일이 확인하면 되었으나 지금 그의 뒤에는 연쇄 살인마가 쫓아오고 있었다. 산막이 있는 B 구역으로 단번에 가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했다.

서준은 캠프파이어용 장작더미를 올려다보며 고민했다.

‘어느 길이지?’

차라리 크리스티나와 요한, 에어리, 윌리엄이 공공질서도 모르는 금·은·동 트리오와 비등한 성품이라면 고성방가를 즐겨 위치 파악이 한결 쉬웠겠으나 하필 그들은 모범적이고 예의를 아는 지성인이었다.

‘크리스티나는 둘째 치고, 나머지는 이제 어지간한 굴레를 벗어던져서 한창 신날 때 아닌가? 요즘 청년들답게 술 좀 마시고, 노래도 부르고. 방화도 저지르면 좀 좋아.’

자연스럽게 보비를 빼고 셈한 서준은 가스마스크를 꽁무니에 달고 그들을 찾아가는 비겁자 주제에 멀쩡한 사회 구성원을 욕했다.

그가 초조하게 발을 구르고 있을 때 바스락 풀숲을 헤치는 소리가 들렸다.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가장 가까운 텐트 속으로 몸을 숨겼다. 시간을 너무 끌었다….

심장이 세차게 뛰고 짙은 낭패감이 피부에 그늘처럼 달라붙었다. 작게 몸을 웅크린 서준이 입을 틀어막았다. 고요하고 적막한 곳이었다. 약간이라도 그가 여기 있다는 티를 내지 말아야 했다.

저벅, 저벅…. 흙을 밟는 소리가 야영지를 어슬렁거렸다. 멀리서부터 들리던 발소리 뒤로 무언가 갈라지는 파열음이 이어졌다. 그 소리는 마치 규칙을 지닌 듯 반복됐다. 어슬렁거리며 걷던 발이 멈추고, 찢어진다. 멈추고, 찢어진다.

소리가 연달아 세 번이 들린 다음에야 서준은 눈치챘다. 가스마스크는 텐트를 하몽 나이프로 찢어 살피는 중이었다.

하아, 하아, 하아….

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들뜬 호흡이 미처 다 억눌리지 않고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왔다. 서준은 부릅뜬 눈으로 삼각 텐트의 갈라진 부분을 바라보았다. 깜빡이지도 못한 안구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는다….

하아, 하아, 하아….

양손으로 막아도 틈을 비집고 나오는 숨이 가려지지 않았다. 서준은 왼손 엄지의 두 번째 마디를 깨물었다. 뜨겁게 열이 오른 살갗에 미지근한 침과 이가 닿았다. 꾸욱, 이를 박아 넣자 절로 눈꺼풀이 아래로 내려왔다. 통증을 침과 함께 삼킨 서준이 눈을 떴다.

갔을까?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던 소리는 더는 없었다. 야영장은 서준이 찾아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저 적막했다.

그는 잇자국이 난 손을 뻗어 텐트를 살며시 걷었다. 아주 살짝, 바깥이 보일 정도면 충분했다. 살그머니 목을 뻗자 깜깜한 야영지가 눈에 들어왔다. 달이 구름에 가려져 아까보다 더욱 어두웠다.

다행히 이미 어둠에 익숙해져 사물을 분간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입 안쪽에 뭉쳐 있던 얕은 한숨이 빠져나왔다.

‘슬슬 나가면 되겠어.’

하도 긴장해 뻣뻣해진 목을 주무르던 서준이 아래를 보았다. 별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그 나름대로 굳은 몸을 풀어 보려는 동작에 불과했다.

눈이 마주쳤다.

삼각 텐트 앞, 가스마스크는 바닥에 엎드려 자신의 먹잇감이 방심할 때까지 조용히 숨죽이고 기다렸다. 방독면에 가려진 얼굴이 마치 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칼날이 쇄도했다.

“악!”

이번에 뒤로 자빠진 건 서준이었다. 그는 도통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가스마스크의 공격을 피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서준의 보잘것없는 반사 신경이 대단한 잠재력을 발휘한 게 아니었다.

“으, 으아….”

아래턱이 뚫릴 뻔한 공포가 그의 사지를 마비시켰다. 서준은 식당에서와 같이 용맹하게 도망가지도 못하고 뒤로 벌벌 기어갔다.

뒤가 트인 낡은 텐트를 벗어나도 그는 여전히 땅바닥에서 바르작거렸다. 바닥의 작은 돌조각에 손바닥이며 다리가 쓸려 아팠다. 따끔거리며 피가 비쳤다. 하지만 서준은 벗어나지 못했다.

애벌레 같은 몰골에 가스마스크는 한층 넉넉한 태도를 보였다. 당장 죽이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의 태연자약한 발걸음은 서준에게 더한 두려움을 안겼다.

부질없는 발버둥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천천히 다가오는 가스마스크를 올려다보던 서준의 등 뒤가 턱 막혔다.

고개를 돌리자 캠프파이어용 장작더미가 짙은 그림자를 만들며 웅장하게 서 있었다. 서준은 뒤늦게 그가 들어갔던 삼각 텐트가 장작더미 인근이었다는 걸 기억해 냈다.

“아….”

말이 아닌 소리에 불과한 것이 목을 간신히 통과했다. 이런 게 체념일까? 따끔거리는 안구에서는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이대로 죽는가. 서준은 톰팃톳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세월을 상기했다. 마치 간수처럼 돌변하던 부모와 정신을 찌르듯 괴롭히던 환시, 그리고 수없이 쏟아지던 유성우.

가스마스크가 다시금 팔을 치켜들었다. 그는 엄숙한 제사장처럼 체념한 제물의 피를 원했다.

하지만 서준은 안다. 가스마스크는 정신 이상자이자 연쇄 살인범에 불과하며 하몽 나이프를 휘두르지만 머리에는 요리사 모자도 아닌 방독면을 뒤집어쓴 앞뒤 안 맞는 악당이었다. 공포 영화에 으레 등장하는 진부한 존재였다. 《피 흘리는 호수의 살인마》에 등장하는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고작해야 《피 흘리는 호수의 살인마》의 등장인물! 순간 온몸의 피가 들끓었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았다.

“으아아악! 후속편도 없는 주제에!”

서준은 손에 잡히는 것을 내키는 대로 휘둘렀다. 고함을 지르며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

그런데 놀랍게도 가스마스크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우비로 감싸인 무릎 아래에서 피가 왈칵 흘렀다. 서준은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손에 쥔 것을 기껏해야 장작이라고 생각했다. 서준의 착각을 정정해 주려는 듯 하늘에서 구름이 걷히고 달빛이 야영지를 감쌌다. 서준은 그제야 자신이 양손으로 단단하게 쥔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도끼였다.

“후우, 후….”

가스마스크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 살인마는 고통스러워한다. 서준은 확신했다. 그는 초조하게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핥았다. 마르고 튼 입술에서 쇠 비린내가 느껴졌다.

하지만 통증보다도 먼저 짙은 환희가 서준의 머리를 뜨겁게 달구었다. 저 빌어먹을 살인마에게 한 방 먹인 것이다. 양손으로 든 도낏자루가 전혀 무겁지 않았다. 그의 손에 들린 건 도끼가 아니라 희망이었다.

‘…아니지, 정신 차리자.’

현실은 냉혹하다. 어설픈 희망에 매달리다가 골로 가는 수가 있었다. 처음의 일격이 성공했던 건 어디까지나 주변이 어두웠으며 가스마스크가 방심한 덕분이다. 결코 서준의 실력이 아니었다.

머리 한구석이 차게 식은 서준은 떨리는 팔을 억지로 진정시키고 꺾이려는 무릎을 채찍질해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선 서준이 도끼를 과시적으로 흔들었다. 팔로는 도끼를 흔들고, 다리로는 뒷걸음질 쳤다. 사지를 낭비 없이 사용하자니 참으로 힘겨웠다.

“…….”

가스마스크는 여전히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그는 하몽 나이프를 들고 달려드는 대신 칼날을 비스듬히 눕히고 서준을 겨냥했다.

따라오지 말라고 으름장을 놔야 할까? 짧은 고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 안건은 곧 마음속 쓰레기통 깊숙한 곳으로 치워 버렸다. 왜인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상대가 귀신같이 달려드는 미래가 보였다. 예지는 아니었으나 확신에 가까운 육감이 경고하듯 귀 옆에서 찌르르 울렸다.

확실히 도끼는 위협적이다. 그러나 서준의 조건이 마냥 좋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는 현재 체력이 바닥까지 닳아 버린 건 물론, 폐를 묵직한 돌덩이로 누른 듯 호흡이 가빴다.

도끼를 들었을 뿐인 평범한 사람인 서준과 사람 써는 데 노련한 베테랑 살인자가 붙으면 누가 우위를 점하겠는가? 더군다나 상대는 우비로 감추어도 듬직한 몸뚱이가 엿보이는 가스마스크였다.

샘솟던 만용이 사그라들고 저절로 겸손한 마음씨가 쑥쑥 자라났다. 그는 겸허하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나는 못 이긴다.’

그렇다면 해야 할 행동은 하나뿐이었다.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던 서준은 가스마스크와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몸을 돌리고 몹시 빠르고 세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한가하게 어떤 길을 고를지 정할 시간은 없었다. 그는 다시금 가스마스크의 반대편 길로 도주했다.

당연하게도 이런 식으로 고른 길이 정답일 리 없었다. 서준은 그토록 염원하던 크리스티나와 친구들이 있는 장소에서 멀어졌다.

한없이 어두운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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